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겨울, 눈 내리는 강남대로에서 얻은 것.
날씨가 추워졌다. 일주일 사이에 10도를 넘나드는 기온 변화 때문에 더 춥게 느껴질 뿐. 사실 올해를 2주도 채 안 남긴 시점이니, 추운 날씨가 정상일 터다. 의연한 척하며 패딩 주머니에 손을 쓰윽 넣으면 10여 년 전의 이즈음이 생각난다.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강남대로에서 등과 배에 핫팩을 붙인 채 웃음을 머금고 서있던 스물여섯의 나.
나는 교육회사의 신입 공채로 일을 시작했다. 마케터라는 직무가 무색하게도 영역의 한계 없는 일을 체험할 수 있었는데. 네이버 커뮤니티 광고글 삭제등의 관리 라든가, 강남 한복판에서 공무원들의 단속을 피해 새벽에 간판을 다는 일이라던가, 미스터리 쇼퍼처럼 몰래 학생처럼 강의를 듣고 강의평가를 제출하는 식의 일들이었다. 이 모든 것이 물건과 서비스를 판매하는 마케터라는 직무와 연관성이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스걸인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일을 했었더랬다. 비단 지금과는 다른 10여 년 전의 직무환경 때문이라기보다는 별다른 문제의식 없는 내가 더 문제였으리라.
그중 단연 압권인 기억은 이맘때 신입으로 참여했던 학당지원이다. 학당지원은 어학원의 강의실 그리고 본관 별관 따위의 위치를 안내하는 일로 개강초에 한시적으로 진행된다. 특히, 연초와 개강시즌은 초행길인 수강생들의 원활한 시설 이용을 위해서 많은 인력이 배치되곤 하는데, 신입인 나 또한 아니나 다를까 함께했다.
나를 포함한 50명의 신입이 시간대별로 강남역 곳곳에 배치됐다. 어학원이 강남역 근처에 있다 보니, 어깨띠를 두르고는 교재구입처, 스터디장소, 강의실 등 수강생들의 애로사항을 즉답해주며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교대를 하며, 어느덧 어두워진 강남의 밤거리에서 어깨띠를 두르며 있을 때, 동기가 나를 부르며 말했다.
"르넷, 요령껏 해요."
하루동안 제일 많이 들은 날이었다. 코가 벌게져서는 정해진 시간 내내 서있는 내가 안쓰럽다고 본 것이겠지. 아니면 미련하다고 봤을지도. 누군가 감시하고 있는 것도, 평가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나 자신과의 싸움처럼 그 일을 잘 해내고 싶었다. 이 추위를 이겨내고 주어진 시간을 다 해내야만 우수 사원으로서의 떡잎을 길러내는 것처럼 여겨졌달까.
겨울이었다. 계절도 내 커리어도. 내가 무슨 일을 잘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일단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데 급급해 나를 연료로 쓰던 시간들. 소모되는 스스로를 방치하고 성장하지 않는 나 돌보지 않았던 그때. 한때는 그 시간들이 그냥 버려지는 시간들이라 느껴졌다. 시간낭비 했다고.
그런데, 그 시간 또한 거름이 될 때가 있더라. 직장생활의 추위가 들이닥쳤을 때, 결국 그 추위를 버티게 하는 건 더 추운 시절을 이겨냈던 기억이었다. 도망치지 않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 견딜 수 있는 건, 그 또한 지나간다는 것을 몸소 깨달은 경험뿐이었다.
추위를 견뎌내는 것이 결국 더 큰 추위를 이겨냈던 기억이라는 것. 마음이 복잡하다. 이 와중에 눈까지 내리기 싱숭생숭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내리는 눈으로 추위 속 잠시 웃음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