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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콘 Sep 08. 2023

[차대왕] 대제 (1/2)

 새벽부터 장내엔 활기가 가득했다. 색색의 꼬까옷들을 입은 아이들이 고운 옷에 흙먼지가 뒤범벅이 되도록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녔고, 거리의 상인들도 평소보다 더 활기 찬 목소리로 장사를 했다.



아낙네들은 그동안 열심히 모아둔 쌈짓돈으로 고기를 샀고, 남자들은 대낮부터 주막에서 술을 마시며 태평성대를 노래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대제는 고구려 백성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축제였다.



대제는 연희제, 문시제, 무투제로 구성된데 문시제와 무투제에는 모든 국민이 참가하고 입상할 수 있었다. 출중한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우승자는 당연 신분상승의 영광을 누리기도 했는데, 무투제의 우승자 한백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시다.



그는 쉽지 않은 대진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장군들과 호각을 다투며 끝내 우승을 차지했고, 이를 높게 산 국왕이 그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수성의 곁에 둔 것이다.



한백은 그렇게 세간에 등장할 때부터 국민들의 영웅이었고, 이번 북방원정 이후에는 모든 사내아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자가 무투제의 판세를 뒤집을까 모두가 들떠 기대 중이었다. 




“어머. 어쩜 저리 고울까.”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장내에 활기가 한창이던 중 아낙네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궁 근처로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대제의 첫 막, 연희제가 시작된 것이다.



연희제는 궁녀가 궁에서 출발해서 장내를 돌며 가두행진을 한 후, 다시 궁으로 들어와 국왕을 포함한 모두 앞에서 가장 화려한 춤사위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그 차례를 끝냈다. 악사들이 기악을 시작하려 하고 곱게 차려입은 궁녀가 부채를 준비하며 대열을 서자 병사들이 나와 장내를 통제하며 길을 넓혔다.




가두행진을 진행할 길이 확보가 된 후 한 병사가 궁 입구에서 대기하던 악사에게 다가 갔다.



마침내 푸른 옷을 입고 큰 쌍나팔을 든 악사가 시작을 알리는 소리를 내자 세 병사를 앞세운 기악대가 출발했다. 북과 나팔 그리고 꽹과리를 입은 악사들이 그간 준비해온 악장을 화려하게 연주하며 나아가기 시작하자 더 많은 사람이 가두행진을 보기 위해 모여 들었다.



웅장하고 밝은 소리로 첫 악장이 고조에 다다를 때쯤엔 어느덧 수도의 모든 이가 나와 가두행진을 구경했다. 서른명 남짓한 악사들이 궁에서 다 빠져나오자 모두가 탄성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궁녀가 연분홍빛 옷을 입고 양손에 부채를 든 채 춤을 추며 걸어 나온 것이다. 능숙하고 아름다운 춤선으로 돌며 치맛자락을 날릴 때마다 뭇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연꽃을 연상시키는 부채춤들은 사내들에게 선녀를 떠올리게 했고, 사뿐히 길을 밟아나가며 미소 짓는 궁녀들의 미소까지 더해져 그들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악사들은 한참을 걸어 나가며 연주하는가 싶더니 제자리에 섰고 첫 악장의 대막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춰 궁녀들은 능숙하게 둥글게 대형을 만들었고 원 안에 들어간 이들과 원을 만든 이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궁녀들은 단아한 표정으로 부채를 간드러지게 흔들었다.




곧 궁녀가 만들어 낸 큰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났고 잠시 후 가장 앞에 위치한 악사가 다시 다른 악조로 나팔을 불자 행진은 재개되었다. 이번엔 궁에서 큰 용이 머리를 드러냈다.



용의 형상을 한 탈을 쓴 탈춤꾼들이 탈을 흥이 넘치게 흔들며 그녀들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어린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너댓명의 꾼들이 용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탈을 쓰고 고개를 흔들자, 아이들은 겁이 나 울기도 했고, 경이로운 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과자들을 떨어트리기도 했다.



그 뒤를 이어 국왕의 상징인 봉황 인형을 든 자들이 나타났고, 이어서 적호의 모습을 한 탈도 나왔다. 가장 마지막 순서로 다시금 또 다른 궁녀가 앞선 이들과 달리 푸른빛깔의 옷을 입고 춤사위를 뽐냈다. 어느덧 장내의 사람들은 서로 춤을 추기도하고 가두행진에 환호하기도 하며 대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제는 고구려의 모든 백성들이 즐기는 축제였다. 주모들은 술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고, 백정들도 장사보다는 함께 먹고 즐기며 축제 분위기에 한몫을 더했다. 장내를 크게 한 바퀴 돌며 어느덧 궁을 향해 돌아갈 때 즈음엔 한 명도 빠짐없이 대제를 즐기고 있었다. 이제 가두행진이 궁으로 들어가게 되면 많은 이들이 궁에서 마련한 궁 밖의 전망대로 올라갈 것이고,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이들은 높은 집 지붕으로 올라가 궁 안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이는 바로 국왕 앞에서 이뤄질 연희제의 대미를 보기 위함이었다. 가두행진을 하던 이들 모두 이미 온몸이 땀범벅이었으나, 가장 중요한순간을 위해 궁 안으로 가두행진을 이어갔다.




 마지막 푸른빛깔의 궁녀가 궁을 향하자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 전망대로 올라갔다.




궁 주변에 임시로 마련된 전망대는 연희제를 포함한 모든 대제를 사람들과 함께 즐기고자 국왕의 지시로 마련된 자리였는데, 정해진 인원수만 들어갈 수 있었기에 전망대 아래에선 늘 병사들이 사람들을 통제했다.



궁 안에 들어서자 국왕을 포함한 모든 무관, 문관들이 자리해 있었다. 국왕은 황금으로 자수가 박혀 있는 도포를 몸에 두르고 대제에만 쓰는 화려한 왕관을 쓴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왼편에는 앉아 있는 그의 어깨 높이까지 올라오는 대가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금으로 만들어지고 꾸며져 있는 그 대에는 국왕의 봉황이 앉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 봉황의 왼편에는 마찬가지로 예복을 입은 수성이 서 있었고, 국왕의 오른편에는 두 세자가 서 있었다.



국왕은 근엄하게 연희제의 대미를 감상하고 있었다. 궁의 중앙에는 악사들이 대형을 갖춰 양 갈래로 나뉘어 섰고, 그 안에서 용과 봉황, 적호의 탈이 춤을 추며 선회하였다. 연분홍빛 옷의 궁녀과 푸른 옷의 궁녀들은 이제 서로 섞여 하나의 큰 연꽃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연꽃의 한가운데에는 소야가 있었다. 막근은 소야를 멀리서 발견하고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단연코 소야는 모든 궁녀 중 으뜸이었고, 이미 전국에 소야의 이름은 알려져 있었다. 화려한 부채들 속에서 연분홍빛의 소야가 부채를 들고 제자리에서 팽이와 같이 돌자 전망대를 포함한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인형탈들과 몇몇 궁녀가 중앙에서 벗어났고 소야를 포함한 다섯 궁녀이 독무를 추기 시작하였다.



궁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들만이 이 독무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이는 모든 고구려 여성들에게 꿈이기도 했다. 한백은 소야의 독무가 한창이던 중 고개를 돌려 막근을 바라보았다.



막근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국왕 옆에서 한없이 기뻐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기세의 막근을 보며 한백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궁 한쪽 구석에서는 상오가 모든 일을 관찰하고 있었다. 하묵과 장희에게 이전 밤 전해 듣기로는 발해와 옥저군이 어느새 고구려의 코앞까지 진군했으며, 늦어도 내일 밤에는 무슨 일이라도 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그를 바로 내보내고 몇몇 장군들을 안으로 들이는 것을 보았는데, 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의 임무는 혹여나 발생할 대제의 소란을 최대한 빠르게 감지하여 미연에 방지하는 것. 그 일로 그는 궁에 까마귀들을 배치하고 잠복하듯 숨어있었다. 




 그는 소야의 독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실로 아름다웠다. 선조 모두가 함께 힘을 모아 어여쁜 인형을 만들어도 그녀의 미소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와중에 소야가 순간적으로 어딘가에 시선을 던지는 것을 알아채고 그 시선을 쫓아가 보자 막근이 실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 상오는 무기력해져서는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또 막근이었다. 




 모든 독무가 끝나고 궁녀가 궁 중앙에서 물러나자 악사가 모든 기악의 마무리를 알리는 나팔 소리를 불었다. 국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리고 외쳤다.




“고구려는 들으라!”




태조의 목소리는 어찌나 컸던지 궁을 벗어나 수도 전체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이 나라에 드디어 태평성대가 열렸도다! 이제 앞으로 고구려의 백성들은 배고파하지도, 목말라하지도 않을 것이다!”




전망대의 백성들은 그 자리에서 절을 하고 국왕의 진언을 듣고 있었다. 




“오늘 열릴 대제를 통해 짐이 직접 선언하노라!”




모든 이가 국왕을 바라보았다. 국왕이 봉황에게 손짓하자 봉황은 그의 머리 위에서 날갯짓을 하며 떴다.




“이제 고구려의 태평성대가 열릴 것이다!”




수도의 모든 이가 국왕의 외침에 함성을 질렀다. 국왕은 한 손가락으로 땅을 가르켰다가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이에 맞춰 봉황이 궁 중앙을 향해 하강하다가 그대로 하늘로 치고 올라갔다.



나선형을 그리고 올라가며 몸집이 커진 봉황은 하늘에서 양 날개를 크게 피며 그 위용을 뽐냈다. 그 순간 붉은 영기가 수도 전체에 둥글게 퍼졌고 날개를 핀 봉황의 몸집은 순식간에 궁보다도 커졌다. 봉황은 큰 소리로 울어 대제의 시작을 알렸다.



그 울음소리는 수도 근처의 산까지 울려 퍼지고 궁 내의 땅이 흔들릴 정도로 우렁찼다. 대제는 그렇게 국왕의 전통적 의식과 함께 시작되었다. 




 연희제 후에 이뤄질 두 번째 대제의 순서는 문시제였다. 고구려의 뛰어난 시인들이 국왕이 내리는 주제에 맞춰 그 자리에서 시를 읊고 노래를 하는 차례였는데, 이 순서가 되면 대부분의 남성들은 전망대를 내려왔고 그 자리를 여성들이 채웠다.



운이 좋다면 고구려에서 가장 으뜸가는 미남인 막근의 모습을 볼까 해서였다. 막근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여러 뛰어난 문인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뛰어난 시인이었다.



문시제는 다른 대제와 마찬가지로 백성 모두가 참가 가능하지만 지루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선에서 궁의 문인들이 참가자들을 실력에 맞춰 걸러낸다.



때문에 국왕의 앞에 서게 될 다섯 명은 관직이 있는 자들을 포함해 모든 고구려민들 중 가장 뛰어난 시인들이었다. 문시제를 위한 정리가 마무리되자 국왕 앞으로 신하가 검은 천을 들고 다가왔다.



신하는 검은 천을 왕 앞에 늘여놓았다. 그리고 벼루 들고 붓을 왕에게 건넸는데, 벼루에는 금가루로 다져진 먹이 갈려 금물이 담겨 있었다.



왕은 벼루에 붓을 담근 후 천천히 들어 검은 천에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 주제는 사랑(愛) 이었다. 왕이 글자를 완성하고 붓을 신하에게 건네자 다른 신하가 검은 천을 들어 앞에 있는 막근을 포함한 다섯 시인들에게 펼쳐 보였다.




“이번 문시제의 주제는 사랑(愛)이오!”




신하는 외친 후 궁 중앙에 설치된 게시판에 천을 걸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신하가 옆에 걸려 있는 자신보다 큰 징을 쳤다. 국왕은 다시 자리에 앉아 술잔을 한 모금 들이켰다.



참가자들은 주제가 적힌 천이 걸리자 바로 자리에 주저앉아 자신들의 앞에 놓인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망대 위에서 주제를 들은 아낙네들은 자리에 앉아 음식을 나눠먹으며 막근의 순서를 기대했다.



십여 분 쯤 경과하자 신하가 다시 나와 징을 치며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참가자들은 붓을 내려놓고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피고 앉았다. 신하가 가운데로 나와 이름을 호명하자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종이를 펼치고 그 간 써 내려간 시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그들이 노래한 사랑의 종류는 모두 달랐다. 첫 번째 참가자였던 문관이 노래한 사랑은 국가를 향한 사랑이었다. 두 번째 참가자는 고구려에서 유명한 한량이었는데 그가 노래한 사랑은 풍류였다.



세 번째 순서였던 아낙네는 부모를 향한 사랑을 불렀고, 이때 처음으로 전망대에서 공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유일한 심사위원이었던 국왕은 세 번째 참가자가 시를 노래할 때까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나마 첫 번째 참가자의 시가 꽤 마음에 들었지만, 우승을 주기엔 아까웠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시에서는 재미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 국왕에게 있어서 풍류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유흥이었고, 부모를 향한 사랑도 자신으로 인해 부모가 흐트려논 고구려가 자리를 되찾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되려 원망이 더 컸다. 




“다음 시인 막근은 시창을 하라!” 




막근이 일어서 한 발 앞으로 섰다. 전망대에 술렁이는 소리가 일었다. 예복을 입은 막근의 모습을 보며 아낙네들은 두 손을 모으기도 했고 가슴팍에 손을 올리기도 했다.



궁 내의 모든 문관들도 막근의 시를 내심 기대하며 목을 축였다.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국왕은 자세를 고쳐 앉고 목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정작 막근은 머리가 새하얘졌다.



정말 자신 있고 쉬운 주제라 생각했는데 적어 내려가다 보니 이렇게 어려운 주제가 없었다. 그가 두 손에 들고 있던 종이에는 단어들만 나열되어 있었고 완성된 문장이 한 개도 없었다.



그는 국왕을 바라보다가 그 옆 구석에서 고개를 내밀고 그를 바라보는 소야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침내 궁 안의 정적을 깨고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이 어찌 경이롭지 아니한가.




달 푸른 밤 태어난 그대가 어느새 달보다 더 밝아졌도다.




금보다 밝고 비단보다 부드러운 두 눈에 내가 잠시라도 담겼으니




하염없는 기다림에도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되누나.




아! 이 어찌 경이롭지 아니한가.




그 작은 못에도 짝을 이루는 미물들이 있듯




저 하늘의 구름도 절대 홀로 떠 있지 않듯




나에게도 그대가 있어 세상의 의미를 완성하누나.


내 평생 처음 영생에 대한 바람이 생긴 연유가




연분홍 연잎을 문 것과 같은 그대의 입술 때문이구나.




내 평생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함은




그대의 눈물이 들려 준 노래에 대한 화답가요.




허나 건널 수밖에 없는 그 강을 건너는 그날




내 손에 그대의 손이 함께 하기를 비오.




이 어찌 경이롭지 아니한가.




모든 꽃과 동물이 그 여인을 시기하누나.




한참을 읊던 그는 잠시 멈추고 눈을 떴다. 장내에 정적이 일었다. 막근이 자리에 다시 앉자 여기저기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전망대에선 몇몇 여인들이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소야는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막근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막근은 소야의 반응이 궁금했으나 진정할 수 없이 떨리는 가슴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국왕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아직 마지막 순서가 남아 있었다. 국왕의 마음에는 이미 막근이 우승이었으나 조금 참아보기로 했다.



마지막 참가자는 가장 어린 소녀였다.



막근도 상당히 어린 축이었으나 이 소녀는 막덕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일 뿐 막근보다도 어려 보였다. 막근은 고개를 살짝 돌려 소녀의 종이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벼보았다.



소녀의 종이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 아이는 준비시간 내내 가만히 종이만 바라보았던 것이다. 막근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를 강인함과 쓸쓸함이 담겨 있는 뒷모습이었다. 소녀는 깔끔하지 못했고 옷 또한 오래되어 꾀죄죄했다. 소녀는 단단한 어조로 시를 읊기 시작했다.




못 다 핀 꽃에 뒤늦게 비가 내리네




해 뜰 적엔 미소가, 달 뜰 적엔 곡소리가.




어미 잃은 종달새는 세상이치 무지하니




길을 잃은 원망 섞인 울음만이 퍼지누나.




땅주인이 웬말이고 태평성대 별거더냐.




지난밤엔 따스하던 부모형제 차갑구나.




땅주인이 웬말이고 태평성대 별거더냐.




다 타버린 우리고향 다 타버린 부모형제. 




 소녀의 시 구절이 장내에 울려 퍼지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궁을 매웠다.



신하들은 어쩔 줄 몰라하고 전망대의 사람들은 모두가 소녀를 지켜봤다. 소녀의 시를 듣던 많은 이들 중 몇몇은 그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슬픈 노래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신하들의 대열에 끼어 앉아 있던 진당을 포함한 모든 문관과 무관들이 국왕을 바라보았다.



국왕은 아무 말하지 않고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성이 허리에 찬 검에 손이 향하는 걸 본 국왕이 점잖게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



징 옆에 서 있던 신하는 국왕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고, 소녀는 할 말을 끝낸 건지 다시 다소곳이 자리에 앉았다. 국왕은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나와 이름을 말해 보거라.”




이전 07화 [차대왕] 짙은 생각들로 가득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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