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짱이 Apr 06. 2021

'우리'라는 생명력

<미나리> 비평

* 영화 <미나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나리는 어느 가족이 새로운 땅에 정착한다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다. 타지에서도 억척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내는 미나리의 생명력이 데이빗의 가족과 몹시 닮아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나는 이 영화가 집중하는 것이 억척스러운 생명력 그 자체보다도, 이러한 생명력을 추동하는 더 근본적인 무언가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선 병에 걸려 침대에 눕게 된 순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기억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병에 걸려서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순자는 침대에 누워서 서랍장만 지긋이 응시한다. 영화는 분명 이 응시를 가볍게 넘기지 않는 것 같다. 병에 걸려 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폴을 불러 퇴마 의식까지 시도해볼 정도로, 서랍장에 고정된 그의 시선에 특정한 무게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시선이 향하는 서랍장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순자가 병에 걸리기 이전의 시점에서 서랍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회 소풍을 가는 장면에서, 앤은 순자에게 데이빗이 옷을 입도록 도와달라고 한다. 그러나 순자는 앤의 말을 듣지 않고 데이빗이 혼자 입도록 두라고 말한다. 사실 데이빗은 심장 질환을 앓고 있고, 어쨌든 다소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각별한 보살핌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순자는 그런 데이빗을 내버려 둔다. 그런데 가족들의 각별한 보살핌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데이빗은 떨어진 서랍장에 발을 찧고 만다. 양말을 피로 물들이게 한 서랍장은 데이빗에게 고통을 준다. 이제 순자의 시선이 무엇인지를 밝혀내지는 못하더라도, 그 시선이 가닿는 곳에 고통을 연상케 하는 사물이 있음을 알게 된다.


고통은 영화 곳곳에 있다. 초반에 트레일러로 이사를 가는 순간에도 고통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제이콥은 새로운 삶을 꾸려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이지만, 모니카는 ‘약속했던 거랑 다르잖아.’라고 말한다. 제이콥의 시선으로 꾸려졌을 감상적인 시퀀스가 겨우 초반을 지탱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데이빗 가족의 모습은 특히 모니카의 시선으로 볼 때 상당히 불안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머리를 써야 한다며 스스로 우물을 찾은 제이콥은 물이 떨어져서 작물이 말라 가는 시련에 시달린다. 제이콥이 마주하는 이러한 시련은, 마치 그의 독단성과 고집으로 비롯된 모양새를 보여준다. 모니카와 투명하고 온전하게 합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사를 감행한 그는 결국 모니카와 싸우게 되고, 우물을 찾는 업체의 도움 없이 머리만 잘 쓰면 된다고 자신하다가 결국엔 집에 물이 나오지 않는 결과를 초래했으니 말이다.


물론 좌절만 있는 건 아니다. 어쨌든 잎사귀를 틔우고 작물을 재배한 건 제이콥의 의지와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래처에게 작물을 납품하지 못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그는 새로운 거래처를 찾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러한 제이콥의 모험은 가족의 미래와 일상을 어느 정도 저당 잡아야 하는 모험일 수밖에 없다. 모험 자체를 비난하고 싶은 건 아니다. 제이콥은 가족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나름대로 전망을 보고 계획을 세워서 모험을 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더 나은 경제적 상황이 가족을 구원할 거라는 믿음 앞에서, 가족은 희생되고 있었고 모니카는 지쳐가고 있었다.



모니카는 그럼에도 가족과 함께 해야 한다는 믿음을 놓치지 않는다. 제이콥이 나름대로 시련을 극복하고 열심히 삶을 개척해 나간다면, 모니카는 이러한 노력을 하게 되는 그 기반인 가족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모니카에게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하는 건 바로 가족이었다.




다시 서랍장 이야기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서랍장이라는 시련은 도리어 데이빗에게 일종의 전환점이 된다. 비록 발을 다쳤고 교회 소풍을 가지 못했지만, 그는 순자와 화해를 하고 산책을 하며 미나리도 보러 가고 물도 길러오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데이빗의 심장 건강은 호전되었고, 실제로 뛰기까지 한다. 스스로 시련을 겪은 데이빗은 시련을 극복하고 강해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안다.


 ‘스트롱 보이’라는 순자의 칭찬은 데이빗과 순자 사이의 관계를 화해시켜 주기도 했지만, 다소 과장해서 그것이 데이빗을 강하게 해준 일종의 주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모두가 약하다고 보았을 데이빗을 강하다고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할머니의 말은 분명히 그가 심장질환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을 테니 말이다. 자신의 몸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를 엿듣고는 불안해하는 데이빗을 껴안으며 ‘원더풀 미나리’를 연신 부르던 순자가 없었다면 데이빗이 오롯이 자신의 질환을 극복하고 강해질 수 있었을까?


데이빗이 뛰는 순간을 다시 떠올려 보자. 그가 뛰기를 결심한 순간에는 순자가 있었다. 가족으로부터 홀로 벗어나 멀어지려는 순자에게 이제 데이빗이 손을 잡고 함께 ‘우리 집’으로 향하도록 한다. 그가 뛰는 장면은 그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벅차오르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호전되었음에도)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그가 순자를 위해서 기꺼이 모험을 한다는 점에서 벅차오름은 더 두터워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순자의 실수로 타버리게 된 창고 앞에서 제이콥과 모니카는 기꺼이 그곳을 향해 뛰어간다. 불길 속에서 제이콥은 크게 ‘여보’를 외친다. 그들은 서로를 부여잡고 다시 창고에서 나온다. 그동안의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묘한 벅차오름이 느껴지는 건, 그동안 서로를 구원하지 못했던, 그래서 헤어지기를 결심했던 그들이 다시 창고 안에서 서로를 찾고 함께 위험으로부터 ‘구원’해내기 때문이다.


이제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시련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가 선명해진다. 미나리에서의 시련은 그것을 극복해서 강해지기 위한 시련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그 시련 앞에서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며 계속 함께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함께 해야만 그들은 비로소 강해진다. 창고는 무너졌지만, 모니카는 제이콥과 함께 농사일에 나서고, 제이콥은 전문가가 수맥을 찾도록 한다. 그리하여 영화의 결말은 역경을 극복하여 강해지고 성공한다는 ‘happy ending’이 아니라, 성공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역경 앞에서도 서로를 놓지 않는다는, 그럼으로써 오늘 하루도 억척같이 살아낸다는 ‘to be continue’로 그려지게 된다. 그것이 미나리의 생명력이지 않을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