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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Jun 20. 2022

너를 보다

보다. 사랑. 죽음


   본다는 행위는 2가지 요건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보는 주체와 주체에게 보이는 객체로서, 나는 너를 본다는 표현은 구식이다.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어떠한 필터가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객체는 주체에게 굴절되어 보인다. 인식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가령 사과를 볼 때 이브의 사과를 떠올리거나, 사과 알레르기를 떠올린다는 식의 경험에 따른 인식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에게 사과 그 자체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건 주체와 객체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공으로서 비어있는 허공이 아니라 무언가로 채워져 있다. 그 채움이 모종의 필터로서 기능한다. 객체를 왜곡시키는 간극은 객체와 주체 사이의 공간과 시간이다. 즉 공간-마주 보는 대상이 떨어져 있는 거리와 시간이 내가 너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주체가 객체를, 객체가 가지고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그 간극을 제거해야 한다. 시간은 비물질적이며 거리는 물질적이다. 거리는 가시적이므로 조작 가능한 물질에 해당한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 사이의 거리는 아무리 가까이 좁힌다 하더라도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원을 컴퍼스로 완벽하게 제도하더라도 그것이 원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원은 인식론적으로 존재할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형이다. 원을 무한히 확대하면 한 점에서 거리가 일정했던 점들은 그 일정함을 잃어버린다. 한 점에서 점들까지의 거리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원은 처음부터 울퉁불퉁한 모양일 뿐이다. 우리가 간극을 아무리 줄여도 제거되지 않는 것은 닿아 보이는 대상 사이에도 간극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원의 예를 통해서 보았지만 물질적인 공간에서, 주체와 객체 간의 거리를 우리가 조절할 수 있더라도 그것을 결코 제거할 수는 없다.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서더라도 물질적 거리는 존재한다. 만약 물질적인 거리를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계몽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오만일 뿐이다.

  우리가 제거할 수 있는 건 오직 시간이다. 우리는 비물질적인 시간을 조절할 수는 없지만 제거할 수는 있다. 시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시간을 허락한다. 칸트의 말을 차용하면, 시간이 없는 공간은 공허하고 공간이 없는 시간은 맹목적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살고 공간을 점유하는 우리는 공간을 제거할 수 없지만 시간을 제거할 수는 있다. 바로 시간을 살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이는 죽음이야 말로 과장된 방법이라고 할 것이다. 죽은 내가 너를 볼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볼 수 있다한들 죽는다면 너를 본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죽음을 통해서 시간을 제거하더라도 공간은 남는 것이 아닐까. 시간을 살지 않는 내가 사라진 것이지, 그 시간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육체가 죽으면 정신은 소멸하지 않느냐, 정신이 소멸된 육체는 빈껍데기가 아니냐는 해묵은 이야기는 그만두자. 모든 것은 전도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득해져 버린 시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간을 살지 않기 때문에 주체는 죽었지만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주체가 죽었기 때문에 우리 사이의 간극이 사라져 내가 너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간절함, 그 진실함에서 비롯된다. 물론 명상을 통해 눈을 감는 식의 물아일체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존재하고 시간만 제거한 상태, 공간 속에서 너와 나의 거리가 제거되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죽음의 순간을 뜻한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못한 아내가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기를 죽이고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사는 것도 역시 아니다. 그런 인식론적인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객체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주체의 죽음은 허공을 살아 숨 쉬는 육체의 숨결로 메운다. 너와 나의 죽음, 그것은 우리의 사랑이다. 남녀가 하나가 되는 찰나는 죽음과 다르지 않다. 죽어도 좋은 순간이자 죽는 순간이다. 그 순간은 내가 너를 제대로 볼 수 있고 네가 나를 온전하게 볼 수 있다. 남녀는 죽음을 통해서 시간을 제거한다. 시간이 제거되면 둘 사이의 거리 역시 일소된다. 사랑은 죽음의 단순한 동어반복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객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진실함이자 간절함이며, 시원에 대한 기억이자 그리움이다.

  시원을 망각한 남녀는 서로에게 철저하게 낯선 존재이다. 낯섦은 대화로는 극복될 수 없다. 언어는 망망대해에서 물살을 가르는 항해자이자 광활한 대지에 깃발을 꽂는 선구자이다. 무언가를 느끼지만 그것을 명명할 수 없는 혼돈은 우리를 절망에 이르게 한다. 암흑과 침묵이다. 혼재된 감정의 수렁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언어이다. 그러나 비록 언어가 우리를 구원했다고 하나 그것이 서로를 연결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행하지만 나의 생각과 감정은 표현될 뿐 정확하게 번역되지 못한다. 우리들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가록 막고 있다. 결국 너는 나의 진실함을, 나는 너의 간절함을 낯설게 바라볼 뿐이다. 

  낯섦의 역사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무장해야 한다. 어느 날 낯선 너에게, 나는 아득한 시원을 느낀다. 기억하지 못하는 그 아득함은 너로 하여금 나를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 나는 심연을 건너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벌거벗은 채 다가선다. 벌거벗은 몸을 의탁하며, 서로의 등을 바라보며, 우리는 눈을 감는다. 혹여나 낯섦의 역사가 너를 스치게 되면 나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 나는 벌거벗은 채 죽음을 각오한다. 너 역시 죽음 앞에 벌거벗었다.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 그것은 정녕 죽어도 좋은 것이다. 죽어도 되는 것이다. 어떻게 죽음을 각오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죽음은 우리 인식과 존재 너머의 무엇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허위이다. 죽음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논의할 수 있고 논의해야 하는 죽음은 삶과 연결된 지점에서의 죽음이다. 죽고 난 뒤의 죽음을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다. 우리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죽음은 살아 있을 때의 죽음이다. 즉 죽음을 각오하는 순간, 진심으로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낯선 이 앞에서 벌거벗는 것, 그것은 이미 죽은 것과 다르지 않다.

  죽음을 각오하는 순간, 나는 너를 막힘없이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그 순간은 내가 죽는 순간-죽어가는 시간이 아니라 죽음은 찰나로서 아주 짧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육체는 살아 있고 정신은 죽는 순간, 그 시간에 나는 너와의 거리를 삽시간에 제거할 수 있다. 유물론자는 초가 여전한데 어떻게 촛불이 소멸하냐고 할 것이다. 관념론자는 촛불이 꺼졌는데 초가 무슨 소용이냐고 할 것이다. 우린 관념론자도 유물론자도 아니다. 그런 것 애당초 자의적이다. 필요 없다. 우리는 인간일 뿐이다. 내가 너를 보는 데에 그따위는 필요 없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제서야 네가 보인다. 우리 사이에는 그 어떠한 막힘도 없다.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다. 우리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곧 눈을 뜬다. 우리는 허공에 산산이 내던져진다. 영원할 것 같았던 죽음은 삶으로 잊힌 채 낯선 이로 마주한다. 모든 것은 아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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