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크게 후회해 본 일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그때 더 열심히 할걸, 이건 안 하는 게 더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물론 있지만, 후회라고 꼽을 만큼 마음에 새겨진 일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별 후회 없이 사는 저에게도 하나의 예외가 있었는데, 위의 사진 속 영화 “만추”와 관련이 있습니다.
2010년 초에, 제가 처음 유학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로 기억합니다. 두 번째 학기인지 세 번째 학기인지를 정신없이 허덕이며 수업을 쫒아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이메일이 하나 왔는데, 한국인 감독 누구가 제작하고 배우 누구누구가 출연하는 영화를 차이나타운에서 찍을 예정인데, Asian 엑스트라를 찾고 있으니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연락을 달라는 이메일이었습니다. 읽고 나서,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네, 하면서 이메일을 지웠습니다. 그때는 아직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과 “사랑의 불시착”을 통해 현빈 배우님의 팬이 되기 전이었고, 학교 수업 따라가기가 너무 벅차서 다른 일에 시간을 들일 여유가 없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네, 그 영화가 바로 “만추”였고, 저는 그렇게 현빈 배우님과 탕웨이 배우님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들과 한 컷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다시 안 올, 엄. 청. 난.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생각이 나서 아내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꼭 갔어야 했고, 그게 안되면 자기라도 대신 보냈어야 한다며 한참 황당해했습니다. 돌아보니 그 말이 정말 맞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메일이 담고 있었던 어마어마한 기회를 알아보지 못했던 그 일은 후회 잘 안 하는 저에게 하나의 후회스러운 일로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오래도록 시애틀을 상징하는 영화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었습니다. 시애틀을 생각할 때면 스타벅스만큼이나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영화 제목입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시애틀을 대표하는 영화이지만, 한국인인 저에게는 이제는 “만추”가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저에게 진한 후회가 된 그 인연 아닌 인연 때문인지는 몰라도요.
이런 저와 다르게, 중국인들에게도 시애틀을 상징하는 영화가 따로 있었습니다.
함께 일을 했던 중국분에게서 영화 “시절인연”(베이징에서 시애틀을 만나다)에 대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 저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그분 말씀을 듣고 보니, 베이징 등 공기가 좋지 않은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자연환경이 좋은 미국에 이민 오고 싶어 하는데, 바로 이 영화 때문에 미국 중에서도 시애틀 지역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실제로도 최근 몇 년 사이에 투자이민 등을 통해 중국에서 오는 이민자들이 많이 늘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이 영화의 영향이었다고 생각을 하니 새삼 놀라웠습니다.
시애틀로부터 동쪽에 벨뷰(Bellevue)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시애틀과는 호수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이 도시에는 Microsoft 비롯해서 여러 기업들의 본사가 위치해 있습니다. 또한 이 도시는 미국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학군이 좋아서 자녀의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모들이 꿈꾸는 거주지역이 되었습니다. 이 밸뷰에 특히 중국 이민자들이 많습니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벨뷰 시에 거주하는 외국인 중 절반 이상이 중국인이라 합니다.
영화 “시절인연” 과 맑은 공기, 학군 등에 이끌려 시애틀로 이주하는 많은 중국인들이 벨뷰를 선택할 때 고려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풍수라고 합니다. 어디선가 한 번 들어보았음직한 “배산임수 -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에 맞는 도시가 또 벨뷰이어서 인기라고 하는데요.
벨뷰에서 시애틀을 바라보면 앞쪽으로는 얼핏 바다와 같은 큰 호수인 Lake Washington 이 있고, 뒷쪽으로는 밸뷰에서 더 동쪽으로 들어가면 나타나는 사마미쉬 등 숲이 울창한 지역이 있기 때문에 배산임수가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듯 제가 잘 모르는 사이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잇는 새로운 영화들이 계속 시애틀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영화 만추와 시절인연은 시애틀을 이루고 있는 Asian community의 어떤 모습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다른 도시들도 그렇겠지만, 시애틀을 이루고 있는 Asian community는 저에게 늘 정겹고 편안함을 주는 공간입니다.
인종에 상당히 민감한 미국 사회에서 “Asian”으로 함께 묶여서 분류되곤 하는 아시아 지역 국가들에서 온 사람들 사이에는 이민 전에는 없던 친밀감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왠지 저들의 문화가 나의 문화와 가까울 것 같고, 저들이 백인들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해줄 것 같고, 무언가를 함께 해 본 적은 없어도 그냥 동지 같은, 그런 선입견이 있습니다. 근거 없는 선입견일지 몰라도, 이민자로 살아가는 낯선 마음을 조금은 푸근하게 해 주어, 나 스스로 Stereotype을 만드는 것 같아 조금 불편한 옳고 그름의 고민을 잠시 떠나서, 무작정 친근한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사람들을 처음 만날 때에도 Asian 들과는 할 얘기가 많습니다. 베트남이나 중국사람들은 항상 감사하게도 먼저 한국의 문화와 음식에 대해 칭찬해줍니다. 한국의 드라마나 예능 등도 저보다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일본 사람들을 만나면 저는 신이 나서 제 학창 시절과 함께 했던 게임과 만화 이야기들을 늘어놓습니다. 슬램덩크와 드래곤볼,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들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는 것은 신선한 기쁨이었습니다. 일을 통해 만난 몽골 사람들이나 중동 사람들은 감사하게도 한국인에 대한 default 값으로 설정된 듯한 신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박사과정에서 만나 함께 공부했던 많은 친구들이 인도네시아에서 왔습니다. 덕분에 저는 이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들의 나라에 대해 배우고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각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는 것 못지않게 제 삶에 큰 기쁨을 주는 것은 그들의 음식입니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일식이나 베트남 쌀국수와 월남쌈, 인도 카레 등이 제가 경험해 본 Asian food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는데, 시애틀에서 만난 우리 입맛에 딱 맞는 태국 음식, 방대한 중국 음식, 언제나 신선한 쌀국수 이외의 베트남 음식, 브랜드화를 잘하는 대만 음식, 식당 수가 적어 늘 아쉬운 말레이시아 및 인도네시아 음식은 늘 한식을 그리워하는 타향살이에 귀한 위로와 기쁨이 되어줍니다.
이러한 각 나라의 음식을 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즐기다 보면 알던 메뉴에 대해 배우는 것도 많고 새로운 메뉴도 알게 되어 늘 유익합니다.
저와 아내는 외식을 할 때면 베트남 음식과 타이 음식을 자주 사먹습니다. 딤섬은 늘 원하지만 자주 먹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거의 모든 식당에서 딤섬이 점심식사로만 제공이 되기 때문에 평일에는 가기 어렵고,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차이나타운의 어느 딤섬집은 주말 점심에 갈라치면 줄이 너무 길어서 포기하게 됩니다. 이렇게 늘 아쉽고 그리운 딤섬을 중국 친구들과 함께 먹으면서, 딤섬이 원래 중국에서는 아침으로 먹는 음식이어서 미국에서도 저녁에는 팔지 않는다는 사실과, 중국 중에서도 남부의 음식이어서 베이징이나 기타 북부 지역에서 온 사람들 역시 딤섬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많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저녁 메뉴로 딤섬이 없다는 현실을 보다 더 수월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할까요.
Asian community의 음식들은 Asian 뿐만 아니라 다른 racial group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그 인기가 날로더 해지고 있음을 늘어나는 Asian restaurant과 이를 가득 메운 (코로나 이전의 상황입니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보면서 그 인기를 확인합니다.
요즘 한인 변호사협회의 Board member들과 Antiracism에 대한 책을 함께 읽으며 북클럽을 하고 있는데, 마침 지난주에 Cultural racism에 대한 챕터를 읽고 생각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Cultural racism 은 다수를 점하고 있는 백인들의 문화만이 우월하고 표준이 되는 것처럼 여기는 잘못된 시각을 의미하는데, 이와 반대되는 Antiracism 은 각 race의 문화를 고유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그 모든 문화가 함께 미국의 문화를 만들고 있다고 인정하는 시각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논의하면서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로 Korean culture에 대해서는 다른 racial group에 속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음식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K-Pop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이 아닌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비슷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맛있는 음식으로 점점 더 많이 인정받고 있지만, 우리의 문화가 미국의 문화 속으로 녹아들기에는 아직 갈 길이 너무 먼.
Asian community 의 음식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화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지난 11월에 워싱턴주 연방 하원 의원으로 당선된 메릴 스트릭랜드 의원이 취임 선서 때 한복의 아름다움을 미국 전역에 알린 것은 참 감사하고 기쁜일이었습니다.
한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스트릭랜드 의원은 카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이 자신의 인도 heritage를 자랑스러워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인됨을 자랑했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이 분이 당선되었을 때 어느 은퇴한 한인 연방 하원의원이 방송 인터뷰에서 “순수 한국인이 아니어서 아쉽다”라는 무식한 망언을 해서 너무 부끄럽고 제 마음이 상했었는데, 이러한 racist statement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려 준 스트릭랜드 의원에게 감사합니다.
저 역시 이 부분에서는 많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Asian community에 대해 생각할 때,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는 맛있는 음식만 주로 생각했었습니다. 음식 이외에, 보트 피플로서 힘들게 미국 땅에 와서 살 길을 개척해야 했던 베트남 사람들의 역사와, 필리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생각, 미국이 일으킨 전쟁을 통해 국가의 재건을 강요받아야 했던 아프간 사람들의 양가감정, 이러한 역사 말고도 개개인들의 삶을 이루는 소소한 의식, 생각, 전통 등등. 함께 Asian community를 이루고 있는 이 땅의 이웃들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에 온 후 Asian 이민자들과 한층 더 가까워졌습니다. 아직도 백인들의 미국 사회가 낯설기만 한 저에게 Asian community는 늘 포근하고 든든한 base camp와 같이 느껴집니다. 코로나가 어서 지나가서, 어느 식당에서 어느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서로에 대해 배워가는 어느 하루를 또 맞이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