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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콘 Sep 08. 2023

[차대왕] 대제(2/2)

소녀는 앞으로 걸어나와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송구하옵니다. 소녀에게 이름은 없사옵니다.”




“무엄하도다! 당장 폐하의 물음에 답하지 아니할까!”




수성이 호통을 쳤으나 소녀는 더 답하지 않았다. 국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겁도 없이 이 자리까지 올라왔구나. 어찌 문관들을 속일 수 있었느냐.”




“고구려를 칭송하는 시를 부르니 합격을 받았사옵니다.”




문관들은 고개를 숙이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외쳤다. 




“이번 문시제의 우승을 발표하겠다!”




모두가 숨죽여 왕을 바라보았다. 




“이 어린 소녀가 이번 문시제의 우승자다!”




왕의 외침은 환호가 아닌 정적 속에 퍼졌다. 허나 재빠르게 악사가 연주를 시작해 우승 발표를 위한 악장을 연주하였다. 짧은 연주가 끝나자 왕은 말했다.




“사랑하는 마을, 더 나아가 나라를 잃은 슬픔은 그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다!”




국왕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이 소녀의 슬픔이 온 백성에게 전해져서 이 고구려가 강성한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깨닫기를 원한다! 고로 이번 문시제의 우승은 이 소녀다!”




사람들은 국왕의 설명을 듣자 환호를 질렀다. 한백은 그 자리에 서서 국왕의 뒷모습을 보며 그를 정말 간사한 늙은 여우라고 생각했다. 과연 국왕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충성을 다하게 하는 것에는 전무후무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국왕은 소녀를 향해 말했다.




“너의 이름은 오늘부터 ‘율’이다. 그대는 오늘부터 이 고구려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소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국왕의 말을 듣다가 천천히 일어나 국왕에게 절을 올렸다. 국왕은 진당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당. 그대가 이 아이를 잘 챙겨 주시오. 가족이 없는 그대에게 저 아이는 괜찮은 말벗이 될 것이오.”




진당은 느닷없는 상황에 당황했지만 어명을 받들어야 했다. 그는 국왕을 향해 절을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막근은 우승을 노리고 참가한 것이었으나, 국왕의 뜻이 이해되어 불만 없이 퇴장했다. 무엇보다, 그는 소야를 향한 자기 마음을 원 없이 표현했으니 그걸로 족했다. 막근이 궁 뒤편으로 가니 소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야는 막근을 발견하고는 잰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와 두 팔을 벌리는 듯하다가 참고 손을 잡으려는 듯하다가 결국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천지에 그런 시는 다시 없을 것예요. 우승하지 못하신 점이 안타까워요.”




막근은 그녀를 바라보며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가가 소야를 품에 안았다. 




“내 가진 재주 많지 않으나, 소야를 위한 시라면 평생 쓸 수 있을 것이다.”




소야는 그제야 막근을 안으며 아무 말없이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소야는 깜짝 놀라 얼어 버렸다. 심장이 배꼽까지 내려앉은 기분이었으나, 이게 막근에 대한 설렘인지 혹은 누가 이 순간을 볼까 봐 두려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막근에게서 나는 향은 따뜻하고 자상했다. 막근은 그녀를 안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먼저 그대를 안은 것이다. 내가 다가가는 것이니 너는 피하지 말라. 모든 책임은 다 내가 지겠다.”




막근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연정이 수많은 시련을 가져다줄 지 모르나, 내 절대 이 손을 놓지는 않겠다.”




소야는 막근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 그의 가슴팍에 두 손을 올려놓으니 그의 심장이 터질 듯 그녀를 원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소야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막근을 향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시련이랄 게 있어 봐야 별거겠어요? 저하께서 곁에 있을 텐데.” 




두 사람은 서로를 품에 담으며 서로의 심장 소리를 느꼈다. 



* * *




문시제가 마무리된 후 무투제 참가자들은 준비를, 다른 모든 이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신하들과 왕은 궁에서 술을 곁들인 식사를 시작했고, 병사들의 통제로 전망대에서 모두 내려온 백성들은 궁 밖에서 자신들만의 흥을 즐기며 무투제를 기대하고 있었다. 




막근은 갑옷을 차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병사들이 그에게 예를 갖추어 접근 한 후 몸을 수색하며 규칙에 어긋나는 타 무기의 소지를 검사할 동안, 그는 문시제에서는 느낄 수 없던 두려움에 짓눌려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총 여덟 명으로 선발된 무투제의 참가자들이 말하자면 고구려에서 무투로 가장 강한 자들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근은 그가 국왕의 지시로 그 대열에 끼었을 뿐, 실력만으로 놓고 보자면 진작에 떨어졌을 것으로 생각했다. 


 


마침내 징소리가 궁 안에 퍼지며 무투제의 개막을 알렸다. 첫 대진은 고구려에서 힘이 가장 쎄기로 소문난 백정, 마찬가지로 고구려에서 가장 재빠르기로 소문난 재력가 호위무사의 대결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다가온 후 국왕을 향해 몸을 돌려 절 했다. 그 후 서로에게 묵례를 하며 예를 표하고 뒤돌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전망대에서는 벌써 많은 이들이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크게 울려 퍼지는 징소리와 동시에 둘은 서로를 향해 돌진했고, 사람들의 환호성은 더욱 높아져갔다. 이번 무투제는 실제 무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해서 민중들은 무투제에 대한 기대가 많이 식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여전히 굉장했다.



백정의 나무 도끼가 허공을 가를 때 퍼지는 바람 소리는 실제 도끼 못지않게 위협적이었고, 호위무사의 발 빠른 검술은 나무라는 재질에 힘입어 더욱 속도를 더했다.



치열한 접전이 한창이던 중, 백정이 호위무사의 머리를 향해 횡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호위무사는 몸을 낮추어 도끼를 피한 후 그의 정강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일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정의 정강이에 검이 제대로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정이 뒤로 물러나지 않는 것은 물론 되려 미소 지으며 호위무사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호위무사를 향해 백정은 도끼로 그의 등을 내려찍었고, 그렇게 첫 대진이 백정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백정은 사람들을 향해 포효하며 자기 기운을 발산했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두 번째 대진은 한백의 차례였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자기 위치에 서서 멀리 서 있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행색을 보아하니 네놈은 필시 산적이구나.’




양손에 작은 도끼를 들고 있는 덩치 큰 사내는, 일반 병사보다도 많은 흉터가 온몸에 가득했고 벌써 한백을 향해 짐승과 같이 웃어보이었다. 두 남자는 이 전과같이 왕과 서로에게 예를 다하고 다시 자기 위치로 돌아가 징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한백이 목검을 양손으로 잡으며 기세를 뿜기 시작하자 백성들이 환호했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징이 올린 후 산적은 한백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한백은 검을 들어 자세를 취한 후 깊게 숨은 내뱉었다. 그는 그의 목을 향해 내려오는 도끼를 쳐 낸 후 곧바로 배를 걷어찼고, 산적은 뒤로 나뒹굴었다. 한백은 산적이 일어날 때까지 좀 전의 자세를 취한 후 기다렸다. 산적은 호쾌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산적은 한백을 향해 다시 한번 달려와 도끼를 휘둘렀다. 한백은 옆으로 가볍게 피한 후 다리를 걸어 그를 넘어뜨린 후 검을 그의 얼굴을 향해 찍어내리려 했다. 산적이 반응할 틈도 없이 한백의 검은 그의 얼굴을 향했으나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놀란 산적은 순식간에 다시 뒤로 튀어 올라 자세를 취하며 한백과 거리를 두었다.



더 이상 산적의 얼굴에는 가벼움이 없었다. 산적은 골똘히 계산하더니 이내 허리를 피고 도끼를 휘두르며 말했다.




“천하의 한백이 왜 이리 소극적이신가!”




“네놈 따위에게 쓸 힘이 아깝다.”




한백이 차분하게 말하자 산적은 발끈했다. 그는 한백에게 달려들어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두르며 그를 공격했지만 한 번도 그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수십 차례의 접전이 이어지자 백성들은 더욱 환호성을 질렀고 국왕도 술을 들이키며 흥미진진하게 관전하고 있었다. 진전없는 공격에 지쳐가던 산적이 두 도끼로 한백의 머리를 내려찍으려 하자 한백은 검으로 막고 말했다. 




“이런 하찮은 힘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괴롭힌 거냐.”




산적은 점점 힘이 밀리는 것을 느껴 뒤로 튀어 올라 한백과 다시 한번 거리를 두었다. 한백은 검을 고쳐 잡으며 산적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싸워 본 적 있느냐.”




한백의 눈에 살기를 느낀 산적은 힘이 빠진 두 손을 다시 위로 올렸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한백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네놈 목숨을 위해 그래야 할 것이다.”




한백이 검을 길게 뻗어 산적의 얼굴로 찌르려 했으나 산적이 두 도끼로 간신히 막아 내었다. 하지만 한백은 틈을 주지 않고 검을 아래에서 위로 크게 올려 쳐 산적의 도끼 하나를 날렸다.



한백은 크게 원을 그리며 위를 공격한 후 바로 정강이를 걷어차 산적이 반격할 틈을 전혀 주지 않았다. 산적의 작은 손도끼 하나로는 한백의 맹렬한 공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온몸을 하나하나 짚어 주듯 공격하던 한백은 그의 손목을 집중 공략하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목검이라 할지라도 한백의 손에 들리니 여느 검보다 날카로웠다. 결국 세, 네 번 강타당한 산적의 오른손목은 부러져 꺾여 버리고 말았다.



한백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왼쪽 어깨를 노리기 시작했다. 발길질로 오른 옆구리를 걷어차 왼 어깨가 무방비가 되면 그는 가차 없이 어깨를 깨부수며 산적을 넝마로 만들었다.



결국 산적은 대진 시작 10분여만에 피투성이가 되어 무릎을 꿇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한백은 정자세로 그의 얼굴에 검을 겨냥하며 말했다. 




“지금은 이렇게 보내주지만, 훗날 저잣거리에서 네놈의 이름이 내 귀에 들린다면 그땐.”




그는 산적의 목에 검을 대며 말했다. 




“이 위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야.”




산적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한백의 승리를 알리는 징이 울렸다. 사람들은 한백의 이름을 연호하며 즐거워했다.



한백은 검을 허리에 차고 왕을 향해 예를 갖추어 절을 올렸다. 그리고 뒤로 도는 순간 무언가 뜨거운 것이 배에 느껴졌다. 산적이 숨겨놨던 단도로 한백의 등을 찌른 것이다.



그 찰나에 수성은 단궁을 꺼내어 화살을 쏘았고, 한백이 뒤로 돌기도 이전에 산적은 화살을 어깨에 맞고 쓰러졌다. 한백은 등에 꽂힌 단도를 직접 빼내었으나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 후 곰 같은 그의 몸이 무투장 위에 큰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전망대 위의 여인들이 소리 지르는 소리가 시작되었다. 어의들은 한백을 향해 뛰어왔고 병사들은 황급히 뛰어나가 산적을 제압한 후 포박했다.



상오는 멀리서 이 일을 지켜보며 그 찰나를 놓친 것에 대해 곳곳에 배치된 자기 부하들을 쳐다보며 머리가 띵할 정도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수성 또한 황급히 달려 나가 한백에게 붙었다. 순식간에 무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의들은 한백의 상태를 살핀 후 한시가 급하다 말하며 치료를 위해 옮겨야 한다고 했고, 수성이 직접 그를 등에 업고 달려 나갔다. 소야가 울음을 애써 참으며 수성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가는 것을 본 막근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 사태가 일어나는 내내 일관된 표정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던 국왕은 병사를 시켜 포박된 산적을 무릎 꿇린 후 물었다.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냐.”




국왕의 물음에 산적이 비웃으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옆에 서 있던 병사가 창 끝으로 그의 배를 쳤고, 국왕은 다시 한번 물었다.




“네놈들 패거리의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다.”




산적은 퉁퉁 부은 눈으로 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드높으시고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한낱 산적패 이름을 물으시니, 몸 둘 바를 몰라 이름을 잊었수다.”




국왕의 눈썹이 흔들렸다. 산적은 국왕이 가소로운 듯 웃고는 말했다.




“네놈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원망을 사고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봉황의 불길이 크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국왕이 분노한 것이었다. 




“바로 네놈 때문에, 너희 백성들이 고통받을 것이다.”




산적은 말을 끝낸 뒤 스스로 혀를 깨물었다.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진 산적은 잠시 경련을 일으키더니 끝내 숨이 멎었다. 전망대의 모두가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궁 안팎으로 무거운 정적이 가득했다. 국왕은 봉황을 쓰다듬어 불길을 죽인 후 일어나 외쳤다.




“대제는 이로써 끝이다! 모든 백성들은 돌아가도록 하라!”




그 말과 함께 국왕은 바로 그 자리를 떴고, 이 모든 상황을 궁 한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상오 또한 황급히 자리를 떴다. 상오가 급하게 움직이며 손가락을 두어 번 흔들자 부하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그를 따라 움직였고, 상오의 몇 마디 말을 듣고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듯 뛰어갔다.



신하들 또한 어안이 벙벙해 서로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했고, 장내의 어수선함이 조금 사그라지고 나서야 무투제 다음 차례였던 막근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갑옷을 벗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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