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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희 Dec 16. 2023

큰 나무

올여름 마지막이 될 것 같은 황도를 먹고 키보드에 손을 올린다. 입안 가득 향이 머물러 있다. 혀 가득 달콤함까지. 복숭아라는 이름의 과일은 여운이 상당하다. (뒤끝이 대단하구나 너어~)


9월은 서울 서교동 최규하대통령가옥 인근 모처에 2주째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중이다. 머무르는 공간의 건물주님은 다큐 영화의 감독님이라고 하는데 영화 한 편으로 건물을 올렸다고 한다. 그곳에 오래 있었던 친구들이 말을 해서 영화를 유튜브로 봤는데 나도 다큐를 찍어 건물주가 되고 싶다 잠시 생각했다. ㅋㅋ


새로운 동네에 가면 큰 나무를 찾는다. 합정역에서 계단을 올라와 골목길로 접어들며 이 동네에서 가장 눈길을 끈 나무는 CU편의점 옆에 서있는 은행나무다. 주변을 둘러보면 서교 어린이 공원을 둘러싼 은행나무들 중 대장님이다. 초입의 5층 건물과 키가 비슷하니 얼마 후엔 건물 높이를 넘을 것 같다. 두툼한 몸통이 우람하고 가지도 무성하다. 도시에서 보기 드문 모양새다. 가끔 도시 안에 이렇게 존재감을 뽐내며 남아있는 나무님을 보면 마음이 든든하다.


아빠의 고향인 정읍 집에도 그와 비슷한 은행나무가 있었다. 아빠 중학교 때 가져와 심은 나무라고 하는데 상징물처럼 대문 앞에 두 그루가 기지개를 쫙 켜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2019년 아빠가 하늘나라로 여행 가시고 아빠의 형제분들이 나무를 베었는데 이후에도 환영처럼 그 나무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생명은 물질의 사라짐이 아니라 그 후에 어떤 인상으로 남아 있는가로 계속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이맘때 머무르던 제주 연동의 베두리오름에 있던 먼나무도 생각난다. 우람한 몸통도 근육 같았고, 가지가 다양하게 뻗어나가 제주 바람에 춤을 추듯 존재해 왔음을 아주 오래 살았음을 알려줬다. 굳이 스케일로 치면 이십보다 육십이 가까워진 나이가 되어 늙은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큰 나무를 떠올린다. 에구구 선배님.


저마다 개성을 뽐내는 제주의 카페들 중 지금도 인상이 깊은 곳은 큰 나무가 있는 5L2F와 커피템플이었다. 마당의 큰 나무 아래 앉아 따뜻한 것을 마시고 좋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놓이고 행복했다.


기차를 타고 논산으로 가다 보면 계룡에서 연산 구간이 아름답다. 그 구간 사이에 눈에 띄는 아름드리 큰 나무가 멀리서도 기차를 뚫고 여기 좀 보소 한다. 논산작업실을 지키고 있는 금전수도 식물 중에서 덩치가 커서 내가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논산 다녀온지 보름이 넘어서 물을 줘야 하는데 이번 주말은 논산에 못 가서 친구에게 부탁해야지 생각한다.


어쩌다 보니 매해 남이섬에 가고 있는데 남이섬의 메타세쿼이아 길이 좋았던 것은 큰 나무 아래 있으면 상대적으로 내가 작아지면서 어린아이가 되는 기분이었기 때문 일터다. 어릴 때 방학 때마다 시골에 갔는데 정자나무 아래서 돌을 주워서 공기놀이를 했었다. 불안함이라고는 없는 즐거움의 순간들.


큰 나무 아래서 그림처럼 결혼식을 올린 친구 녀석의 결혼식도 떠오른다. 참 멋있었지. 큰 나무를 떠올리니 마음이 차오른다. 사주에서는 꽃나무 을목이지만 갑목을 좋아하는 것도 습관인가? 


오늘은 내 마음 속의 큰 나무(아버지) 아래에서 점심을 먹으러 봉안당이 있는 안성에 간다. 아침부터 아이처럼 신이 난다. 


20230916


- 1줄 자기소개 / 나는 어떤 사람

몸치이지만 음악과 춤을 좋아해서 오랜 시간 이런저런 춤을 추었습니다. 타고난 한량인 거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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