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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 Oct 08. 2022

무기력한 낙관주의. 행동으로 빚어내는 희망

<릴리슈슈의 모든 것> 비평

돌이켜보면 어렸을 적 시절은 서로가 정제되지 않은 상처를 쏟아내는 불완전한 시기였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디즈니 영화처럼 이상적인 갈등의 갈무리는 상상조차 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네 세상은 그만큼 버거웠고 어려웠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나는 어느 가수의 팬카페에 가입하게 된다.


거기에는 현실세계에서 보고 겪었던 크고 작은 부조리도 없었고, 숨 쉬듯이 들어야만 하는 비속어도 없었다. 오직 그 가수를 좋아하고, 그 가수의 노래를 함께 듣고 이야기를 나누면 될 일이었다. 우리는 음악과 일상을 공유했고, 서로 편지도 주고받고, 또 같이 공연에 가기도 했다.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당시 나의 숨통이 트일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였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오겡끼데스까' 명대사 장면으로도 유명한 <러브레터>의 감독인 이와이 슌지는, 2001년에 이러한 포장되지 않은 청소년기의 한 단면과 인터넷 문화의 일상을 이야기로 풀어낸 바 있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은 한 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소년 '하스미'의 무기력한 일상과, 그의 또 다른 현실인 인터넷 카페의 모습을 독특한 방식으로 연출한다. 하스미에게 인터넷 카페는 현실 세계만큼이나 진실되었고, 현실 세계보다도 이상적이었다.





※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나에게는 독가스처럼 잔인하게 다가왔다. 하스미의 삶 속에서, 그가 기댈 수 있었던 이상적인 세계는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이상적인 세계는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하스미가 ‘릴리 필리아’라는 세계의 어떤 속성들을 계속해서 안고 갈수록 하스미의 삶은 더더욱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속성은 필리아가 묘사하는 릴리슈슈의 속성과도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릴리의 탄생은 팬들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어느 위인의 탄생과도 같지만, 동시에 어느 위인의 죽음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릴리슈슈의 신화는 상반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필리아는 오직 릴리슈슈가 태어난 사건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마치 어떤 완전하고 고결한 삶에 끼어든 불온함, 불완전함을 외면하는 것만 같다.


심지어 릴리는 인터뷰에서 ‘처음 에테르를 음악으로 만든 사람이 드뷔시와 에릭 사티’라고 말했음에도, 필리아는 릴리가 이미 이전부터 에테르에 눈뜬 사람이라고, 그래서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릴리에 관한 ‘순수한’ 신화가 재생산되는 것이다. ‘릴리 필리아’라는 공간은 온갖 잡음과 부조리로 가득 찬 세계와 동떨어진 아주 순수하고 완전한 세계를 표방하는 듯하다.


여기에서 에테르가 감성의 촉매로서 다양한 감정의 결을 다룬다고 할 때, 현실세계는 그것만큼이나 무기력하게 묘사된다. 훔친 돈으로 레스토랑에서 하스미와 밥을 먹는 츠다는 ‘밝고 아니고 따위가 우리에게 없다’고 이야기한다. 또 호시노에게 괴롭힘 당하는 하스미는 자기 자신을 지켜내지 않을뿐더러, 친구들이 잔인한 상황에 처하는 데 가담한다.


이러한 무기력은 아이러니하게도 호시노의 무기력과 닮아있다. 가세가 기우는 것을 계기로 하여 더 이상 호시노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들을 잔인하게 괴롭혀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스스로의 아픔에 매몰되어 정제되지 않은 모멸감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그의 모습은 자신의 일상에 얽혀 있는 관계망들을 망가뜨린다는 점에서 자신을 지켜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하스미가 릴리의 음악을 듣지 못하게 한다. 하스미의 시디를 반으로 쪼개는 것도, 하스미의 콘서트 티켓을 구겨 던져 버리는 것도, 결국 하스미로부터 호시노가 기대고 있는 릴리의 세계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릴리의 구원은 오직 호시노의 아픔과 관련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스미가 함께 하는 순간, 호시노는 자신이 하스미와 다른 친구들에게 가했던 폭력들을 직면해야 한다. 어느 순간 내던져버린 자신의 무기력한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그러나 순수하고 투명하며 완전한 ‘릴리슈슈의 세계’에서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어떤 세계는 누군가에게 숨통이 되어주지만, 그것이 현실에 대한 회피를 기반으로 이루어질 때, 현실뿐 아니라 다른 세계마저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다시 현실을 직면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쿠노의 모습은 이러한 직면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드뷔시는 릴리가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음악가이다. 릴리슈슈의 노래를 좋아하는 쿠노가 드뷔시의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행동은, 몇몇 팬들이 어떤 세계를 단절하고 고립시키는 것과는 다른 방향의 행동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의 물리적 세계를 직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양아치들의 괴롭힘으로 그는 피아노를 칠 기회조차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는다. 기꺼이 드뷔시의 음악을 연주한다.


영화의 처음을 떠올려보자. 릴리슈슈의 음악과 함께, 그리고 릴리 필리아의 텍스트와 함께, 어딘가로부터 동떨어져있는, 분절되고 기울어진 풀밭에서 노래를 듣는 행위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은 익숙한 현실의 공간에서, 연속되는 화면이 어느 순간 끝나더라도 묵묵히 이어지는 피아노의 선율로 갈무리된다. 거기에는 잔인한 현실의 층위에서도 내가 기댈 수 있는 나의 것을 오롯이 펼쳐내겠다는 의지가 있다. 고립이 아닌 드러냄으로 오늘 하루를 내딛어보겠다는 용기가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다른 상상을 해볼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어떻게든 호시노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움의 손을 뻗는 하스미와 츠다의 모습을, 쿠노가 호시노의 괴롭힘을 겪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하스미의 모습을, 자신의 에테르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깨닫고 하스미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호시노의 모습을, 아니 적어도 피아노를 치는 쿠노 뒤에서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건넬 수 있는 하스미의 모습을 말이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를 저술한 허지원은, '낙관주의'를 미래의 실현 가능성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는 태도라고 지적한다. 거기에는 나의 노력보다는 절대자의 강력한 힘이 상황을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허지원은 낙관주의적 백일몽에 빠져 있는 시간은 무력감을 배우는 시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현실적인 노력을 기울일 에너지는 줄어들고 자신에 대한 평가는 더 가혹해질 뿐이라는 것이다.


반면 '희망'이라는 태도는 다르게 나타난다. 사실 희망이라는 말은 쉽게 해결 가능한 문제 상황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개인이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재난, 혹은 재난처럼 다가오는 고통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특이한 인지적, 정서적 상태가 희망이다. 흥미로운 것은 희망을 경험한 사람은 실현 가능성을 높게 매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희망을 경험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개인의 주체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희망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라기보다는, '불운과 부조리 속에서도 내가 지금 뭐라도 노력하고 있어서 느끼는 가치'에 가깝다는 것이다. 결국 실질적인 확률이 아닌, 오늘의 내가 취하는 행동이 희망을 정의한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의 감각적 장면들은 희망보다는 무기력한 낙관주의를 함축한다.

무기력한 낙관주의는 자기 안으로 매몰되어 축소되는 세계에 가깝다.

반면 희망은 최소한 내가 무어라도 했다는 점에서 나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영화에서 나오는 밀밭은 드넓지만 현실세계와 괴리된 방식으로 그려진다.

반면 피아노를 연주하는 음악실은 비좁고 외로워 보이지만

그것은 현실에 착 달라붙어 자신만의 선율을 바깥으로 확장시킨다.

밀밭처럼 넓어 보이는 고립을 택하기보다는,

좁아 보이더라도 조금씩 확장되는 음악실 같은 삶을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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