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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Jan 13. 2018

관계의 죽음을 잘 마주하기 위하여

끝이 없는 관계는 과연 가능할까

너와 나, 그 사이의 미스터리


'사람 사이' 만큼 알 수 없으면서도 호기심이 이는 주제가 또 있을까. 서점에 즐비한 관계와 관련된 도서들.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느니, 까칠하게 살라느니 하며 저마다 모범답안을 자처하는 책들을 보고 있자니 관계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간다. 그도 그럴 것이, 관계 속에서 시작해 관계 안에서 죽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관계란 인생에 있어 실로 엄청난 부분인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 같으나 분명히 실재하고, 나에게 귀속되어 있는 것 같으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그러고 보면 '관계'는 저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관계에 귀속된 누군가들이 만들어내는 양분으로 생겨나고, 성장하고, 또 때로는 죽음을 맞기도 하는 것. 물론 우리가 어떤 양분을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 다양한 변모가 가능하겠지만, 때로는 의도치 않게 죽음을 맞이한다거나, 한 것이 없는데도 놀라운 성장을 맛본다거나 하는 걸 보면 필시 우리의 절대적인 영향력 밖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관계의 죽음


나이를 먹다 보니 이 관계의 일생을 지켜보는 일이 많아졌다. 관계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탄생기부터 제 수명을 다하는 죽음의 때까지. 굳이 연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관계의 탄생은 '썸'과 같이 설레고 짜릿한 법이지만, 그와 반대로 관계의 죽음을 보는 것은 적잖이 쓸쓸한 일이다. 그것이 어떠한 관계든, 또 어떠한 상황이든 슬프지 않은 죽음이란 없다. 심지어 관계의 끝이 뻔히 보이는 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때의 허망함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관계가 끝난다는 사실에 고개를 처박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던 날.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 구차하게 매달렸던 날. 이 죽음의 탓을 한없이 나에게 돌리던 날. 이 끝의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하며 관계의 역사를 끊임없이 들추던 날. 내가 변하기만 하면 이 관계의 생명이 조금 더 연장될까 싶어 나를 학대하던 날.... 수많은 죽음의 날을 지나며 나는 얼마나 자랐을까. 여전히 관계의 죽음이란 슬프고 두려운 것이지만, 어떤 끝은 나의 역량밖에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 죽음의 원인이 내 탓도, 네 탓도 아닐 수 있다는 것. 그 사실만 인정하더라도 죽음의 망연함 앞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마음의 리트머스지


관계의 죽음을 조금 더 수월하게 마주하기 위한 또 하나 나만의 방법은 관계의 상태를 감지하는 리트머스 지를 마련하는 것.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신뢰'가 그 기준이다. 상대의 말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면, 나 또한 솔직한 내면을 보이기가 어렵다면, 이 관계의 운명을 어느 정도 점쳐볼 수 있다. 거짓말과 가식이 관계 사이에 쌓이고 쌓여 서로의 진실에 가 닿을 수 없는 상태일 때는 호흡기를 달아봤자 생명을 연명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관계의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면 나의 마음을 보호할 시간을 마련하고 관계의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애도한다. 나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한 완충 기간이다.

하지만 리트머스 지를 사용하는 일엔 꽤 치명적인 부작용이 따른다. 두려움으로 섣부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해야 할 노력을 하지 않은 채 관계가 끝나버릴 가능성이 있다. 거짓과 불신으로 관계가 병들었다면, 솔직하게 서로의 잘못을 마주하고 그 관계를 소생시키는 노력을 해야 마땅하지만, 어떤 경우엔 '어차피 끝난 관계야.' 하며 손을 놓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땐 나 또한 가식으로 응대하며 관계의 끝을 기다린다. 표면은 '나이스'하지만 속은 텅텅 비어버린 사이. 나는 관계가 이렇게 죽어버릴 때 여운이 가장 오래 남는다. 서로를 위해 애썼던 시간의 부재는 언제나 후회로 남는 법이다. 하지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나의 비겁함이 그 노력을 자꾸 막는다.



안전한 관계


불로불사를 꿈꾸었던 진시황처럼, 나도 여전히 관계의 불로불사를 꿈꾼다. 변하지 않을, 단단한 반석과 같은 관계란 얼마나 절실한가. 아무리 많은 방패와 무기들을 마련하더라도, 관계의 죽음은 언제나 적지 않은 상흔을 남기기 때문이리라. 다행히 예전만큼 허무맹랑하지는 않다. 관계에 대한 욕심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손에 쥐곤 했다. 양 손 가득 버겁도록 쥐고 있었던 관계들을 이제는 슬그머니 놓는다. 그리고, 그 후에 여전히 내 손에 남아 있는 것들을 더 잘 가꾸어 가야지, 하고 다짐하는 것이다. 더 정직하게, 더 다정하게, 더 단단한 신뢰로... 그렇게 좋은 양분들을 듬뿍 주어야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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