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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Nov 26. 2021

일의 흐름



70






오크 마룻바닥을 밟으면 발바닥에 서걱서걱 먼지들이 묻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까치발을 세워 걷는다.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들 있다. 아이는 옷을 꼭 뱀이 허물 벗듯이 벗는다. 주글주글 겹쳐져 벗겨진 바지가 길에서 맥락없이 나타나는 개똥처럼 복도 한복판에 놓여있다. 개지 못한 빨래들이 소파를 점령하고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마음의 안정이 오는 시각적 자극이 없다. 또다시 엔트로피의 최대치를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청소를 위해 손 하나 까딱할 생각이 없다. 에너지를 그런 것에 쓸 여유가 없다. 예술가 지원 사업 공모 기획서 작성의 막바지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켜 화장실 가는 힘 조차 아끼는 중이었는 걸.



처음 해보는 일은 역시 쉽지가 않았다. 종일 신경이 이 기획서 10장에 집중되어 있었다. 혼자 짜내는 게 아니라 작가와의 협업이라 더 신경이 쓰였다. 한 줄을 써내려고 차를 한 컵씩 마실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다 쓰고 읽으면서는 변태처럼 실실 웃는다. 꽤 괜찮은데? 멋진데.라고 생각하면서. 제품 기획보다 순수 예술 기획에서 끈적한 자기애를 느낀다. 힘들지만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게다가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주변에 든든한 조력자들이 있다. 어릴 때는 한번 자기 오류에 빠지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오류 안에서 무한 루프로 돌게 되는데, 이때는 남의 얘기를 받아들일 정도로 성숙하지도 못해서 더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지금은 인정할 만큼 성숙한 조력자들이 곁에 있기에 일에 대해 조언을 얻는 일에 부담이 적어졌다. 그것들을 수집해서 적절하게 걸러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나도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기획의 일부를 공유하고 가감 없는 조언을 받았다. 마음에 걸렸던 부분들이 마침 지적되면 빠르게 수정해서 일의 진행이 빨라졌다. 이런 게 연륜인가 보다, 나도 많이 컸네. 하는 생각을 한다.



일주일을 넘게 달려서 오늘 저녁에야 일이 80%쯤 진행되었다. 비로소 ‘일상’이라는 전구에 불이 탁 들어온다. 밤낮으로 ‘일’ 전구로만 가던 전류가 조금씩 일상으로 넘어간다. 그제야 앞서 묘사한 집 상태가 하나하나 세세하게 눈에 들어온다. 주말마다 오시는 엄마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내 이것만 끝나면-! 하는 의지도 차오른다. 옛날에 한 웹툰 작가가 마감만 찍으면 다음날 화려한 화장을 하고 외출을 하는 자신을 그린 만화가 있었는데 십분 공감한다. 마감이 있는 일은 대게 그렇다. 불필요한 에너지를 모두 걷어내고 순수하게 몰입하는 시간이 연속되다가 마침내 긴 터널을 팡-뚫고 나갔을 때의 희열. 시간 제약이야 늘 아쉽지만 또 그게 있어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집에서 까치발을 하고 다녀야 할 날이 딱 이틀 남았다. 설득력이 있는지 검증하는 시간은 지나고 디테일을 챙기는 시간으로 쓰일 예정이다. 그동안 나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이도 집 안을 까치발로 다녀야 할 텐데 별 신경 안 쓰고 제 할 일들 잘해주는 두 남자에게 고맙다. 가열하게 일하다 보니 11월이 정말 다 가버렸다. 이것만 끝나 봐라,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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