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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콘 Sep 08. 2023

[차대왕] 선조의 못

나무로 만들어진 원형 탁자 위에 대장군 상오와 운강을 포함한 그의 휘하 별동대장들이 모였다.



탁자는 앉아서 보기엔 높고 서서 보기엔 낮아 늘 허리를 숙이게 되는 모양새였다. 원형 탁자 뒤로 있는 벽에는 각 지명이 쓰여 있었고 그 옆에는 작게 이름들이 있었다.



지명 마다 그곳에 배치된 까마귀들을 적어놓은 상황판이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두꺼운 철로 만들어진 상자들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수많은 지령과 보고가 적힌 크고 작은 두루마리들이 들어 있었다.



지역별로 나누어져 있는 그 철제 상자들은 지금은 열려 있으나 상오나 운강이 자리를 비울 땐 무조건 잠궈져 있었으며 아무도 손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운강의 지시에 따라 파견식을 마친 네 명을 포함한 모든 흑막병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정렬해 있었다. 모든 이들이 정렬해 있는 바람에 까마귀 굴 안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오로지 대장장이의 쇠질 소리뿐이었다. 




“부여의 소식 먼저 올려도 되겠습니까?”




상오에게 먼저 보고를 올린 건 부여지역의 흑막병을 이끄는 별동대장 장희였다.



그는 상오와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로, 여느 까마귀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부모나 출신 지역을 알지 못 했지만, 부여지역에서 강한 유대감을 느끼자 상오에게 부탁해 그곳을 담당하게 해 달라 했다.



그는 상오와 동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겉늙은 모습인 데다가 차분하기를 넘어서서 달관한 듯한 표정을 지니고 있어 늘 다른 까마귀들은 그가 올해 안에 은퇴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는 했으나, 상오의 눈에는 그가 아직 한창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다른 건 몰라도 그의 침착함은 가히 흑막대 중 일등이라 할 수 있었다.




“현재 부여에서 해시왕의 지시로 모든 젊은 남자들을 끌어모아 대규모의 군대를 징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병사가 징집되는 속도에 반해 물자는 쉬이 모아지질 않고 있어, 아마 병사 수에 맞춰 진군하려면 내년 여름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해시왕은 언제나 악에 찬 인물이었지… ‘ 상오는 생각에 잠겨 장희의 보고를 되새김질 했다. 그때 다른 이가 그의 옆에 서서 보고를 올렸다.




옥저지역 별동대장 하묵이었다. 하묵은 침착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 특유의 여유가 늘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주곤 했다.



운강이 왕의 까마귀였던 시절부터 옥저 담당이었던 그는 여느 까마귀와는 다르게 그쪽 지역 유지들과 관계를 형성해 손쉽게 주막에서 소식을 접하는 등 자신만의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곤 해서 운강이 아끼면서도 사고가 날까 봐 늘 걱정하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의 재능을 귀히 여긴 운강은 그를 한나라로 파견보내겠다 했지만 하묵은 자기 그릇을 안다며 옥저 정도가 맞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한다. 




“옥저군은 부여에 비하면 턱없이 적으나, 물자와 군사 준비 속도가 빠릅니다.”




하묵은 늘 그렇듯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들의 보고받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상오가 아니라 운강이었다.




“뭐 부여나 옥저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건 늘 있는 일이지. 아마 이번엔 수성대군이 넓힌 영토들 때문에 꽤 자극받은 게 분명하다. 부여 쪽은 수성대군이 아마 직접 나서겠구나.”




그때, 급하게 돌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한 흑막병이 급하게 뛰어와 상오와 운강 앞에 다달았다. 멀리서부터 달려온 터라 온몸에 흙먼지와 땀이 가득했고, 그로 인해 그가 입은 검은 천 갑옷이 다 젖어 있었다. 그가 숨을 돌리는 동안 상오는 그를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




흑막병은 뒤늦게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 뒤 상오에게 말했다.




“한나라 도성 잠복대 주항입니다. 한나라가 부여에게 고구려를 칠 수 있도록 군사와 물자를 지원해주겠다는 공표를 삼일 전 발표했습니다!”




상오가 그 말을 듣고 바로 뒤돌아 장희에게 물었다.




“네가 본 군사의 징집 수는 어느 정도였느냐?”




“일만 정도로 추정되었습니다. 부여의 해시왕이 보름 전 사신을 보냈었는데, 이를 위한 청탁이었던 듯 하옵니다.”




상오는 이제 겨우 숨을 돌리고 있는 자에게 물었다.




“한나라에서는 그래서 얼마나 지원해주겠다는 것이냐?”




“군사가 이만, 물자가 일만병 기준 육개월치라 공표하였습니다.”




상오는 운강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듯한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고, 운강이 벽에 걸려 있는지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상오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너희들은 진군하는 병사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숲과 평야에서는 대피하여 도성에 있는 잠복대와 한동안 함께 행동하라는 내용을 각지의 흑막병들에게 전달하도록 하라!”




상오의 명에 동굴 전체가 우렁찬 흑막병들의 대답으로 울렸다. 그들은 상오가 손을 올려 해산을 명하자 재빠르게 뛰어나가거나, 준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상오는 옥저, 부여와 한나라에서 온 흑막병들에게 가까이 오라 말했다. 주항, 장희, 하묵은 그의 대장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여 귀를 기울였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도성에 합류하는 잠복대를 확인한 후 행동강령과 정보 인수인계를 끝냄과 동시에 새 잠복대를 배치하고 진군하는 병사들을 따라 움직인다. 그곳 사정을 가장 오래 보았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너희의 이해도가 가장 좋을 것이다. 세 사람씩 움직이며, 가장 선두에 있는 자로부터 우, 혹은 좌로 오백리 떨어져 따라간다. 밤에 행군이 멈추면 더욱 다가가서 천막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며, 나에게 보고하기 위해 오는 자는 말을 타고 오는 것을 피하라 해라.”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 그에게 답했다. 상오는 그들의 어깨를 한 번씩 치며 말했다.




“다치지 않도록 해라.”




세 사람이 뛰어 나가자, 운강은 지도를 보다가 상오에게 다가와 말했다. 




“목표가 어딘지 생각해 보았다.”




“수성대장군이 막 빼앗은 그들의 땅을 수복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운강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기폭제는 맞지만, 이미 여러 번 침공을 해 본 그들의 처지에서 한나라에게까지 손을 벌려가며 쳐들어오는 건 뭔가 급하다는 느낌을 준단 말이야.”




상오는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설마… 대제…”




운강은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오는 의자를 가져와 앉으며 말했다.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보고받은 병력 양으로 볼 때 방어를 못 할 공격은 절대 아닙니다만, 시기가 확실히 꺼름칙하군요. 대제를 미루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래야…”




“아니다.”




운강이 상오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이번 대제는 기념비적인 의미가 크다. 유래 없는 영토 확장에 대한 국왕의 업적을 공고히 하는 일이야. 쉽게 대제를 포기할 리 없다. 졸본에 군사를 미리 보내 방어전을 치르는 게 통상적인 해결 방법일 거다.”




상오는 운강의 말에 끄덕였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보고드리러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굴을 나서며 한 병사에게 명했다. 




“졸본에 있는 첩보병들에게 군사의 움직임을 중점으로 살핀 후 사흘 후 잠정 복귀하라 명해라. 한 명도 더 잃을 수 없다.”



***



이튿날 정오, 왕은 국정을 끝낸 후 그곳에 마련된 정자에서 막근과 막덕의 학업을 검사하고 있었다.



황금의자 뒤에 봉황을 앉힌 국왕의 질문들에 막덕은 지겨운 듯 몸을 배배 꼬며 말하는 것마다 틀리는 반면, 막근은 단 한 번도 오답을 말하는 경우가 없어 왕은 물론이고 모든 궁녀가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검사가 어느 정도 끝나자 왕은 둘에게 물었다.




“너희에게 있어 가장 원하면서도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 




막근과 막덕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먼저 답한 것은 막덕이었다.




“영물이옵니다.”




왕은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영물? 봉황이나 적호와 같은 영물 말이더냐? 어찌하여 영물을 가질 수 없다 생각하느냐?”




막덕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답했다.




“영물과 이어진다 함은 영물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고 들었사옵니다. 헌데 숙부님의 적호는 지난날 저에게 으르렁대는 바람에 소자 뒤로 넘어질 뻔하였사옵니다.”




국왕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이 아비의 봉황에게 선택받으면 되지 않겠느냐?”




막덕이 막근을 째려본 후 말했다.




“그럴 일은 없다고 들었사옵니다.”




국왕은 막덕이 그런 문제까지 다 들었다는 것에 내심 놀라하며 가까이 오라 말했다. 막덕은 국왕에게 쭈뼛대며 다가갔고, 국왕은 작은 막덕을 무릎 위에 앉히고 말했다.




“적호는 지금 너의 숙부를 섬기고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분명 때가 되면 너를 등에 태우고 천하를 호령할 것이다.”




막덕은 입이 귀에 걸리도록 크게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적호가 저를 태울 것입니까?”




국왕은 막덕을 덩실덩실 무릎으로 태우며 답했다.




“그럼! 물론이지!”




막덕은 무릎 위에서 흔들거리는 것에 기분이 좋아 꺄르르 웃었다. 국왕은 막덕을 품에 안은 채 두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헌데, 너희 둘은 원래 더 많은 영물이 고구려를 지켰었다는 것도 들었느냐?”




막근은 고개를 숙이며 알고 있다는 행동을 취했고, 막덕은 눈이 반짝거리며 물었다.




“정말입니까? 더 있었습니까?”




국왕은 미소로 화답하며 막근에게 말했다.




“어디 막근이가 말해볼까?”




막근은 한 치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본래 고구려는 하늘 신의 손자이며 물의 신 하백의 외손자인 추모가 세운 나라이니만큼, 만물의 기운이 가득한 나라였습니다. 때문에 각 지역의 지신들이 그를 섬겼었는데, 이를테면 날개를 지닌 은빛 말 한필, 왕관과 같이 큰 뿔을 자랑하는 거대한 사슴, 그리고 집채만 한 덩치의 하얀 곰이 있었다고 들었사옵니다.”




국왕은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덕은 입에서 침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른 채 막근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국왕은 품에 안고 있는 막덕에게 물었다.




“그래. 잘 알고 있구나. 헌데 어질지 못한 이들의 행동으로 그 지신들이 우리 곁을 떠나기도 했고, 고구려를 위해 희생하기도 한 것이란다. 그러니까 본래 적호와 봉황 모두 신들이란다.”




막덕은 고개를 돌려 봉황과 눈이 마주쳤다. 윤기가 흐르는 적황색 깃털에 감싸인 채 빛을 발하는 붉은 동공은 막덕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평소에는 그저 색이 남다른 새지만, 국왕과의 교감이나 그의 지휘에 따라 몸에 불이 붙고 덩치가 자유자재로 커지기도 하는 이 동물이 신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새삼 위압감이 느껴진 그였다.



하지만 절대 저 봉황이 내 것이 될 수는 없겠지, 막덕은 생각하며 조금 주눅이 들었다. 




그때, 봉황이 선조의 못 입구 쪽을 바라봐 왕이 고개를 돌려보니 상오가 다가오고 있었다.



선조의 못은 본래 왕손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으나, 흑막대에게는 언제나 예외였다.



되려 그런 특성 때문에 그곳만큼 흑막대의 보고를 받기 좋은 곳도 없었다. 왕은 막덕을 무릎에서 내리고는 막근과 함께 물러가라 명한 뒤, 후궁들도 자리를 피하게 했다. 상오는 왕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은 뒤 예를 갖춘 뒤 보고를 올렸다. 




“전하, 위급한 소식이 있사옵니다.”




왕이 웃음기를 싹 뺀 채 봉황과 함께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 게냐.”




상오는 고개를 숙인 채 막힘없이 보고를 올렸다.




“현재 부여와 옥저 군이 한나라의 지원을 받아 졸본을 향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시간 상으로 볼 때, 늦어도 다음 주 안에는 도착할 듯합니다. 규모는 부여가 삼만 정도로 보이고, 옥저는 일만이 채 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되옵니다.”




국왕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가 물었다.




“흑막대는 총원이 얼마나 되느냐?”




상오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내심 놀랐지만 바로 답했다.




“일천 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왕은 손으로 곱게 정돈된 수염을 몇 차례 쓰다듬으며 먼 곳을 바라보다가 상오에게 명했다.




“너희 흑막대의 의복을 최대한 많이 준비해 놓거라.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 검은 천의 전투복을 최대한 끌어모아보거라. 내가 생각이 하나 있다.”




상오는 그의 왕에게 고개로 답한 뒤 그 자리를 떠났다. 왕은 상오를 무른 후 봉황을 손가락 위에 앉혀 자기 앞으로 데려와 쓰다듬으며 혼잣말했다.




“조만간 한 번 크게 힘을 써야 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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