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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Kyoo Lee Nov 15. 2020

비밀의 정원 (by 이진규)

이번 글은 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Housemate 들에게 아침인사를 하고 분주하게 집을 나설 준비를 합니다. 점심 도시락을 만듭니다. 메뉴는 늘 같습니다.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이 늘 준비되어 있는 잡곡빵 두 쪽을 토스터기에 굽고, 집 주인 아주머니가 대량으로 구매해 놓으신 치즈 덩어리를 cheese cutter 위에 놓고 한 조각 자릅니다. 구워진 빵 위에 약간의 잼을 바르고 나름 얇게 잘 자른 치즈와 roast beef 혹은 ham 도 얹습니다. 쿠킹포일로 잘 포장하면 점심 도시락 준비 끝. 빵과 치즈와 햄 등이 언제나 있어서 샌드위치 싸기에 그만입니다.


아내를 학교에 내려줍니다. 그리고는 집 쪽으로 돌아오다 살짝 꺾어서 Elisabeth C. Miller 도서관으로 향합니다. 복잡한 오거리를 지난 게 금방인데 갑자기 한적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넓지 않은 주차장이지만 세워진 차들이 별로 없어서 주차하기 좋습니다.


가방을 챙겨서 오늘도 출근하듯 이 도서관으로 들어갑니다.



왼쪽과 오른쪽에 이름 모를 꽃과 풀이 가득한 잘 가꿔진 정원을 지나 회랑 안으로 들어갑니다.


회랑 끝에 도서관이 있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덕분에 4개 있는 큐비클 책상 중 하나,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뷰가 있는 책상에 앉을 수 있습니다. 자리에 앉아 랩탑을 켜고 오늘 분량의 글쓰기를 합니다.


금방 점심시간이 됩니다.


도서관 건물 밖에 자리 잡은, 대체로 비어 있는 벤치에 앉아서 집에서 준비해 온 샌드위치를 꺼냅니다. 늘 같은 샌드위치인데도, 한가로운 도서관 벤치에 앉아서 눈 앞의 들판과 초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그 심심함이 좋은 반찬이 되어 늘 맛있고 만족스런 식사가 됩니다. 혼자 먹지만 혼자인 것 같지 않은 시간입니다.


점심 식사 후 다시 도서관에 들어가 쓰던 글을 이어서 씁니다. 모니터를 보다가 피곤하거나 무료해지면, 또는 글을 어떻게 이어가야할지 생각이 잘 안 나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봅니다. 거기에는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나무들과 하늘이 만들어내는 참 좋은 그림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보이는 풍경입니다.

맑은 날은 푸르러서 좋고, 흐린 날은 흐린 대로 참 분위기가 있습니다. 맨날 보는 풍경이지만 질리지 않습니다. 계속 바라보고 싶은데 마음이 급해서 또 글 속으로 빠져듭니다.


도서관 문 닫는 시간에 맞춰서 나서면 아주머니 댁 저녁 시간에 맞게 도착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아내가 저녁 식사 준비 담당이어서 조금 더 일찍 도서관 문을 나섭니다.



제가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던 시기의 어느 하루입니다. Field research를 마치고 write-up을 하던 시기였는데, 이때에는 학교에 가지 않고 마침 집 근처에 있었던 School of Environmental and Forest Science의 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학위 논문을 마무리했습니다. 이 도서관은 캠퍼스에서 조금 떨어진 호숫가에 있었는데, 산림학과도서관답게 거대한 실습용 비닐하우스도 있고, 건물 주변에 가꿔진 정원이 아름다웠습니다. 도서관 내부에는 온통 꽃과 나무와 조경에 대한 책들 가득이었는데, 그 책들을 열람하는 사람들은 좀 있었지만 저처럼 자리 맡아 놓고 하루 종일 책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덕분에 언제 가도 빈 책상이 있었습니다. 이 복잡하고 붐비는 시애틀에서 사람도 차도 별로 없는 그야말로 숨겨진 비밀의 도서관이었습니다. 아니, 도서관인지 정원인지 잘 모를 만큼 아름다운 공간이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이 곳을 잘 안 가게 되었습니다. 문을 일찍 닫아서 평일 저녁에는 못 갔었고, 주말에는 늘 주말의 일들이 있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제 마음 속에서 도서관의 필요가 줄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공간이었는데도 삶의 장소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면서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떤 공간은 삶의 어느 시간 동안에만 누릴 수 있나 봅니다.


언젠가는 휴가 중 하루에 별다른 계획 없이 집에 있었습니다. 아내가 어디든 제가 원하는 곳을 가보라고 해서 오랜만에 밀러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아내는 쉬는 날 기껏 가는 곳이 도서관이냐며 조금 황당해했지만, 저는 쉬는 날 아니면 다시 찾을 수 없었던 이 공간이 참 반가웠습니다.


이렇게 밀러 도서관은 제가 참 좋아하는 공간이고, 이제는 좋은 기억으로 다시 떠올리기만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채워나갔던 그 단조롭고 비슷비슷한 하루하루가 너무 좋았어서, 지금 오늘의 삶에 만족하지만, 그래도 늘 되돌아가고 싶은 어느 하루입니다.


휴가 때 도서관을 가고 싶다는 이상한 남편을 따라온 아내가 이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이렇게 창문이 큰 거실이 있는 집에 살게 해주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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