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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 Nov 04. 2022

가장 개인적인 모양의 사회 영화

<제이슨> 비평

* <제이슨>의 스포일러(?)가 있지만, 스포일러가 중요하지 않은 다큐멘터리 영화라서, 글을 읽고 영화를 보셔도 무방합니다.

* 영화 제이슨은 EBS 다큐멘터리 스트리밍 서비스인 D-BOX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엔, 나는 이 영화가 네덜란드 청소년 복지 정책에 관해 목소리를 내는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여전히 그렇게 생각을 하지만, 영화 자체로만 볼 때 나는 오히려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제이슨이라는 어느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데에 힘을 쏟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잘못된 정책을 지적하고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어느 활동가 청년의 삶을 다룬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따라다니는 영화를 상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주로 남들 앞에서 쉽게 꺼낼 수 없는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하는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물론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들이 드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심리치료를 마친 상태에서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심리치료 과정 중에서 힘겹게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는 제이슨을 담기로 한 결정에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개인의 내밀한 상처를 오롯이 내비친다는 건 당사자에게도, 그리고 감독에게도 부담으로 다가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사실 마샤 움스 감독은 촬영 초기에 영화를 찍지 않기를 결심했었다고 한다. 감독에 따르면 제이슨은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아이였고, 중간중간에 그가 그 스스로에게 무슨 행동을 할 것만 같아서, 두려움 때문에 그를 집으로 데려오곤 했었다고 한다. 제이슨은 일생일대의 목표를 위해서 촬영이 진행되기를 바랐지만, 감독은 어느 순간 자살을 선택하게 될 소년을 찍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저히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없었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트라우마 치료법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촬영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치료과정의 존재 자체가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영화는 제이슨의 상담과정과 그의 일상의 과정을 번갈아 가면서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단지 내담자 제이슨이 아닌,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제이슨을 보게 된다. 그리고 제이슨은 걷는다. 영화는 이 행위를 꽤나 자주 보여준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길을 걷는 제이슨의 모습은 부정적인 정념을 떠오르게 했다. 마치 외롭고 불안하게 느껴진 것이다.



상담 장면 속에서 제이슨은 힘겹게 자신의 말을 꺼낸다. 이야기는 구체적이지 않게 발화되고, 우리가 나아가 알 필요가 없는 질문들에 대해서는 굳이 장면이 더 전개되지 않는다. 꾹꾹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제이슨의 팔에 새겨진 자해의 흔적을 보며 그가 가지고 있을 고통을 상상해본다. 하지만 상상할 수 없다. 그건 접할 수 없는, 오직 제이슨만을 관통하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의 동력이 제이슨의 몸과 몸짓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제이슨의 걷는 몸짓은 상담을 받는 몸짓과 닮아있다. 그 시간은 어둠 속에 있지만, 그는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분주하게 자신의 몸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고통을 넘겨내는 제이슨을 보며, 영화에서 보이는 제이슨의 걷는 행위들이, 단지 어딘가를 향하는 것뿐 아니라, 고여있는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더 담담해지기 위한 몸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 후반부의 장면, 특히 box 2 에피소드에서 청소년 복지 시설에서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그동안 영화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하는 제이슨의 몸짓을 보여주었다면,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발화하는 제이슨을 보여주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두 손으로 입을 막는 몸짓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힘겨운 이야기에 집중하면서도, 그가 자신의 고통에 압도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들었다.


다행히도 상담 선생님은 그를 적절하게 도와줄 수 있었다. 다시 숫자 세기를 하면서, 그 힘겨운 순간으로부터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트에 어떤 문장을 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문구 자체만 본다면 우울하고 힘겹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동안 그를 괴롭혀 온 어떤 응어리를 뱉어낸 듯해서, 오히려 뭉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문구가 적히고 나서야 그는 본격적으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은 상처를 유발하는 나의 감정을 직면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의 저자, 엄기호 씨는 고통에는 사회적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고통을 해결하는 것과, 고통이 야기한 실존적 위기를 해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물론 자신의 고통에서 사회적 측면을 발견하고 해결을 도모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는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자책과 분노, 납득되지 않는 억울함과 후회 등등.


영화는 제이슨의 고통에 관하여 실존적 측면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그러니까 결국 영화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그의 상담이었고, 영화의 전개과정은 그가 어떻게 자신을 압도하는 고통을 다루는 지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제이슨의 삶을 따라간 우리는 네덜란드의 청소년 복지 정책의 문제점을 알게 되지만, 영화를 통해 우리를 이입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건 결국 제이슨의 내면의 여정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기 자살을 시도한 제이슨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 심리 상담이라고 말한 것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어떤 감정을 글로 적고 나서야 비로소 활발하게 사회적 활동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사실은 이 모든 사회적 행동들은 자신의 상처를 봉합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사실 이 모든 사회적 행동들 역시 이러한 상처를 봉합하는 것의 일부가 될 테니 말이다.




제이슨은 친구와 노를 젓지만 번번이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친구는 그것이 우리의 탓이 아니라고, 바람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외부요인 때문에 나아가기 힘들지라도 제이슨은 묵묵히 노를 젓는다. 친구의 한마디와 제이슨의 몸짓, 그리고 그들을 담아내는 감독의 시선을 보며 내가 어떤 온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가야 할지 곱씹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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