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짱이 Jul 06. 2021

밀려남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

<개의 역사>

* <개의 역사>의 스포일러(?)가 있지만, 스포일러가 중요하지 않은 다큐멘터리 영화라서, 글을 읽고 영화를 보셔도 무방합니다.

*<개의 역사>는 여성영화 스트리밍 플랫폼, 퍼플레이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영화가 다 끝나고 알 수 없는 감정의 여운이 밀려왔다. 그리고 모호했다. 분명히 어떤 감동을 받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감동으로 다가온 것인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개의 역사>라는 제목을 가졌음에도 어느 순간 개가 나오지 않는 것도 모호했고, 갑자기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모호했다. 그럼에도 나는 무척이나 이 영화가 가진 온도가 좋았다. 그래서 이 온도를 이해하고자 영화를 다시 천천히 살펴보기로 했다.


발화하지 않는 존재 - 백구

우선 백구의 역사를 알아내기로 한 동기부터 생각해보자. 수많은 존재들 중에 왜 백구를 다큐의 주인공으로 삼은 것일까? 인터뷰를 들으며 알 수 있듯이, 백구는 주변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어느 존재다. 물론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개뿐 아니라 주변 이웃사람조차 잘 알지 못하고 지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백구의 역사를 알아내기로 한 것일까? 


이는 백구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언어로 발화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백구를 알아가기 위해서 백구와 직접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백구의 주변의 사람들, 백구와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물어야만 한다. 최소한 어느 한 사람의 역사를 알기 위해 당사자의 발화를 통해 어느 정도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면, 개의 역사는 주변 사람들의 관점이 개입해 있는 여러 언어들 사이로 겨우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언어에서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없는 개의 시간 그 자체는 적극적인 관심 없이는 밝혀지기 힘들며, 바쁘게 흘러가는 인간의 시간 속에서 쉽게 밀려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오롯이 드러나지 못한 채, 주변에 맴도는 어느 존재를 적극적인 관심으로 다시 불러오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에서 밀려나는 존재들

그러나 백구가 죽고 나서, 영화는 발화하지 않는 존재를 조명하는 것에서 벗어난다. 이제 우리는 홍은동의 어느 독거노인과 정자에 머무는 노인들을 보게 된다. 감독은 백구의 역사를 알아내기를 그만두고 어떤 인간들의 역사를 알아보기로 결심한 것일까? 그렇다고 단정 짓기는 힘들어 보인다. 분명 홍은동에서 느낀 정서가 후암동에서 느낀 정서와 비슷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후암동의 백구도, 홍은동의 사람들도 모두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생산적인 기준과 거리가 먼 존재들로 보인다. 어떤 여성은 과거 피부 미용학원에서 일했던 모습을 앨범과 이야기로 보여주지만, 우리는 오늘날의 그가 일을 하거나 과거의 일로 대우를 받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또 정자의 여성들은 여느 사회인들처럼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정자에 앉아 시간을 보낼 뿐이다. 그들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 사회는 경제적 기준에 따라 그들에게 다른 대우를 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에 살지 못하는 이유로 멀리 떨어져 있는 노인정에 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영화가 처음에 백구의 역사를 알아내기로 한 것은, 단지 백구가 발화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류 사회의 기준에 편입되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카메라에 담기는 수많은 개들이 목줄에 묶여 반려동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면, 백구는 그러한 역할로부터 벗어나, 또 식용으로 가공될 위기에서도 벗어나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산다.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 존재는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주변부에 머물게 된다. 백구와 비슷하게 홍은동의 여성들 또한 경제적 활동, 성과를 요구하는 주류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백구도, 그들도 사회에서 밀려나는 존재들로 보이는 것이다.


나는 이 밀려남의 정서가 도시의 건물 이미지와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빨래를 너는 풍경에서부터 불꽃놀이를 보는 후반부 풍경까지, 건물들은 계속해서 등장했다. 그것들은 단지 동네의 풍경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관령 슈퍼가 허물어지는 장면을 잠시 떠올려보자. 카메라가 멀리 보이는 도시의 풍경을 보여주다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백구를 비추게 된다. 그리고 건물이 철거되는 모습이 몽타주 되고, 그것을 향해 짖는 백구의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는 듯한 비둘기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엘리베이터는 올라가고, 도시 건물의 모습, 새롭게 지어지는 건물의 모습, 백구가 보이지 않는 개 집이 순차적으로 몽타주 되며 꼭대기 층에 도착한다. 우리는 이 엘리베이터가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면서 들리는 소음은 엘리베이터가 세워지면서 분위기가 좋아졌다는 말을 무색하게 만든다.


물론 영화가 엘리베이터를 부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포함하는 도시개발에는 분명 어떤 존재를 밀려나게 하는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상승하는 엘리베이터의 운동은 새로 지어지는 건물의 운동과 닮아 있기도 하다. 이제 <개의 역사>에서의 건물은 결코 과거에 머물 수 없다는 인상을 형성하게 된다. 필요에 의해 새롭게 지어지더라도, 어느 순간 그것을 둘러싼 다른 이해관계가 형성될 때, 그것은 무너지고 다시 지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옛 공간의 흔적들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전진하는 시간과 그늘진 존재들

이렇듯 영화가 보여주는 도시 건물들의 인상은 존재를 은폐해버리고 현재가 아닌 다른 시제의 영역으로 물러나게 만든다. 우리는 이러한 존재의 밀려남에 대한 위기를 빨랫감을 너는 장면에서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영화의 처음부터 빨래를 너는 감독의 모습을 본다. 여기에서 카메라는 그 모습만 보여주는 것에서 나아가, 빨랫대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기까지 한다. 거기에는 집게를 꽂는 감독의 손과,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빌딩들이 있다.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의 빌딩에 대한 인상은 뚜렷하지 않았다. 다시 빨래하는 장면이 나올 때에도, 빨랫감을 너는 감독의 모습이 어떤 철장 사이에 갇히는 인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나, 감독은 덜컹거리는 소음과 몽타주를 통해 도시 건물의 특정한 인상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다시 나오는 빨랫대의 장면은 홍은동으로 이사를 가야 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이미지의 대립은 다소 명확해 보인다. 오른편에 설치된 빨랫대의 전경과, 왼 편에 보이는 도시의 후경. 감독은 전경에서 다시 빨랫감을 널지만, 이제 후경의 도시, 건물 이미지의 인상을 떠올릴 때 이 장면의 인상이 마냥 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빨래를 너는 행위는 도시라는 이미지, 철장 사이에 갇힌 이미지로부터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바쁘게 흘러가는 사회의 시간 앞에서 우리의 일상 공간조차 마냥 편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기도 하다. 집에 들어와서 오롯이 자기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어떤 이는 취업에 대한 걱정, 생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해당 장면이 나오고 바로 다음에 홍은동의 여성들이 머무는 정자의 모습을 카메라가 비추는데, 이 정자의 이미지는 고가도로 아래에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여기에서 카메라는 고가도로 위의 건물들의 모습들을 비추다가 천천히 고가도로를 지나 그 바로 아래에 있는 정자로 내려온다. 어느 정자의 여성으로부터 노인정이 너무 멀어서 노인들이 갈 데가 없는 말을 먼저 들었다면, 이 장면이 더 뚜렷한 인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위로 솟은 건물들을 고가도로의 자동차가 운동하는 현재의 순간성이 지탱한다면, 이러한 현재의 순간성 바로 아래에는 정자가 그늘처럼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어떤 존재들은 쉼 없이 움직이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에 저항하듯, 감독은 밀려난 존재들을 끊임없이 카메라로 소환시킨다. 이 존재는 감독 자신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감독을 포함한 우리들조차 모종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바삐 흘러가는 시간성 위에서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쉽게 밀려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의 말마따나, 현재에 밀려난 존재는 온전히 사라질 수 없다. 관계 맺음 속에서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그 존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감독의 어린 시절을 담은 비디오 푸티지가 주마등처럼 흘러나오는 것은, 내가 현재라는 순간 속에서 바삐 살아가더라도 현재에 밀려난 어떤 존재들이 지금도 있는 것처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나는 후암동을 지나갈 때, 새로 들어선 건물의 자리에서 대관령 슈퍼를 보게 될 것이다. 


마지막에 영화는 새해가 시작되며 쏘아 올린 불꽃놀이를 감상하는 거리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는다. 카운트를 세고 새해를 축하하는 소리와 불꽃놀이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상기시켜준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도래하는 어느 현재에 기뻐한다. 그러나 감독은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멈춤 없는 시간의 사건들 앞에서 온전히 언어화되지 않거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밀려나는 존재를 계속해서 불러온다. 


영화는 ‘백구가 죽었다.’는 사라짐의 정서로 시작해서 백구의 나타남으로 갈무리되었다. 크레딧에는 이름 대신 그동안 감독이 관계 맺으며 알게 된 존재들의 모습이 있다. 끊임없는 개발, 바삐 흘러가는 시간성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 현재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현재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내는 고유한 존재들을 은폐하는 껍데기일 수도 있다. 개발이 이루어지는 바쁜 시간 속에서 결국 정형화되고 고정된 모습으로 건물이 끊임없이 박제된다면, 우리 존재는 빨랫감을 너는 감독의 행위처럼 현재의 삶을 살아내는 순간순간의 고유한 행위로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을 살며 주어진 기준으로부터 밀려나고 위기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거나 사라질 수 없는 존재임을 영화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 해당 리뷰는 미디액트와 퍼플레이가 진행한 온라인 워크샵 <자기만의 글 - 페미니즘 영화 비평 쓰기>를 수료하고 작성한 비평 수료작입니다. 여성주의 영화 웹진 '퍼줌'과 미디액트 웹진 'ACT!'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