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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Jun 03. 2018

토트네스에서 깨달은 아침의 맛

낯선 여행지에서 함께 맞는 아침의 소중함을 느끼다


우리에게

아침은 없었다


<아침형 인간>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성공한다.'는 류의 진부한 내용을 담은 『아침형 인간』이라는 책이 유행을 했고, 이후로 꽤 오랫동안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가 이어졌다. 안 그래도 시간을 아껴 써야 한다는 강한 믿음을 가진 엄마와 선생님들의 잔소리에는 날개가 달렸다. 늦게 일어나는 날이면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지!'라는 식의 꾸지람을 피할 수 없었다. 태생적으로 일찍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나에게 '아침형 인간'이 되라는 말은 정말 고통이었다. 노력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를 '아침형 인간'으로 만들려는 엄마의 노력은 정말 대단했다.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쓰며 일찍 일어나기를 종용했지만, 엄마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나는 나대로 죽을 맛이었다. 차라리 공부를 열심히 하라, 착한 아이가 되어라, 등의 잔소리를 듣는 게 더 나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의 시간 동안 '지각쟁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지각 비니, 체벌이니 하는 갖은 핍박들을 받아가며 얻어낸 훈장이었다.


나와 비슷하게 아침잠이 많은 영원과 결혼한 것은 그야말로 다행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는 잔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됐으니까. 하지만 '일찍 일어나야 성공한다'는 사회의 공식은 여전했고, 세상의 시계는 늘 우리보다 빨랐다. 아침마다 출근 전쟁을 벌여야 했던 우리에게 아침 식탁은 너무나 먼 곳이었다. 신혼 아침에 대한 주입된 환상이 우리에게도 유효해서, 결혼 후 몇 달은 함께 아침을 먹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 침대 속에서 달려 나가는 영원의 뒤통수에 대고 인사를 해야 했다.


진Jean의 거실. 아침 햇살을 가득받은 고가구와 식물이 아름답다.



토트네스에서

아침을


여행에서도 우리의 느긋한 생활 패턴은 고고하리만치 지켜졌다. 한국에서의 생활과 다른 점이 있다면, 출근이 없으므로 우리 둘 중 누구도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 덕분에 눈을 뜬 직후부터 집 밖으로 나서기 전까지의 시간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었다. 정해진 기상 시간은 없었다. 아침 9시에서 10시 사이, 눈이 슬며시 떠질 때쯤이 하루의 시작이 되었다. 여유롭게 일어나 아침을 먹다 보면 금세 점심시간이 되기도 했다.


눈을 뜨자마자 창 밖으로 보이던 토트네스의 아침 풍경.


아름다운 마을, 토트네스에서 맞았던 첫 번째 아침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머리맡의 넓은 창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통에 눈을 떴다. 전날 밤 정신없이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커튼 치는 걸 깜빡한 탓이었다. 햇빛이 깨우는 아침이라니! 시작부터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침 9시, 부지런한 여행가라면 벌써 일어나 동네 한 바퀴를 해야 마땅할 시간이지만 우리에겐 충분히 이른 시간. 부엌으로 내려가니 호스트 진 Jean이 성대한 아침 식사를 차려놓았다. 간단한 아침을 셀프로 차려먹도록 했던 런던의 집과는 또 다른 느낌. 직접 만들었다는 바나나 브래드와 입맛에 맞게 먹으라며 준비해준 각종 빵이며 시리얼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진Jean이 준비해 준 풍성한 아침 식탁.



입맛 돋우는 차림새에 식탐 없는 영원마저도 이성의 끈을 놓았다. 빵을 있는 종류대로 먹어보더니 입에 맞는 걸로 두 번 더 먹었다. 발라먹는 버터는 또 왜 그리 맛이 좋은지. 바나나 브래드에는 버터를 꼭 발라 먹어보라는 진Jean의 조언대로 버터를 듬뿍 떠서 바나나 브래드를 흡입하고야 말았다. 바나나가 거뭇거뭇해질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바나나 브래드를 만든다는데, 바나나가 얼른 익어서 그 어쩔 수 없는 베이킹이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진Jean은 만드는 법이 쉽다며 친절하게도 레시피를 알려주었지만 한국에서 그 맛을 재연할 수 없었다.)


그래놀라 시리얼도 남김없이 싹싹


풍성한 것은 식사만이 아니었다. 마주 앉은 식탁은 그 자체로 훌륭한 대화의 장이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가장 친한 친구와 나누는 대화가 얼마나 맛있던지. 아침 식사는커녕, 서로의 얼굴도 마주하지 못한 채로 서둘러 집을 나서던 지난날들이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한 조각의 빵과 한 마디의 대화가 우리의 삶을 이다지도 기름지게 할 줄 알았다면 조금은 더 일찍 일어나려 노력했을까.



진Jean의 주방. 이 넓고 아름다운 주방 덕택에 지내는동안 많은 요리를 해먹을 수 있었다.


아침이 아름다운 진Jean의 집에서 토트네스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적잖은 행운이었다. 여유를 만끽한 아침 시간 동안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묘한 긴장과 토트네스에서 어느 정도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풀어졌다. 아침의 시간이 베풀어준 풍성함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지리도 모르는 낯선 길을 나서기 전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같이 꼭 아침을 먹자는 다짐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아침의 시간이 두려운 나에게는 엄청난 결심이었다. 아마도 아침의 은혜를 맛 본 후 터져 나온 간증이었으리라. 함께 마주 앉은 아침의 시간이 참 좋더라며, 하루를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도 조금은 더 행복할 것 같다며. 우리에게 맞는 아침의 시간을 찾아보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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