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노바디> 비평
* 영화 <미스터 노바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최선의 선택을 하기를 바라고 잘못된 선택 때문에 후회를 하기도 한다. 마치 우리의 선택이 무언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 것만 같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자신의 선택이 결과에 영향을 끼치기는 하지만, 그 결과의 결정적인 요인까지는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선택은 다른 인과의 연쇄 과정을 거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혹은 아예 다른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아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릴 때 헤어져 행방조차 모르던 두 남녀가 어느 노숙인의 죽음으로 인해 재회하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또 타지의 실업자가 달걀을 삶으려고 끓인 물이 기후에 미세하게 영향을 끼치면서, 우연히 재회한 여자가 적어준 연락처가 빗방울에 번져 없어질 수도 있다. 이렇듯 영화 <미스터 노바디>는 어떤 결과라는 것이 누군가의 선택뿐 아니라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사건들과 함께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니모라는 소년의 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상상 속에서 니모는 다양한 미래들을 마주한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 덕분에, 현실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선택에 이어지는 결과들을 미리 겪을 수 있는 것이다.
니모가 가장 큰 선택을 하게 되는 지점은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는 기차역이다. 니모는 엄마를 보며 그 이후의 가능세계를 보고, 또 아빠를 보며 그 이후의 가능세계를 본다. 양자택일이 강요된 선택지에서 모든 가능성들을 돌아보지만, 거기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지를 고르는 건 어려워 보인다. 오히려 니모에게 최선의 선택지는, 자신이 본 모든 가능성들이 아니라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의 길로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철도역에서 벗어나, 어떤 종착지에 다다를지 알 수 없는 나뭇잎이라는 우연을 불어 보낸다. 예측할 수 없게 되더라도, 이제 니모의 선택은 여러 요인들과 맞물리면서 구성되는 유일무이한 특별한 사건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선택의 긍정을 마치 그 어떤 선택도 다 괜찮다는 식의 상대주의로 그리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된다면 니모는 마지막까지 그저 yes와 no가 적힌 동전을 튕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상상 속 118살의 니모는 숨을 거두기 전에 나지막이 안나의 이름을 부른다. 마치 안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만 같다. 이제 팽창했던 상상의 세계가 축소되면서 이제 기차역의 니모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결국엔 조금이라도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기꺼이 선택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선택의 동력에는 사랑이 있다. 즉 내가 무엇을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곧 나의 선택이 되는 것이다. 원치 않는 결말을 맞이할 지라도, 애당초 결말이라는 건 오직 내 선택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낙담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나답게 살면 되는 것이고, 다양한 요인들과 맞물려 다가오는 특별한 순간들을 기꺼이 맞이하면 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당시 우유부단한 고등학생의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봐 두려워서 내 진로조차 제대로 선택하지 못했던 나에게, 이 영화는 괜찮으니까 원하는 바를 따라가 보라고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선택을 해왔고, 결과를 막론하고 나에게 다가온 시간들을 긍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10년 뒤에 마주한 이 영화에서 내가 아쉬움을 느낀 것은, 선택의 동력인 사랑에 관하여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택을 긍정하라는 메시지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영화가 굉장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더 파고들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단점은 명백하다.
니모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수영장에서 안나가 다이빙을 하는 장면은 아주 천천히 낭만적으로 연출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방 한켠에서 쳐다보는 니모의 시선과 교차된다. 그렇게 니모는 계속해서 안나를 보고, 안나도 어느 순간 그런 니모를 쳐다본다. 청소년기의 그들이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도 그들은 계속해서 서로를 쳐다본다. 그들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맥락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영화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누군가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배치한다.
앨리스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뜬금없게 그려진다. 앨리스는 클럽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스테파노와 있다가 슬픔에 빠지게 된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기를 기억하지도 못하는 니모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심지어 학교에서 괴짜로 여겨지는 니모에게 관심을 보이고, 자기에 대해 아무 말이라도 해보라는 말에 갑자기 화성의 중력을 이야기하며 괴짜스러움을 뿜어내는 니모를 보면서도, 강한 끌림을 보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때까지 서로의 끌림에 관해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 몹시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영화는 이들의 끌림에 설득력을 부여하려고 하는 것인 냥, 갑자기 티비쇼 내레이터 니모의 말을 빌려 사랑에 빠지게 되는 맥락을 과학적으로 풀어낸다. 생물학적인 반응이라던지, 혹은 특정한 기억을 통해 끌림을 느낄 거라는 가설은 앨리스와 니모 사이의 끌림을 설명해주는 것 같지만, 정작 영화는 앨리스가 니모를 어떻게 봐왔고 니모가 앨리스를 어떻게 봐왔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니모와 진의 관계는 더 얄팍하다. 클럽에서 니모는 갑자기 진과 춤을 추기로 하고, 진은 그런 니모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러더니 그들은 키스를 하고,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것이다. 도대체 왜 진은 니모를 좋아하게 된 것일까? 이와 관련된 내용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니모의 경우, 그가 진을 진정으로 좋아하지 않고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진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런 니모의 선택에 고분고분 따르는 진의 모습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분명 선택의 동력으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적어도 ‘모든 선택은 옳다.’에서 한 발자국 나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가 사랑에 대해 설명하는 바는 몹시 단순하다. 사랑에 빠지는 계기뿐 아니라, 사랑하면서 관계를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구체적인 의미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를 향한 갈망과 어긋남만을 보여줄 뿐이다. 안나와의 이야기에서 니모는 그저 안 나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기만 한다. 그나마 청소년 시기에 구체적인 관계를 맺지만, 함께 열렬이 일탈을 하고 사랑을 맺는 과정에서 대체로 볼 수 있는 건 이끌림뿐이다. 앨리스와의 관계에서는 조울증을 앓는 앨리스와 이를 챙겨주는 니모를 보여주고, 또 스테파노를 여전히 좋아하고 모종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앨리스의 면면도 보여주지만, 정작 앨리스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살펴보기 힘들다. 진과의 이야기에서는 그저 진을 니모의 이야기를 위해 소모시킬 뿐이다.
영화는 선택 자체가 결과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아니고 어떤 선택도 가치가 있기 때문에 기꺼이 우리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안나, 앨리스, 진의 이야기는 (우연이 개입됨에도) 궁극적으로 니모의 선택에 좌우되는 모양으로 그려진다. 안나, 앨리스, 진이 능동적으로 선택함으로써 맞물리는 갈등들은 그리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니모의 상상세계이기 때문에 세 여성의 선택과 갈등하는 순간들을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이 세계가 니모 스스로에게 매몰된 세계라고 느껴진 것은, 니모와 관계 맺는 세 명의 히로인들이 개연성이 부족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며, 나아가 그들의 삶을 결정짓는듯한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니모의 세계에서 히로인이 소모되는 궁극적인 장면은, 니모가 극장에서 앨리스의 삶을 관람하는 장면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영화는 앨리스가 집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집을 떠난 앨리스의 결말은 니모의 소설을 통해 만들어지고 연극 무대에서 상연된다. 무대 위의 앨리스는 여전히 스테파노의 사진을 보고 그를 그리워하며 미용실에서 일을 하지만, 정작 앨리스는 진짜 스테파노로 보이는 어느 중년 남성을 보고도 무심코 지나친다. 이 결말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러한 방식은 니모가 다양한 가능세계를 펼치는 동시에 그 주변부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결정짓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앨리스가 스테파노, 니모만을 갈망하지 않는 삶, 오롯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관계 맺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앨리스를 채워줄 수 있는 다른 좋은 친구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앨리스를 중심으로 펼칠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을 텐데, 그러한 것들은 니모의 가능세계에서 보이지 않으며, 오직 타자기를 두드리는 니모의 영향 안에 있는 방식으로 단편적으로 구성될 뿐이다.
<미스터 노바디>가 전달하는 선택의 긍정이라는 메시지는 몹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메시지를 풀어나가기 위한 이야기와 캐릭터는 니모의 욕망에 포섭된 채로 얄팍하게 그려지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런 점에서 인생이 놀이터라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그 놀이터가 오직 누군가의 욕망에 의해서만 기획되는 놀이터라면, 그것은 기꺼이 부서지고 다시 구성되어야 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