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日
자동차 히터에 속이 답답해져 창문을 연다. 훅 불어 들어오는 바람, 아, 겨울 냄새가 난다. 몇 년 동안 이 냄새에 설렌 적이 없는데, 올해는 조금 다른 감정이다.
원래 11월은 엉덩이가 들썩이는 달이었다. 스키장이 보통 중순에 반짝 임시 개장을 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나의 20,30대 겨울은 스노보드를 빼고는 말할 게 달리 많지 않다. 11월, 오늘처럼 갑자기 불어오는 시린 바람에서 겨울 냄새가 나면, 나는 짐을 꾸렸다. 장비와 살림살이를 짊어지고 겨울의 집으로 향했다. 크루들이라고까지 말하기는 그렇지만, 매년 함께하는 친구들과 설원을 가르며 겨울을 났다. 이른 아침 하얗다 못해 푸른 슬로프를 보며 눈을 떠서, 늦은 밤 다시 붉은 조명이 켜진 슬로프를 보며 눈 감을 때까지 보드를 타고 또 탔다. 누구보다 잘 타고 싶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좋았다. 나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친구들 역시 그랬다. 내 청춘의 많은 시간이 빛나는 눈 위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지나갔다.
그러다 한 해 한 해 지나며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우리는 슬슬 흩어졌다. 나도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 하얀 눈 속에 청춘의 열정, 우정과 사랑을 오래도록 묻어버렸다. 더 이상 체감온도 영하 25도에서 스노보드를 탈 깡과 체력을 가질 수 없었다. 변화가 서러워서였는지 음식을 끊는 입덧마냥, 겨울 냄새가 그렇게 싫어져서 스노보드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장비들은 화석이 되어 먼지가 켜켜이 쌓여 갔다.
남편은 그 시간을 묵묵히 기다렸다. 우리는 스키장에서 처음 만났다. 자그마치 5년, 둘 사이에 제일 강한 공감대를 형성했던 취미생활이 사라지면서 적잖이 부침이 있었다. 그래도 남편은 나를 이해했고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겨울의 냄새를 다시 맡았다. 마치 벼락처럼 번쩍이며 마음의 전환이 일어났다.
작년에 남편이 나 몰래 사두었다가 들킨 유아용 스노보드 장비를 꺼냈다. 신혼 때 아이가 만 4살이 되는 해 겨울부터 스노보드를 가르치자고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아이가 어느새 그 나이가 되었다. 때가 돼서 마음의 준비가 된 건지, 내가 준비가 되니까 때가 온 건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부산스레 장비들을 확인하고 닦는다.
내 장비들도 계단 밑 창고에서 나왔다. 먼지 때문에 서걱해진 지퍼를 열자 눈 냄새가 난다. 슬로프 눈에서만 나는 특유의 냄새를 맡자 가슴이 뛴다. 다시 짐을 꾸릴 수 있을 것 같다. 바람 한줄기가 새로운 겨울을 데리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