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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무 Jun 01. 2022

나를 펑펑 울게한 건 왜 대부분 염창희였을까?

삶과 죽음, 삶의 연장선으로써의 죽음과 그리고 또 삶.

염창희에 대하여

지난 토요일에 나의 해방일지 15회를 봤다. 마지막 한 회를 남겨둔 15회를 보고난 후 마음 속 어딘가에 쓸쓸한 감정이 떠나지를 않았다. 이제 내일이면 16회 마지막이다.

나는 이들을 잘 보내줄 수 있을까?

누가 가장 내 마음에 짠할까? 염미정일까 염기정일까 염창희일까 아니면 구씨일까.


솔직히 구씨와 미정의 서사는 둘이 3년만에 재회한 지점인 14회 엔딩에서 어느정도 전체 극에서 두 사람이 차지하는 이야기의 일종의 엔딩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둘이 재회한 시점이 이듬해 봄이 아니라 두번의 봄을 그냥 보내고 세번째 봄이란 정도가 다를 뿐, 어쨌든 그 해의 봄은 둘이 다시 만난 그 날부터 시작됐다.  

여의도 샛강역 다리 위에서 환하게 웃으며 재회한 두 사람. 그날은 공교롭게도 염미정의 개새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득달같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개새끼인 정찬혁이 결혼하는 날이었다. 결혼식 날 네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만천하게 까발려주겠다는 다짐을 하고 똑같은 개새끼가 되려던 염미정을 끝까지 망가지게 놔두지는 않는 사람 구씨가 전화한 그 순간, 둘의 이야기는 거기서 이미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둘은 만나게 되어있고 결국에 대시 만났고 그건 둘의 추앙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그래서 나는 둘의 엔딩이 어떤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엔딩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같이 있는 투샷으로 만족할 수 있는, 죽지 않고 살아서 서로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한 그런 엔딩.


사실 15회에서 마음이 아팠던 건 염창희 때문이었다.

웃음기도 없고 핏기도 없고 푸석푸석하고 무채색 표정의 염창희. 이미 온갖 폭풍을 온몸으로 뚫고 지나와 이제야 비로소   바라보며 한숨 내쉴  있게  창희는 지난 시간이 온통 겨울이었고 어두운 터널이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욕망없고 욕심없고 자꾸만 인간의 깊이로 깊이로 들어간다. 60 인구를 1원짜리 동전이라고 한다면 인류는 동전이  산처럼 쌓인 것이라고 그렇게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거라는 실존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출발해 결국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하고 침잠해 다다른 곳은 다름아닌  사람,  사람의 깊이와 존재의 무게는  산만큼 크다는  어이 깨달아내고야  염창희.


무엇이 그를 이토록 달라지게 했을까.

인간은 다 한 종자라서 한 사람만 깊이 만나보면 다 알 수 있다고 말한 지현아를 지난 2년동안 얼마나 깊이 알게되어서 이제 그냥 우리 축복하며 헤어지자고 괜찮다고 어떤 미련도 욕심도 없이 그저 자유를 선물하는 창희가 된 걸까.

도대체 지난 2년간 창희와 현아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할 수만 있다면 박해영 작가님께 간절히 부탁하고 싶다. 창희와 현아의 이야기를 스핀오프로 만들어주시면 안될까요.


창희의 이야기는 어쩌면 전국 수천개의 체인을 가진 편의점 본사 대리에서 퇴사를 한 그 날부터 시작됐는지 모른다. 퇴사를 하고 며칠간은 아침에 옷을 차려입고 출근을 하는 척 하다가 기정이에 의해 아버지 어머니께 퇴사한 사실이 까발려진 그 날부터, 그리고 늦잠은 잤지만 밭일 공장일을 도와야 하는, 구씨의 빈 자리를 채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백수 아들의 자리로부터 말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느날 홀연히 엄마가 없어졌다. 엄마는 늘 그자리에 있다가 어느 한 순간 예고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창희는 가족 중 유일하게 엄마의 마지막을 본 사람이 되었다. 마치 고등학교 때 할아버지의 임종을 보내드린 그 날처럼, 창희는 황망한 마음에 슬리퍼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뛰쳐나가 아버지를 외치지만, 그는 안다. 엄마를 마지막으로 보내주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그리고 가족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도 나라는 것을.

그 후로 창희는 좋든 싫든 아버지와 함께한다. 얼마쯤이었을까? 창희가 그 말 많던 창희가 아버지 제호 옆에서 계란후라이를 부치고 쌀을 씻어 밥을 앉히고 아무말 없는 아버지 앞에서 본인도 아무말 없이 밥을 우겨넣던 시간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세상에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창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 순간이, 창희는 자신의 삶에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온다는 것을 안다. 이건 누가 이렇게 만들어도 만들어질 수 없는,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배후에 누군가 있다면 이건 분명 그 누군가가 나를 위해 친 장난이거나 계획일 것이라고. 그렇게 창희는 인생 최대의 큰 기회 앞에서 그 운명을 모든 힘을 빼고 받아들인다.

거의 된 거나 다름없는 형식적인 기술 테스트를 가는 길에 시간도 여유있어 잠깐 어디를 좀 들렸다 간다는 창희가 들른 곳은 혁수의 병실, 그 곳에서 창희는 직감한다. 아 이 형이 이제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때마침 짠듯이 현아도 혁수형의 보호자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 창희는 그 복잡하고 정신없는 순간에 짧은 찰나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 인생에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나의 운명은 이것이구나. 이것을 나는 받아들여야 하는구나.

형,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아 나 이 씬에서 정말 엉엉 울었다.

마지막회를 본지 3일이나 지났는데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날 것 같다.


우리의 인생에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쩌면 내 모든 사소한 바램들, 아주 선한 욕망들, 주변인들을 위한 소망들까지도 깡그리 무시하고 돌진해올 때 나는 과연 창희처럼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건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결코 나를 비껴가지 않음을, 창희처럼 어른답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게 세 번의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목도한 창희는 더이상 과거의 자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죽음이란 삶의 연장선 상에 있지만,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한 사람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작가님은 가장 힘을 뺀 상태로 죽음을 알려주었다.

죽음이란 이렇게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하나 하나의 삶 위에서도 언젠가 너무 그럴듯하고 또 너무 생경하게 무심코 닥쳐올 어떤 사건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닥쳐오는 사건을 막을 제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을...


죽음의 깊이에 가 본 사람의 삶은

더이상 하나의 레이어에 머물 수 없다.

삶이라는 레이어 바로 아래 죽음이라는 레이어가 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전거 타고 가다가 엎어져서 울고, 저 멀리 건너가는 현아를 향해 손을 흔들고, 산포에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얼굴은 웃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나는 창희가 잘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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