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비평
※ 영화 <헤어질 결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번 박찬욱의 영화는 기존의 장르를 변주하는 시도로 구성되었다. 어느 형사가 죽은 남편의 아내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파국에 처한다는, 일종의 느와르 말이다. 영화에서 서래는 팜므파탈의 위치에 서 있는 것 같지만, 영화를 보면서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파국과 비슷해 보이는 단어는 사랑을 은유하는 모호함이 되어버리고, 누군가를 망가뜨릴 것 같았던 사람은 사실 누군가를 보호하고 구원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변주된 장르를 지탱하는 데에는 어느 캐릭터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영화에도 언급되었던 어떠한 '꼿꼿함'이 아닐까 싶다. 도대체 이 꼿꼿함이란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부조리의 시작
영화의 초반부는 부부생활에 권태감을 느끼는 해준이 살인사건 피의 용의자를 만나면서 새로운 삶의 전환을 맞이하는 것처럼 그려지는데, 당장 아내와의 대화 장면과 서래와의 대화 장면을 비교하더라도 알 수 있다. 아내와의 대화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내를 담아내는 것만큼 해준을 가깝게 담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해준을 좀 더 먼 거리에서 담아내면서 어느 정도 심리적 거리감이 있음을 드러낸다.
반면 서래가 처음 등장할 때 서래는 카메라에 비치지 않는 반면, 해준에 대해서는 앙각에서 아이 레벨로 전환되는 클로즈업이 연출된다. 보통 앙각이 인물의 당당함과 권위를 어필하는 숏이라고 할 때, 해준을 담아내는 각도를 변경하는 연출은 마치 그동안 그가 지니고 있던 어떠한 자부심을 전복시키는 느낌에 가까워 보인다.
또 대화를 하는 시퀀스에서조차 해준을 담아내는 오버 더 숄더 샷에서 해준은 서래에게 쏠려있다. 가령 서래의 얼굴을 비출 때 서래는 어느 정도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면, 서래를 쳐다보는 해준의 모습은 중앙에서 벗어나 서래가 있는 오른편으로 위치해 있는 것이다. 혹은 아내와 정사를 하면서도 해준은 서래와 같이 보고 있는 드라마를 공유하기도 하며, 이는 마치 시공간을 함께 하고 있는 듯한 연출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렇듯 영화는 노골적으로 서래에게 빠져드는 해준을 연출해낸다.
해준의 꼿꼿함
해준은 서래를 의심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이는 서래를 향한 해준의 관음을 정당화한다. 여기에서 관음은 다소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해준을 서래의 공간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관음 하는 해준의 마음은 서래의 곁에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서래는 이러한 시선을 전복한다. 해준이 살해 용의자와 대치할 때 서래가 차에서 그를 관음 하는 것이다. 분명 서래는 해준의 의심을 받음에도 해준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해준과 서래의 관계가 묘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준은 올라간다. 그것이 그가 지켜내야 할 바람직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올라감은 일종의 정의구현으로 연출된다. 그가 절벽 투신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서 기꺼이 로프에 몸을 메달아 올라가는 것도, 살해 용의자를 쫓아 계단 위를 올라가는 것도, 모두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행동이다. 어떻게든 올라가고야 마는 해준의 행동에는 올곧은 선을 따라 올라가는 행위가 보인다. 그래서 다시 절벽에 오른 해준은 우위에 점했던 서래를 전복한다. 은폐되었던 서래에 대한 진실을 밝혀낸 것이다.
서래의 꼿꼿함
서래가 해준에게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건 기록을 지운 건지, 자신을 불리하게 만드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사건 기록을 지운 건지는 모호하다. 다만 명확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서래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애당초 불법 체류자로서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가 한국에 와야만 했던 이유는 자신의 증조부가 소유했던 호미산에 가기 위해서였다.
서래는 박탈당한 존재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조부가 소유한 산을 빼앗긴 존재이다. 그는 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다. 이러한 삶에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남은 선택지는 궂은일, 외주화 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는 외주화 된 돌봄을 맡는다. 그리고 자신을 소유하고자 했던 폭력적인 남성과의 삶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서래의 사연을 아주 구체적으로 알 수 없을지라도 추론할 수 있는 건, 그에게는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다는 것이며, 원치 않는 부조리에 처할 확률이 높은 맥락 속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조리를 마주하는 어떤 이가 제도의 도움을 받고자 하더라도, 때때로 제도는 불가피한 상황에 놓인 어떤 존재를 불리하게 몰고 간다.
결국 서래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것은 제도권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폭력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래는 명백한 범죄자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생존을 지키고자 자신만의 산을 올랐던 사람인 셈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해준과 닮아있다. 각자 어떤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서 움직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해준은 제도권 안에서 인정받아 넓은 선택의 폭이 주어진 존재인 반면, 서래는 그렇지 못한 존재라는 것이다.
제도권 바깥에서 서로를 구원하다
2부에서도 해준과 서래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영화는 이러한 긴장감을 허물어버린다. 서래가 해준을 어떻게든 지켜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한 가지 짚어야 할 점이 있다면, 이미 해준은 스스로 제도권 바깥으로 나선 존재라는 점이다. 서래가 해준을 속였다는 사실이 변함이 없을지라도, 해준의 붕괴의 기반을 마련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해준이었다. 어쨌든 해준은 자신의 아내를 속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모호함이 형성된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불륜을 통해서 부조리한 관계가 된다. 그들의 불륜은 제도권 안으로 포섭될 수 없으며 도덕적으로도 용인될 수 없다. 하지만 서래의 삶을 들여다볼수록, 제도권 바깥에는 부조리하게 내몰린 어떤 삶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행동은 부도덕함에도, 오히려 그럴만했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서래의 삶과 행동이 그러했고, 제도권에 걸친 해준은 그런 서래를 구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그 자체로 부조리했기 때문에, 특정한 이해를 가진 타인은 그것을 폭로할 수도 있다. 해준이 처한 상황은 비교적 명확하지만, 서래는 더 다층적인 부조리의 연쇄 속에 놓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복잡하다. 더군다나 그는 진심으로 해준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래에게 부조리를 바로잡을 수 있는 선택지는 무엇이었을까?
사라지지만 영원히 남는 것
마지막에 해준이 위치추적기를 켜고 서래를 쫓을 때, 카메라는 서래의 자동차를 버즈 아이드 뷰로 잡아낸다. 거기에는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직의 도로가 보인다. 자동차는 아래에서 위로 상승한다. 하지만 서래의 자동차는 상승하기를 멈추고 옆에서 뭍을 침범하는 파도를 향해 빠져나간다. 고속도로의 형상이 부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승해야만 하는 제도권의 형상이라면, 거기에서 안간힘을 쓰는 서래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제도권에서 기꺼이 벗어나기를 선택한다. 파도가 자신을 위협할지라도 말이다.
해준도 서래를 쫓아 위로 상승하지만, 멈춘 서래의 자동차를 보고 마찬가지로 옆으로 빠져나온다. 제도권으로부터 벗어나 파도를 헤치며 서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 어쩌면 다른 의미로 다시 붕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래는 기꺼이 파도를 맞이함으로써 스스로 사라짐을 선택했고, 그렇게 제도권을 벗어난 해준의 시간을 증명할 유일한 알리바이로서의 자기 자신을 지워냄으로써 해준을 구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옆으로 벗어난 서래가 사라졌을 지라도, 그를 따라 옆으로 벗어난 해준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해준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경찰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해내며 살아갈 것이다. 물론 그의 불면증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말이다.
아쉬운 점
영화가 가진 모호함과 그 속에 숨어있는 듯한 알레고리는 이 영화를 읽어내는 묘미이다. 다만 이 영화가 나에게 크게 다가오지 않은 것은, 마지막의 서래의 선택이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에 서래가 죽음을 선택했다고 보기 때문에) 서래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오직 죽음뿐이었을까? 그냥 멀리 떠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죽음을 선택한 것이 마치 그들 사이의 로맨스를 더 애틋하게 만들어내면서도 '미결로 영원히 남는다.'는 도식을 완성시킨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영화 속에서 생동하는 어느 실존이 마지막에는 지워지면서 알레고리만 남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