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생활 적응기 #4
세상에는 수많은 회사들이 있고, 각 분야별 회사들마다 접하게 되는 독특한 유형의 고객들이 있을 거다. 출판사의 경우도 회사는 다를지언정 동일한 유형의 고객으로 인한 비슷한 썰 하나씩은 대부분 갖고 있을 거다. 첫 회사를 다닐 때 난 막내여서 외부에서 오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내가 입사하니 내가 입사하기 전 막내셨던 분이 해방되었다며 즐거워하셨다. 난 퇴사할 때까지 새로운 막내가 없었...ㅠㅠ) 전화통화를 좋아하지 않는 내게 전화받는 일은 세상 스트레스받는 일 중 하나였는데 그 와중에 스트레스를 더해주시는 독자 유형이 있었다.
첫 회사가 특정 분야의 단체 겸 출판사다 보니 그 분야에 종사하시는 많은 분들이 주요 독자층 중 하나였다. 격월로 연령별 정기간행물을 발간하는데 새로운 호가 나올 때가 되면 어김없이 한 분 이상이 같은 문의를 하셨다. 그건 독자분이 그동안 너희가 발간한 다양한 도서들을 구매해 온 독자이니 이번 호 정기간행물 전체 내용을 파일로 줘라는 문의였다(혹시 보내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아주 당당하게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10년도 훨씬 넘게 지난 일이지만 이 문의 내용의 전화들은 기억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ㅋㅋㅋㅋㅋ
제일 처음 이런 문의의 전화를 받았을 때 황당했지만 회사에서 어떻게 처리하는지 정확히 모르니 상급자에게 여쭤보겠다고 상황을 넘기고 팀장님께 여쭤보았다. 당연히 팀장님의 대답은 "판매하는 책이고 신간호인데 그걸 파일로 보내줄 수 없지. 과월호도 못 보내줘(이번 호가 안되면 과월호 파일이라도 달라는 문의를 같이 한다)."였다. '그래, 그게 당연한 거지' 생각하며 이후 동일한 문의를 하신 독자분들께 "죄송하지만 판매하는 책이니 그 내용을 파일로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전했다. 그러면 분명 발간 월마다 문의한 사람은 다 다른 것 같은데 어쩜 그리 같은 과정을 거치는 건지... 그 과정의 단계는 아래와 같다.
1단계. 한번 더 물어봐요~해줄 수 있잖아요~. 소문 안 낼게 좀 해줘 봐~.
통화를 하고 있는 내게 아무런 권한이 없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왜 그렇게 빡빡하게 구냐, 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 다른 사람한테 주지 않을 테니 좀 줘라, 이 분야 종사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책 만드는 거면서 도와줄 생각은 안 하냐' 등의 말을 하면서 조른다. 그러면 난 '죄송한데 판매하는 책이라 안된다'는 말만 반복한다. 못해도 5분 이상 같은 실랑이가 지속된다.
2단계. 에이, 안 넘어오네~어쩔 수 없지.
몇 번을 다시 졸라도 같은 톤으로 계속 '죄송한데 못 보내드린다'라고 응대하면 결국 대부분은 여기서 포기한다. 너무나 아쉬운 한숨을 흘리며 "쩝, 알았어요." 정도만 하시는 분들은 정말 양반인 경우다. 너무 오래 시간 끌 수는 없고 안 되는 건 뻔히 알고 있었던 거니 끊지만 끊는 그 순간까지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면서 투덜대는 분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투덜거리는 정도로 물러나는 것도 다행인 경우다. 통화는 겨우 끝났지만 이미 20여분 이상이 지난 뒤다.
3단계.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실제로 들었던 말이다. 아주 흔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한두 분만 있었던 건 아니다. 실랑이를 지속하다 보면 자기 분을 못 이겨 꼭 저렇게 쩌렁쩌렁 소리 지르는 분들이 계셨다. 저 말 이후 붙는 말은 욕만 안 했다 뿐이지 그에 준하는 말들이 쭉쭉 쏟아진다. 처음 이 단계를 겪었을 때 받은 충격은 참 어마어마했다... 대외적으로 참 점잖으신 분들이 아무 권한도 없는 직원에게 폭언을 해대는 모습이라니... (이때 정말 사람에 대해 실망 많이 하고 회의감 많이 들었었다. 이런 분은 극소수이고 결국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든 그저 같은 사람일 뿐임을 받아들인 뒤에야 괜찮아지더라.)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이런 분일수록 정말 자기가 누구인지 밝히는 분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대개 본인이 잘난 사람이라는 것과 네가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런 대접이냐는 속풀이를 다 들어줘야만 통화가 끝이 난다. 이런 경우들을 여러 번 겪다가 나중에는 참지 못하고 "어떤 분이신대요?"라고 물어봤더니 답도 안 하고 후다닥 끊어버리더라! (이런 경우를 보면 그냥 참는 게 능사는 아닌 것 같다. ㅋㅋㅋㅋ)
이후 다닌 회사들에서는 내가 고객 응대를 하지 않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유형의 고객에 대한 이야기는 은근히 자주 들려온다. 내가 겪었던 당시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던 시기라 문의할 수도 있었겠다 싶지만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강화된 요즘도 전체 책 내용을 파일로 넘겨달라는 문의는 여전히 온다고 하더라. 이런 문의를 하는 분들은 사실 다 안다. 안된다는 거. 알면서도 '한번 찔러보자. 안된다고 하면 좀 강하게 나가볼까?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정도의 마음으로 고집 피우는 거다. 기억을 되짚다 보니 전화 응대를 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 유형들을 겪으며 대응력이 높아져 도움이 된 부분이 있는 건 인정하지만 안 되는 건 애초에 요구를 안 하시는 분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