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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콘 Sep 08. 2023

[차대왕] 짙은 생각들로 가득 찬

 야심한 밤, 진당은 자기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국왕이 전초기지에서 자신에게 했던 마지막 말을 되뇌었다. 국왕이 수성에 대해 좋게 보지 않는 것은 하루 이틀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영토 확장에 있어 가장 많은 공을 세우고 있는 자가 수성이기도 하다. 진당이 생각하는 수성은 아주 강인한 자였다.



이미 오랜 세월 부당한 처우에도 불구하고 국왕에 대한 불만을 일절 참고 견뎌내 왔으며, 고구려를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고 행하는 자가 수성이었다.



그렇게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이를 돕는 것, 무엇보다 수성을 주군으로 모시는 자가 전투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라는 것을 국왕이 아니꼽게 볼 리 없었다.



그 순간, 진당의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설마 국왕이 수성을 음해하려 한 것일까. 만약 그렇게 가정을 해 본다면, 마지막 전투에서 야만족이 보여 준 전략이 납득이 된다.



평소 그들은 전부 기마병으로 속도를 무기로 전투를 치러왔다. 하지만 그날은 전면전으로 뛰어들어 평소보다 깊게 고구려군을 압박했다.



게다가 그들이 정말 삶의 터전을 지키려 했다면 강둑을 파괴하는 것은 아무리 궁여지책이었다 한들 너무나 큰 희생이었다. 그 강물이 휩쓸고 간 마을 들이 그들의 터전 아닌가.



하지만, 만약 국왕의 사주가 있었더라면 그때와 같은 여러모로 무리한 전략이 가능했을 것이다.




진당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소를 맴돌며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생각이 생각을 낳았다. 이렇게까지 국왕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조만간 궁 안에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인데, 그는 자신이 어떻게 처사해야 할지 도무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수성에게 자기 생각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그저 어긋난 생각이라 치부하며 지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진당은 그의 조국을 사랑했다.



그는 이 나라가 휘청이는 일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그는 생각에 빠져 빠르게 쓰다듬던 수염에서 손을 떼고 주먹을 쥐었다.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백은 침소에서 수면복인 채로 홀로 술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간의 여정으로 피곤한 게 분명했으나 통 잠이 오질 않았다.



일개 장군으로서 너무 많은 생각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신경 쓰지 않으려 하지만 그게 통 쉽진 않았다. 그때,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백 장군 계시오?”




진당이었다. 한백은 단번에 그가 온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자신과 같은 고민일 것이었다.




“진당 아니오? 어서 들어오시오.”




진당은 한백의 침소로 들어와 자리를 했다. 한백은 하인을 시켜 상을 더 크게 내오라고 말했다. 곧이어 두 명의 술상이 차려졌고 둘은 한두 잔씩 말없이 기울였다. 




“장군께서는 이번 전투에서 분명 혁혁한 공을 세우셨는데, 상황이 아쉽게 됐습니다.”




진당의 말에 한백은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며 말했다.




“뭐, 별수 있겠소. 그저 명을 잘 이행해냈으니 그거면 된 거 아니겠소.”




진당이 한백의 빈 술잔을 채워주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소신 또한 걱정은 많으나 고국을 위해 충성을 다 할 수 있음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소. 같은 생각이오.”




한백은 술상에 함께 나온 육전을 입에 넣으며 답했다.




“그나저나 이제 대제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장군은 이번 무투제에도 참가하십니까?”




“그렇소. 대제가 있었기에 장군이 된 이 몸이, 어찌 이제 와서 내뺄 수 있겠소. 사실 매년 무투제를 기대하고 있소.”




한백이 흥미를 보이며 말했다. 그는 밖에 대기 중인 하인에게 술을 한 병 더 내오도록 하며 남은 술을 진당에게 모두 주었다. 진당은 술을 받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장군이 무투제에 처음 참가한지도 어느덧 열 해가 되었습니다. 고구려는 장군과 같은 무신을 발굴한 것에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생각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진당이야말로 이 나라에서 버금가는 도인이시지 않습니까. 그대와 같은 인재가 저 같은 일개 칼잡이 몇보다 나을 것입니다.”




한백과 진당은 소탕하게 웃으며 잔을 부딪혔다. 그렇게 분위기는 달아올랐고, 오래지 않아 술병은 다섯 병째 침소로 들어오고 있었다. 진당이 한백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이번 연희제에도 분명 소야가 가장 빛나겠지요. 소야와 같은 딸을 둔 장군님은 천하를 가진 기분이시겠습니다.”




한백은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그렇소. 절세 미녀라며 모두 소야를 어여삐 봐주니 아비된 자로서 그리 기분이 좋을 수 없소이다. 근데 그대가… 혹시… “




한백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진당을 바라보자 진당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어찌 소신 같은 늙은이가 그런 파렴치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농담이오. 소인도 진당을 오래 봐 왔는데 그걸 모를 리가 있겠소.”




진당은 한백이 내민 술잔에 자기 술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미 소야에게 연정을 품은 자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진당은 한백의 눈치를 살폈다. 한백은 잠시 생각하더니 잔을 들이켰다.




“들었소. 내 직접 그 아이에게 묻지는 않았으나 세자저하께서 요즘 이 부근에 왕래가 좀 잦으시다 들었소이다.”




“이 어찌 경축드릴 일이 아니겠습니까? 소인에게는 피붙이랄게 없지만, 필시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한백이 씁쓸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빈 잔을 바라보았다.




“그렇소. 허나 한낱 계집이 괜한 일에 휩쓸려 생사를 위태롭게 할까 걱정되는 것이 아비의 마음 아니겠소.”




진당은 말없이 한백을 바라보다가 술을 따라주었다.




“소인이 경솔했습니다. 미처 그 점까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니오. 내가 어찌할 수 있겠소. 그저 그 아이의 운명인 게겠지.”


한백은 가득 찬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곤 진당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럴 게 아니라 내 딸아이를 그래도 선생께 인사는 드려야겠소. 오랜 전우였는데 그 흔한 인사 한번 못 했구려.”


진당은 화색을 띄며 좋다고 했고, 곧 소야가 편한 옷차림으로 들어와 한백의 옆에 앉았다.




“이 아비가 오늘 너에게 진당 선생을 제대로 인사시키려고 불렀다. 이분이 아비를 몇 번이나 구해 준 전우이며 생명의 은인이시니라. 너는 앞으로도 이 분께 예를 갖추어 대하거라.”




“인사 올리겠사옵니다. 소야라고 하옵니다.”




소야가 단아하게 인사하자 진당도 예를 갖추어 인사를 받았다.




“소인과 같은 늙은이를 알아 무엇하겠냐만, 내 한백장군에게 진 빚이 그간 많으니 필요한 일이 있거든 꼭 주저 없이 찾아주시오.”




소야는 두 남자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진당은 자기 계획대로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했다. 그는 한백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세자저하께서는 평소 수성장군님과 사이가 좋으시다 들었는데, 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들은 바 없소. 한낱 무관이 관여할 바가 아니오. ”




한백은 관심 없다는 투로 답했다. 진당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럴 때 세자저하라도 수성장군께 따뜻하게 대해주시니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진당이 내민 잔에 한백은 자기 잔을 맞대었다.




“분명 수성장군께서는 많이 외로우실 것이오. 정말 세자저하께서 그리 해주신다면 다행일 것이오.”




진당은 소야를 힐끔 본 후 미소 지으며 술을 한껏 들이켰다. 됐다. 그는 후련한 표정으로 연이어 한백과 잔을 부딪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백은 소야와 함께 그를 마중한 후 침소로 돌아왔다. 소야는 술상을 치우고 상을 들며 말했다. 




“진당선생님께서는 정말 고구려를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한백은 그대로 자리에 누우며 답했다.




“진당은 분명히 이 나라의 큰 기둥이시다.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이시니 너도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듣도록 해라.”




소야는 한백에게 인사를 올린 후 침소를 나왔다. 그녀는 진당과 한백의 대화를 기억하며, 내일 선조의 못에서 막근을 만난다면 이를 꼭 전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녀는 침소에 누우려다가 일어나 촛대에 불을 올린 후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성대군에게 잘하길 바란다는 염원의 편지였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왕이 될 남자였다.



누군가에게라도, 작은 마음이라도 미움을 살 수밖에 없는 자리였지만 가능하다면 그녀는 그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성군이 되길 바랐다. 




‘정말 내가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일까?’




그녀는 편지를 쓰다가 멈칫했다. 너무나도 그러고 싶었으나 그를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이미 주변에서 친한 친구들이 그녀에게 참 많은 경고하고 있었다.



언제 벌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는 처지라고. 생각이 많아지려 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은 뒤편지를 황급히 마무리지은 후, 혹시 우울한 속내가 드러나진 않았는지 두어 번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러곤 짧지만 애정이 가득 담긴 그 편지를 내일 그에게 직접 전해 줄 생각에 뿌듯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 * *




태조가 선조의 못에 마련된 황금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가끔 고민이 있을 때만 이곳을 찾아오곤 했다. 그런 밤이면 그는 그곳을 지키는 궁녀들을 모두 내보내고 홀로 의자에 앉아 두어 시각은 보내고 다시 침소로 돌아가고는 했다.



태조는 그날도 어김없이 못과 밤하늘을 바라보던 중 입을 떼었다. 




“상오야. 게 있느냐.”




평소와 다른 그의 부름에 상오가 정자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 그의 앞에 절을 올렸다. 




태조는 상오에게 손짓으로 답한 뒤편히 앉으라 말했다. 상오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차분히 내렸다. 




“고개를 들라.”




왕의 차분한 목소리에 상오는 움찔했다. 그는 그가 지키는 국왕의 용안을 정면으로 본 적이 몇 되지 않았다. 




“괜찮다. 고개를 들어 짐을 보거라.”




상오는 금기를 어기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태조의 용안을 바라보았다. 왕의 표정은 상오의 예상과는 다르게 아주 인자하고 어쩌면 조금 안쓰러운 듯이 보이기도 했다. 왕은 상오를 그렇게 몇 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는 작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어미를 쏙 빼닮았구나.”




그 순간 상오의 눈에서 눈물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렸다. 상오는 당혹스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그는 눈물을 급하게 훔쳐 내며 말했으나, 이상하게도 눈물이 멈추질 않아 상오의 말은 거의 웅얼거림이었다.




“소,송구하옵나이다. 전하.”




왕은 답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어서 가 보거라.”




하지만 상오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주먹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아이처럼 끅끅대기만 했다. 왕은 그 모습을 보고는 먼저 일어나 그의 옆으로 걸어갔다. 왕이 선조의 못 담장문을 넘어서려 할 때, 상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어머니는…”




왕은 상오의 말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상오가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땅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미 그의 무릎 앞 흙은 눈물로 가득 젖어 있었다. 곧이어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번 더 물어보면, 네놈의 목을 치겠다.”




왕은 그렇게 선조의 못을 떠났고, 상오는 머리를 땅에 박고 소리 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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