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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콘 Sep 08. 2023

[차대왕] 조랑말과 검

궁 한 켠에서 두 남자가 서로 목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보더라도 그 양상은 쉽게 파악되었다.




일방적인 한쪽의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 공격이라는 것조차도 너무나 초라해서 받아 내는 쪽은 재미조차 느끼지 못 하는 듯했다. 바로 막근과 그의 호위병이었다.



막근은 검이 불편했다. 손이 되는 순간엔 다리가 따라주지 않았고, 다리에 신경 쓰다 보면 검이 어느새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자기 대련상대가 되어 주는 병사에게 애초에 검이 몇 번 닿지도 못 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어찌해야 할 바 몰라 하는 병사를 물렀다.



병사가 기다렸다는 듯  사라지자, 그는 근처 돌에 앉아 검의 손잡이를 보았다. 한 것도 없는데 땀은 몸을 전부 적셨고, 기운은 다 빠진 자신이 너무나 초라했다.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으나, 아버지의 명이 이해되기도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기 자기 무능함이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목검으로 애꿎은 땅을 건드렸다. 




“무슨 죽을 병이라도 걸리셨나요?”




꽃잎이 바람에 춤을추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막근에게 닿자, 막근은 금세 화색을 띄며 고개를 들었다. 소야였다. 막근은 단숨에 목검을 그 자리에 내던지며 소야에게 다가 갔다. 




“왔구나? 내 여기 있으면 그대가 올 줄 알았다.”




“저는 저 멀리서 저하께서 이곳에 오길 온종일 기다렸는걸요.”




소야가 정중하게 막근에게 절을 올리며 말했다.



단정하게 위로 묶인 머리에 봉긋하게 나온 이마, 얇은 실구름과 같은 눈썹 아래로 부드럽게 밤을 비추는 보름달과 같은 눈동자, 홍조를 띈 뽀얀 볼에 오뚝한 코, 알듯 말 듯 올라간 입꼬리 때문인지 늘 웃고 있는 인상의 소야를 보고 있자면 막근은 왕좌 따위의 의미를 송두리째 잊을 수 있었다.



그날 따라 그녀가 입은 옷 또한 꽃잎을 여러 겹 겹쳐 놓은 모양새의 선홍 빛이었다. 막근의 눈에는 그저 꽃과 같았다. 그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어찌 이리 곱단 말이냐. 그대와 같은 이를 경국지색이라 하겠으나, 나는 왕이 아니니 걱정할 바가 없을 것이다.”




“누가 들을까 두렵습니다. 소인을 위한 것이라면, 아무 말씀 없으셔도 좋으니 부디 과언을 아끼셔요.”




조곤하게 말하며 미소를 잃지 않는 소야를 보던 막근은 참지 못하고 소야의 두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든 표현하지 않으면 체한 것같이 심장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구나.”




“부끄럽습니다.”




막근은 고개를 숙인 채 부끄러워하는 소야를 보며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이 국왕이 되어 소야를 옆에 앉히는 상상을 다시 한번 했다.



이 현명하고 아름다운 여인은 분명 한낱 궁녀가 아니라 고구려의 국모가 되어야 할 인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자리에 대한 열망이 그렇게 크지 않으나, 이런 상상을 할 때에는 어느새 평소와 다른 용기가 마음 깊숙이 흐르곤 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리도 안색이 어두우신가요? 저 멀리서부터 그 기색이 느껴져 소녀 걱정이 많았어요.”




소야가 고개를 올려 막근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촉촉한 눈망울에 막근은 내심 자신을 지켜봤을 소야에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분명 그녀는 자기 모습을 다 보았으면서 모르는 척 물어보는 것이리라.




“아… 아바마마께서 내게 무투제에 참가하라 명하셨다.”




막근은 잡고 있던 소야의 손을 놓으며 뒤돌았다. 소야는 그의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분명 전하께서 깊은 뜻이 있으실 거예요. 훗날을 위한 단계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소야의 말을 들으며 막근은 자기 뒤에 내던져져 있던 목검을 바라보았다. 연습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상처 없이 깨끗한 목검의 상태에 막근은 다시 한번 부끄러웠다.



그는 목검으로 다가가 두 손 위에 목검을 올려놓고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기에 더욱더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내겐 검과 방패보다 책과 붓이 더 친숙하다. 아바마마의 기대에 부흥치 못하면 그건 나뿐 아니라 아바마마께도 폐를 끼치게 될 텐데, 그게 두렵구나.”




소야는 잠시 풀이 죽은 막근의 뒷모습을 바라본 후에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태어나기도 이전에, 제 아비는 조랑말을 하나 키우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저 짐수레를 끌 용도로 키우게 된 조랑말이어서 크게 애정을 주지 않고 편하게 다루셨다고 해요.



그러던 중 작은 개울을 건너게 되었는데, 이 조랑말이 개울 위의 다리는커녕 개울가 근처도 겁이나 가지 않으려 했답니다. 아비는 성이 났지만 별 방도가 없어 직접 그 수레를 끌고 개울을 건넜어요.



그렇게 매번 그 개울만 건너려 하면 조랑말이 말썽을 피우니 어찌 속이 답답했는지, 하루는 개울가 근처로 조랑말을 끌고 가서 바가지로 개울 물을 떠서 조랑말에게 갖다 줬답니다.



조랑말은 그 바가짓물을 먹지 않으려 고개를 그렇게 저어대더니, 한 두 번 마시고서는 개울을 겁내지 않게 됐다고 하더군요. 이 이야기에서 제가 제일 재밌었던 부분은 무언지 알려드릴까요?”




“무엇이냐?”




막근이 화사하게 웃고 있는 소야를 보며 물었다.




“그 후 조랑말이 덩치가 커지더니, 꽤 큰 말이 되었다는 거예요. 조랑말인 줄 알고 받아 키웠는데, 사실 망아지였던 거죠. 튼실한 말이 된 후에는 그 값이 말도 못 하게 뛰어올라 소녀 동네에서 가장 비싼값에 팔렸답니다.”




“한백장군께서 그런 일화를 겪으셨는지는 몰랐다. 참으로 정겨운 이야기구나.”




“저하.”




이번엔 소야가 막근이 들고 있던 목검 위에 두 손을 살포시 올리며 말했다.




“아무 걱정 말고 준비하셔요. 소녀, 아무것도 모르지만 분명 저하께 좋은 기회가 저절로 온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막근이 보는 소야의 두 눈에는 확신과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 여인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구나, 막근은 생각했다.



새삼 이 여인보다 많은 것을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겁쟁이 같이 굴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 여인의 팔면영롱한 눈빛을 보며, 그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굳건하게 다짐했다. 





***




“길을 비켜라!”




성 담벼락 위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장내의 모든 사람이 소리가 나는 쪽을 보자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사람들에게 좌우로 손짓하고 있었고, 담벼락 아래 두 문지기 병사들은 성문을 힘차게 안쪽으로 열었다.



그들의 모습에 장내 사람들은 황급히 양 갈래로 나뉘어 섰고, 그 과정에서 몇몇은 지게에 실은 짐들을 떨어트리기도 했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과 주막에서 술을 마시던 자들 모두 저 문을 통해 들어올 개선장군의 모습을 보기 위해 저잣거리로 나왔고 성문이 열리며 붉은 호랑이가 그려진 깃발을 든 병사와 고구려의 상징인 한자 ‘고’가 황금빛으로 그려진 깃발을 든 병사가 앞선 행렬이 들어왔다.



모든 주민들이 큰 소리로 병사들을 환영했다.




한백과 진당이 뒤로 쉰 명은 족히 넘는 선봉대를 이끌고 나란히 말을 타고 성 문 안으로 들어오자 사람들은 연신 그들의 이름을 외치며 그를 칭송했다.



위엄이 넘치는 그들의 모습에 엄마의 치맛자락에 숨어 몰래 행렬을 보던 아이들은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선봉대가 성문 안으로 모두 진입하자 진당은 곧 한백보다 조금 앞서 가더니 지팡이를 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예를 갖추라! 수성대군이시다!”




사람들은 일제히 절을 하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한백이 이끄는 군사들이 모두 지나자 성 담벼락 위의 병사가 북을 쳐 아군의 귀환을 장내에 알렸고, 성문 한가운데로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적호가 성안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예를 갖추어 수성을 환영했다.



적호의 발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그 울림이 주변으로 전해져 사람들은 존경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적호는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는지, 한껏 위엄넘치는 표정으로 정면만을 응시하며 발걸음을 이어 나갔다.



그의 뒤를 이어서 병사들의 행렬이 계속되는 동안 절하지 않은 뒤쪽의 백성들과 아이들은 환호를 멈추지 않았다. 성내를 지나 궁 앞에 당도하자 수성은 적호에서 내렸다. 병사 둘에게 적호를 맡겨 목욕을 보낸 후 그는 한백과 진당을 양쪽에 두고 궁 안으로 들어갔다.



궁 안에는 신하들 수십 명이 양쪽으로 예를 갖추어 서 있었고, 먼발치 왕좌에 국왕이 황금과 붉은빛이 감도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궁 문 뒤에 서 있던 신하가 수성의 입궁을 외쳤고, 신하들은 고개를 숙이며 그를 맞이했다.



수성은 궁의 중심으로 걸어오는 내내 국왕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는 멀리 앉아 있는 국왕으로부터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는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국왕 뿐만 아니라 양쪽에 서 있는 신하들도 마찬가지의 모습이어서, 수성은 그 분위기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보통 개선장군의 귀환에는 악단과 음식이 가득 마련되어 있어야 마땅했지만, 왕은 늘 수성에게는 박했다. 수성은 왕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절로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




“소신, 북방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와 용안을 뵙나이다.”




궁 안에 수성의 저음이 울려 퍼졌으나 국왕은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고개를 들지 않은 수성은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모욕주는 국왕이 옹졸하게 느껴졌다. 한참 후에야 국왕은 말했다.




“그래. 수고가 많았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수성의 공을 치사하는 말이나 행동이 없자 세 개선장군들은 당혹스러웠다. 심지어 그들은 아직 절한 채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왕은 셋의 절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향해 외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대제 준비에 들어가라!”




수성이 놀라 고개를 살짝 들어 주위를 살피자 수많은 신하들이 인사를 올리며 궁에서 퇴장했다. 곧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대들도 어서 쉬거라. 고생이 많았다.”




그 말과 함께 왕은 들어갔고 세 사람은 일어났다. 수성은 왕에게 무어라 말하고 싶었으나 왕이 자신을 개의치 않고 바로 왕좌에서 일어나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기회를 놓쳤다.



진당은 그의 옆에서 왕을 따라 들어가는 흑막대장을 눈여겨 보았다.



표정을 읽기 어려운 자였다.



단 한 번이라도 눈이 마주치면 심중을 조금은 읽을 수 있을 텐데, 그는 진당을 바라보는 건지, 다른 곳을 바라보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수성은 주먹을 쥐며 그 자리에서 단 한걸음도 떼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왕은 그에게 못되게 굴고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역사상 가장 큰 원정을 성공해낸 장군에게 이런 대우는 말도 안 되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진당이 수성의 의중을 읽고 말했다. 수성은 뒤를 돌아 진당과 한백을 보자, 새삼 이번 원정으로 그들이 얼마나 폭삭 늙었는지가 보였다. 수성은 분노를 잠시 내려 두기로 했다.




“그래. 어서 병사들을 점검하고 쉬도록 하시오.”




진당과 한백은 그의 명에 간단히 예를 표한 후 궁 밖으로 나갔다. 수성은 그들을 보낸 후 다시 뒤돌아 황금의 왕좌를 바라보았다. 정말 지독히도 가까우면서 지독히도 먼 거리였다. 그는 이 이상으로 저 의자에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지난밤에 진당과 나눴던 속 깊은 대화를 기억했다.



당장 내일 왕이 된다한들 이미 너무 늙은 그였다.



오만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그를 감싸 안았다. 그는 그렇게 멍하니 몇 분을 있고 나서야 정신이 들어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한백은 궁으로부터 십리도 안 되는 곳에 있는 화려하지 않은 가옥 앞에 말을 세웠다.




그는 말에서 내린 후 가옥에서 뛰어나오는 하인에게 고삐를 넘겨 주고는, 갑작스레 자신을 뒤에서 껴안은 소야를 떼어내어 뽀얀 두 뺨에 손을 올리며 미소 지었다. 소야는 잘 익은 복숭아와 같은 분홍빛 볼에 미소를 머금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건강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예요.”




한백은 소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찌 이 아비를 걱정하느냐. 아직도 이 아비가 못 미더운 게냐.”


소야는 흙먼지가 가득한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매 전투마다 아비가 걱정되는 것은 소녀 죽는 날까지 다르지 않을 거예요.”




한백은 얕게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래. 이 세상에 내 걱정해주는 것이 너 하나면 충분하구나.”




소야는 그제야 한백의 품에서 떨어지며 물었다.




“이번 전투는 조금 고되셨나요? 평소와 달리 안색이 어두우셔요.”




한백은 좀 전 국왕 앞에서의 상황을 떠올렸다. 자기 노고를 치하받지 못한 것은 상관없었으나, 자기 주군 수성이 느꼈을 치욕에 대해 걱정되었다.



수성과 전투를 함께 한 한백의 처지에서, 수성은 분명 더 좋은 처우를 받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여정이 길어서 그런 게니 개의치 말거라. 아비는 그만 쉬어야겠다. 들어가자꾸나.”




그는 소야를 앞세워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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