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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Mar 25. 2024

자존감을 판 대가, 직무유기

나를 너를 지킬 무기, 책임한계선

국밥 한 그릇 다 먹고 맛없으니
돈 못 주겠다는 거랑 뭐가 달라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3월의 어느 날, 봄비로 열기를 식히며 유선보고를 하던 내게 상사가 말했다.


사건의 발단은 모델 보도사진 촬영이었다. 새로운 제품 론칭을 앞두고 럭셔리 라인의 제품과 보도사진을 찍는 건이었다. 근처에서 세일즈 PT를 마치고 헐레벌떡 온 나에게 노트북 가방을 풀기도 전에 고객사 호출이 이어졌다.


"차장님, 고객사 담당자분이 빨리 와달라고 하셔서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를 청하는 우리 팀 과장님의 모습에서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구나 싶었지만 일단 현장으로 뛰어갔다.


보도촬영과 함께 영상도 찍는 와중에 현장은 정신이 없었다. 마침내 고객사 담당자들을 찾아 인사를 하던 찰나, 귀를 의심하는 멘트가 귀에 꽂혔다.


이런 퀄리티면 비용 지급 못 해 드려요


현장의 모델 복장이 제품 라인업에 비해 스파 브랜드인 것이 못마땅하고, 이런 준비는 브랜드에 대한 이해가 너무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그 근거였다.


응?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모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치고 있는 것 중 고객사의 컨펌을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모델 복장이 문제라니 무슨 뜻인 건가 싶었다.


항변하려던 차에 고객사는 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그녀의 불안한 눈동자의 끝은 담당임원에게 향해 있었다. 그제야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이 됐다. 임원에게 보고를 안 한 건지, 임원의 마음이 바뀐 건지. 어찌 됐건 임원의 심기가 불편했나 보다. 절대적인 임원의 한 마디를 들은 그녀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한낱 대행사의 상투 잡기가 다인 상황이었나 보다.


사실 그런 건 상관없다. 고객사가 분풀이하는 것쯤이야 셀 수 없이 당했다. 그때의 감정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내어달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제 풀에 지칠 때까지 드러나주자. 


다만, 돈을 안 준다는 건 다른 이야기다. 금일 보도촬영에는 포토 실장님, 스타일리스트, 모델이 투입됐다. 즉, 결과물에 상관없이 실비가 발생한다는 것. 그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일이다. 그건 너와 내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이다. 


한껏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머릿속으로 실비를 합산하는데 고객사 과장이 기어코 선을 넘었다.


촬영 연기돼서 생기는 피해는 어떻게 하실 거죠?


이쯤 되니 대꾸할 의지도 안 생길뿐더러, 답변을 원하는 질문인지도 헛갈린다. 일단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부 논의 해보겠습니다.' 하고는 스태프들에게 철수를 요청했다. '드라마에서는 이런 타이밍에 담배를 피우던데...' 하며 스태프들의 흡연장소인 옥상으로 향했다.


담배는 없으니 촉촉한 봄비로 열을 식힌다. 방금 세일즈 현장에서 헤어진 상사에게 차마 눌리지 않는 버튼을 눌러, 무거운 입을 뗐다. 상사는 역시 기막혀했다. 나의 상사는 모두가 인정하는 YES 맨이다. 고객사가 시어머니고, 팀원이 아내라면 고부간의 갈등에서 기어코 시어머니의 입장을 200프로 진정성을 가지고 공감하는 남편이었다. 그건 눈치의 영역이 아니었다.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프로페셔널리티가 철저하게 내재화된 지독한 프로의 단전(丹田)에서 올라온 진심이었다.


그런 그조차 고객사의 반응은 납득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국밥드립을 시전 했을까. 이 와중에 그의 통찰에 놀라워하는 스스로가 우스운 한편, 사태를 어찌 수습해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에는 역부족인 보고를 마치고는 하늘을 올려 봤다.


10초 정도 멍 때렸을 까, 고객사 단톡창에서 못다 푼 분을 풀어내는 메시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 저희랑 하루이틀 일 하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백화점 브랜드,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 브랜드까지 다양하게 준비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이런 식으로 준비할 거 알았으면 000이랑 일 안 했죠'

- 내일 또는 모레 다시 촬영할 수 있게 일정 어레인지 해주시고 의상 다시 제안 주세요.


고객사 단톡창에 올라온 질문과 요청에 마음의 소리가 들끓기 시작했다.

 저희랑 하루이틀 일 하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백화점 브랜드,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 브랜드까지 다양하게 준비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주어진 예산 내에서는 요청을 하셨어도 어려웠을 겁니다.

- '이런 식으로 준비할 거 알았으면 000이랑 일 안 했죠'
-> 이하동문입니다.

- 내일 또는 모레 다시 촬영할 수 있게 일정 어레인지 해주시고 의상 다시 제안 주세요.
-> 그쪽이 의상과 견적 컨펌을 명확히 준다면 해보죠.


터져 나오는 마음의 소리를 꾹 누른 후,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발견한 건 어느새 내 안에서 귀책사유를 찾아내려고 업무를 복기하는 내 모습이었다.


 감정과 자존감은 나의 것이고
성과와 돈은 회사의 것


결국 스스로에게 답하지 못한 채로 인간 아바타가 되어 꼬박 하루동안 백화점과 이태원 디자이너 샵, 청담동 명품샵으로 발품을 들인 결과 의상컨펌을 받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사진촬영을 마쳤다. 즉, 일을 끝마쳤다. 하지만, 약속된 돈은 받지 못했다.


고객사에게 설명도, 증빙도, 읍소도 해보았지만 소용없없다. 8년 넘게 일하며 처음 겪는 경험에 정산서를 작성하며 집중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왜 돈을 받지 못한 걸까? 돈만 받지 못한 걸까.


일을 하다 보면 내 자존감을 내어준 대가로 돈을 또는 성과를 얻 한다. 내 자존감을 팔다니, 서글픈 일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무뎌지는 것일지. 크게 개의치 않는다. 감정과 자존감은 나의 것이고 성과와 돈은 회사의 것이다. 나의 것을 내어주고 회사의 것을 챙기라고 월급을 받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라 나를 다잡았다. 나를, 팀원들을 다잡느라 그랬던 걸까.


그때는 몰랐다. 여력이 없었던 거겠지. 부당한 일에 항변할 수 없는 상황이 나에게 얼마만큼의 무력감을 주었는지, 그것이 어 너비의 파장을 일으켰는지.  


똥 밟았다 하고 넘길 수도 있었던 그날의 경험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오랜 시간 생채기로 그때의 공기, 소리, 냄새, 시선들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팀장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 부당하지만 주먹 꾹 쥐고 아무 소리 하지 못하는 굴욕감. 나는 물론이거니와 상사조차도 결국 결과를 바꿀 수 없는 패배감.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온 흔치 않은 사건이어서였을까.


그래도 한 가지 배운 것은, 책임 한계선을 정해야 한 다는 거다. 업무상 과실 책임이던 나의 멘털 관리 차원이던. 책임소재를 규정한다는 건 없어 보이는 일이긴 하다. 책임을 규정해야 하는 시점은 일이 잘 안 풀렸을 때고, 이는 누군가는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고 누군가는 책임을 지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니까.


그때 나는 내 책임의 한계선을 정했어야 했다.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는 없다. 책임은 책임감 같은 숭고한 마음에서 오는 것이 아닌 주어진 업무의 분장과 역할에서 오는 영역의 범주다. 해서,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업무의 영역을 살펴보고 그 한계를 규정했어야 했다. 그로 인한 책임을 분명히 했어야 했다. 그게 나를 그리고 우리를 지키는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 일련의 과정이 그냥 없어 보이는 일 같았다.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면 어찌 됐든 우리 책임이라고 생각했고 그에 대한 협의를 하는 것이 생산적인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회피였다. 자질구레한 책임규명 과정에서 오갈 날 선 언쟁과 시선들, 재계약에 대한 압박, 그리고 끝내 책임선을 지켜내야 한다는 부담. 그 모든 걸 결국 저버린 거다.


그래, 봄비 내리던 그날의 불쾌감이 이토록 래도록 기억에 은 건 내 비겁함 때문이었다. 뒤늦은 인정이다. 지난할 잘잘못 규명을, 그 과정 속에서 어쩌면 지킬 수 있었을 나, 팀원, 후배들의 자존감을 나는 외면했다. 직무 유기다. 나는 나를, 그들은 나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금요일 봄비가 그쳤다. 봄날씨로 옷차림이 가벼워지면서 괜스레 마음도 풀린다. 갑자기 찾아온 봄날씨처럼, 그때의 나를 가볍게 놓아줄 날도 언젠가 오기를 기다려야지. 아니, 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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