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트네스 다팅턴의 오후
토트네스 외곽 동네,
다팅턴
점심을 먹고 느지막이 길을 나섰다. 토트네스의 외곽, 다팅턴 Dartington 에 가기 위해서였다. 걸어서 2-30분, 시내버스로 10분 남짓 걸리는 꽤나 먼 길. 굳이 가야 할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만났던 사람마다 '다팅턴은 강력 추천'이라던 쌍 따봉이 우리의 등을 겨우겨우 밀었다.
파-란 하늘로 꽉 찬 가을의 오후. 날이 좋아 다팅턴까지 걷기로 했다. 토트네스 시내를 벗어나 넓은 도로를 쭉 따라가면 다팅턴이란다. 차가 쌩쌩 다니는 도로로 걸어가기엔 너무 위험한 것 같아 차도 옆 골목으로 쑥 들어가니 푸른 농장이 가득 펼쳐진다. 도로 옆에 이런 길이 있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 덕분에 다팅턴으로 가는 내내 목가적인 풍경을 만끽했다. 푸른 풀밭 어귀에서 풀을 뜯는 양을 보는 일은 몇 번이고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적당히 이국적이면서도 무척이나 평온해지는 장면. 그 순간의 감정을 다 담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파란 하늘 파란 하늘 꿈이 드리운 푸른 언덕에 아기 염소 여럿이 풀을 뜯고 놀아요'하는 노래가 절로 나오는 풍경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다팅턴이다. 조금 더 왁자지껄하고 도회스런(?) 느낌이 나는 토트네스와는 달리, 고요한 주택가와 넓게 펼쳐진 밭과 초원이 인상적인 곳. 가만히 있어도 힐링되는 풍경을 마주하니 토트네스 주민들이 추천한 이유를 알겠다.
달달한
오후
오래 걸으니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왔다. 토트네스 지역 가게 소개 지도가 빛을 발할 때. 다팅턴의 몇 가게도 소개되어 있는 덕에 어렵지 않게 괜찮은 카페를 찾았다. 바로 <The Cafe Venus>. 친환경 지역 생산물을 사용하는 카페란다. 토트네스 어디에서나 친환경 지역 가게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오후의 따듯한 햇볕을 쬐고 싶어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바로 옆 테이블에는 지긋한 나이의 노숙녀 두 분이 즐거운 티타임이 한창이다. 각자 데리고 온 반려견들과 함께 앉아 여유로이 티타임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부러워서 우리도 티와 스콘 세트를 주문했다.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에게 어울리는 1인용 세트로.
따뜻하게 데워진 홈메이드 스콘과 적당히 달콤한 딸기잼의 조화는 언제나 옳다. 거기에 화룡점정, 부드러운 버터크림까지 합세하니 이보다 달달한 오후가 또 어디 있을까. 입가심으로는 적당히 떨떠름하면서도 향기 가득한 차 한 모금이 딱이다. 1인용 티팟이라는데 티팟은 왜 그리 큰지, 거기에 리필용 물은 또 왜 그리 많이 주는지! 밀크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해 별도로 내어준 우유도 한 컵이 넉넉하도록 나왔다. 각자 취향껏 차로, 우유로, 밀크티로 메뉴를 바꿔가며 실컷 즐기고 나니 영국의 에프터눈 티타임에 대한 찬양이 절로 났다. 둘이서 넉넉히 마시고도 남을 정도의 후한 차(茶) 인심에 왠지 돈 번 것 마냥 기분이 좋았다.
초록이 아름다운
마을
다팅턴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 토트네스의 사상적 토대가 되는 슈마허 컬리지 Schumacher College가 다팅턴에 위치해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 유명한 E. F. 슈마허의 정신을 따라 세워진 대학이다. 토트네스의 정신을 가르치는 학교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약속도 없이 슬쩍 안으로 들어가 봤다. 나무가 우거진 캠퍼스 곳곳에 자리 잡아 삼삼오오 토론하며 공부하는 모습에 감격하며 카메라로 담으려는 차에 관계자에게 딱 걸렸다. 공부하는 곳이라 외부 방문객의 출입을 제한하니 나가 달라는 정중한 부탁. 관광객 친화적인 한국의 대학에 익숙해진 터라 잠깐 어안이 벙벙했지만, 학생들에게는 좋은 문화인 것 같다며 발걸음을 쉬이 돌렸다.
이후 이어진 끝없는 산책. 주인을 알 수 없는 넓은 초원에 털썩 앉아 사진을 찍기도 하고, 가만히 풀을 뜯는 송아지들을 하염없이 보기도 하며 발걸음 닿는 대로 다니다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한 모양새다. 끝없는 초록과 만나는 시간.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초록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멈추질 않았다. 자연만큼 늘 새로운 게 또 있을까. 그것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제멋대로 생긴 풀이며 나무들을 보는 일은 도통 질리지 않는 법이다. '자연(自然)'을 자연답게 만들고 싶다면 그저 내버려 두면 된다는 명징한 진실. 때로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하려 든다.
다팅턴에 무엇이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다팅턴 홀 Dartington hall까지 왔다. 알 수 없는 묘비들이 서 있는 고요한 공간을 지나 오래된 중세시대의 성을 구경했다. 지금은 말끔한 모습의 공간이지만 아주 옛날에는 가축들이 살던 폐허였단다. 몰락한 귀족이 사람이 살 자리를 가축들에게 내어주면서 성이 점점 망가졌다고 했다. 한때의 흑역사는 온데간데없고, 깨끗하게 단장한 다팅턴 홀은 아주 훌륭했다. 성 한쪽에는 훌륭한 레스토랑이 맛있는 냄새를 풍겼고 또 다른 홀에서는 음악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숙박시설로도 사용하고 있다는데, 고성에서 묵는 밤은 어떨까. 다음에 온다면 초록이 가득한 마을의 성에서 하룻밤 묵고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