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오는 궁에서 멀리 떨어진 뒷 산의 어느 기슭에 도착했다.
그는 능숙하게 나무 사이를 지나 어느 절벽 앞에 도착하자 절벽을 따라 걸었다. 곧이어 목재 문으로 잘 다듬어져 있는 동굴이 나왔고, 그는 그 앞으로 가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나무 문틈 사이로 눈이 보였다.
상오가 천으로 감싼 얼굴을 풀자 그 눈은 단번에 문 밖의 상오를 알아보고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열자 너댓명의 흑막병들이 그에게 인사를 올렸고, 상오는 그중 한 명과 함께 아래로 향해 있는 계단을 밟았다.
흙으로 되어 있으나 나무를 한쪽씩 댄 계단은 견고한 느낌은 절대 아니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곳을 모두 헐어야 하므로 그편이 맞았다.
양 벽에 걸려 있는 등불들에 의존해 내려가면서 그는 자신을 뒤따라오는 병사에게 물었다.
“북쪽에서 오고 있는 수성대군에 대한 소식은 있는가?”
“예. 평소보다 회군 속도가 빨라 현재 졸본을 통과한 상황입니다. 수성대군을 포함한 한백과 진당 모두 건강상태는 양호해 보입니다.”
병사는 기다렸다는 듯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들의 거처에 까마귀를 두 마리씩 더 붙여라. 왕명이다.”
“예.”
계단을 내려가자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넓은 세계가 펼쳐졌다. 등불과 화롯불로 가득한 굴 한쪽에는 흑막병들이 훈련을, 또 다른 한쪽에서는 대장장이들이 무기를, 또 어떤 곳에서는 지도가 걸린 벽에서 몇 명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흑막병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한쪽에는 어리기로는 10살짜리 아이부터 늙기로는 한나라 출신 대장장이가 올해로 70을 넘겼다고 한다.
그는 뛰어난 무기장인이었는데, 황제가 점찍어둔 궁녀와 함께 있는 것을 들켜 한쪽 손과 혀가 잘린 채 고구려로 도망온 것을 까마귀가 받아 준 것이다.
그의 재주를 알아본 운강은 그를 까마귀 굴(그들은 자기 부대를 그렇게 얘기했다.)로 데려와 그가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는데, 이게 그 이방인에겐 꽤 감동이었는지 자기 모든 지식을 총 동원해 흑막대의 사망률을 현저히 낮추기는 물론, 암살률도 높여주었다.
최근에 그가 개발한 폭탄띠는 손바닥만 한 폭탄이 달린 허리띠로 탈착과 동시에 심지에 불이 붙는 형식이었으며, 최대 4명 정도는 거뜬히 살해 가능한 위험한 무기였다. 상오는 대장장이에게 묵례로 인사를 건네며 지도가 있는 그 탁자 앞으로 갔다.
회의를 하던 이들 모두 상오를 보자 발을 붙이고 묵례를 하여 인사를 올렸다. 상오가 운강에게 물었다.
“국왕께서 수성대군을 경계하는 것이 점점 노골적입니다. 별일 없었습니까?”
“오늘 들어온 소식이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틀 전 산적 떼들에게 셋이 당했고, 신라와 백제 사이의 길목에 배치되어 있던 자들 스무 명이 당한 듯하다. 산적떼야 간간이 있는 일이니 그럴 수 있다만, 그 길목의 까마귀 둥지에 있던 자들은… 흠...”
그의 물음에 왼쪽 눈을 크게 가르는 흉터가 있는 운강이 입을 열었다. 흉터는 꽤 커서 머리까지 올라가 정수리 즈음에서 끝나는 흉터였다.
왼눈을 뜰 수는 있으나 하얗게 동공이 죽어 있었다. 그는 갑옷을 입고는 있으나 사실상 현장으로 나가진 않았지만 상오에게 가장 큰 힘을 실어 주는 자였다.
그의 스승이자, 선대 왕의 ‘왕의 까마귀’였다. 이제는 후임들에게 ‘외눈 까마귀’ 혹은 ‘흰눈 까마귀’로 불리는데 그가 대단한 군기반장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여자의 품이 그리웠던 몇몇 까마귀들이 도성의 주막에 밤 몰래 나가 술잔을 기울이다가 그에게 걸려 호되게 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수풀 속에 하얗게 떠 있는 흰 빛을 본 이후로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상오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늘 ‘죽이지 않은걸 보니 인력난이 심하긴 한가 보다.’ 라고 생각하곤 했다.
“스무 명이라 하셨습니까?”
상오는 귀를 의심해 운강에게 되물었다. 당장 까마귀굴에 있는 흑막병들을 모두 모으면 천 명이 조금 안 되지만, 부여 너머 북쪽의 평야까지 감시해야 하는 고구려의 세력을 생각했을 때는 절대 많은 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산적들에게 습격당하는 불운이 늘 함께하므로 늘 인원충원의 고충이 있는 흑막별동대였다. 그러니 스무 명이 한 번에 몰살 당했다는 것, 그 뛰어난 실력자들 중 단 한 명도 도주하지 못해 생존자가 남지 않았다는 것은 전에 없이 놀라운 소식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 모두 소백산맥에 있는 까마귀 둥지(흑막대의 잠복기지)에서 발견되었는데, 황급히 발 빠른 놈을 보내 시체를 확인해보니 원래 산맥을 타는 길을 관찰하던 이들이 다섯, 거기서 산맥을 넘어 동해안을 정찰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이들이 열. 게다가 그 둥지에 있던 모든 기밀정보들이 사라졌다. 흔적을 봤을 땐 누가 지내다 간 듯하다고 했다. 그 산세에도 말발자국도 꽤 있었다고 하더군. ”
운강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고민에 잠긴 얼굴로 마른 세수했다. 상오가 물었다.
“그 서류 어디에도 고구려라 적혀 있지 않아 다행이라 봐야겠습니다만… 스물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다섯이 비었습니다.”
운강은 상오의 말을 들었으나 바로 답하지 않았다. 말을 고르는 듯했다. 탁자에 계속 두드리는 그의 검지 손가락에서 상오는 운강이 평소 답지 않게 상당히 불안 해 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게 참 기이한 일이다. 그 다섯은 원래 신라 도성에 잠복해 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시체도, 연락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상오는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부터가 의심되어 운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가 알기로는 운강이 ‘왕의 까마귀’가 된 이래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일 전에 한 번은 탈영을 하기 위해 임무 도중 이탈한 자가 있었으나, 여기저기 배치된 까마귀들에게 붙잡혀 결국 이틀을 채 버티지 못 했다. 타 지역에서는 무조건 둘, 셋씩 움직이게 되어 있고 임무 외의 지역으로 이동 시 그 지역의 까마귀와 조우가 불가피하게 되어 있다.
결국 까마귀는 서로를 감시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잡혀갔다고 보기에도 어려운 것이, 까마귀들은 늘 청산가리를 지니고 있어 혹시라도 잡히는 일이 생긴다면 단번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맹세한 자들이었다. 이는 그들의 다섯 신조 중 하나인 [내가 보고 들은 것은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 에 일치하는 행동이었다.
“어디 잡혀가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이 흑막병이 말입니까? 아니면 설마 탈영병인 겁니까?”
상오가 묻자 운강이 벽에 걸린 한반도의 지도를 바라보며 그에게 말했다.
“탈영병일 가능성은 적다. 그 다섯은 내가 직접 키운 놈들이라 내가 잘 알아. 마음대로 움직일 놈들이 절대 아니고, 까마귀굴을 사랑하는 놈들이다. 게다가 먼 길이고 연락도 쉽게 전해지기 힘든 곳이니만큼 실력이 좋은 놈들로 보내 알아서 잘 처신하게끔 했다.”
상오는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회의용 탁자에 운강과 함께 있던 이들에게 모두 물러가라 한 뒤 운강과 단둘이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그렇다면 스승님께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 겁니까?”
운강은 탁자 위 녹쇠그릇에 담겨 있던 호두를 바싹 마른 손으로 꺼내 손안에서 놀리며 답했다. 그가 답답할 때 으레 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낮게 내더니 벽에 걸려 있던 세력도를 가져와 탁자에 펼치며 말했다.
“봐라, 신라에서 백제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보통 소백산맥을 그대로 뚫어서 통과하지, 그 산맥을 번거롭게 올라타서 이동하진 않는다. 그건 백제의 도성에 되려 돌아가는 길이야. 근데 내가 확인해 보니 그 산맥의 북쪽에 위치한 까마귀들은 어떤 이상한 여행객도 발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은, 백제를 거치지 않고 아예 우리 고구려로 들어올 심산이었던 것은 또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고로 이들은 소백산맥을 타고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서 백제의 한성 방면으로 꺾어 들어갔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 까마귀들의 시체가 알려주는 길은 그렇게 보여지는 구나.”
상오는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지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고구려에 협력자가 있어서 여기로 들어왔을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운강이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마 그와 같은 생각했다는 데에 대한 대견함이었을 것이다. 그는 허리를 피며 답했다.
“안 그래도 그 경우를 생각해 오늘 아침에 고구려 남쪽 외곽에 물어 봤다. 혹시나 해 옥저쪽에도 까마귀를 보내 그 둥지에 확인해봤으나, 특이한 소식은 없었다고 하는구나.”
상오는 그 얘기를 듣고 잠시 고민하고는 일어나 훈련병 교관을 불러 손짓하고는 그가 다가오자 말했다.
“2분대에 허진, 4분대 유창, 5분대 미욱과 방추가 바로 파견 가능한가?”
교관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유창은 아직 다섯 해를 채우지 못해 불안 합니다.”
상오가 교관의 어깨를 치며 미소 지었다.
“허진에게 견장을 달아주고 그에게 배우게 하면 상당히 유능해질 거다. 일단 다른 곳은 몰라도 도성에 자리를 비울 순 없으니 내일 해가 뜨기전에 파견을 보내도록 하고, 그 네 명은 지금 파견식을 해야겠다.”
교관이 고개를 숙여 답한 후 쩌렁쩌렁한목소리로 호명하자 네 사람이 황급히 상오 앞으로 와 일렬로 섰다. 상오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아침 까마귀가 여럿 떨어졌다는 소식은 들었을 것이다. 고로 너희들이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신라의 도성으로 가서 임무를 시작한다. 본래 다섯을 보내야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넷만 보냄을 이해해라. 파견식 순서는 다 알고 있겠지?”
그가 유독 외소해 보이는 작은 소년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소년은 상오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다가 옆에 서 있는 황소같은 덩치의 허진이 옆구리를 치자 큰 소리로 외치듯 그렇다고 답했다. 상오는 유창이란 이름의 그 소년의 어깨를 호기롭게 치고는 뒤로 조금 물러나 외쳤다.
“오늘부터 나는!”
상오의 선창에 네 명은 목에 핏대가 서도록 우렁차게 후창했다.
“고구려의 눈이오, 고구려의 귀가 될 것이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은!”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
이 부분부터 유창은 글자가 하나씩 엇나거나 눈치를 보느라 후창이 조금씩 늦었다. 하지만 상오는 개의치 않았다. 이미 운강이 죽일 듯한 눈으로 유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낮에 몸을 낮추고!”
“밤에 움직인다!”
“내 모든 감정은!”
“고구려의 것일지니!”
마지막에는 다섯 모두가 한 번에 외쳤다.
“고구려의 무한한 영광을 위하여!”
상오는 우렁차게 말했다.
“금일 여기 네 병은 이 굴을 떠나 신라 도성으로 향한다! 허진을 필두로 유창, 미욱, 방추가 동핸한다! 사흘에 한 번씩 전령보고를 하며,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직접 보고를 하도록 한다!”
그때, 운강이 준비된 듯 사각 진 그릇에 작은 주머니들을 담아 상오에게 내밀었다. 상오는 그 그릇을 받아 주머니를 하나씩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이는 자결을 위한 가루약이 들어 있으며 터트릴 시 이 가루를 흡입한 모두가 피를 토하며 즉사하게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허진에게 가루주머니를 건네며 상오는 말했다.
“잘해 줄 거라 믿는다.”
허진은 굴 안의 누구보다 가장 오랜 기간을 훈련병으로 지내던 중이었기에 이 순간이 감격스러웠다. 그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것을 침으로 삼키며 우렁차게 답했다.
“고구려의 무한한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약식 파견식을 끝낸 상오는 그들을 해산했고, 그들이 무기를 포함한 장비들을 지급받기 위해 대장장이에게 다가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파견식을 할 때마다 뿌듯함과 동시에 미안 함을 느끼곤 했는데, 살아돌아오는 자가 반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운강은 그릇을 다시 원래 자리에 놓고는 상오의 어깨를 툭 치며 따라오라는 손짓했다.
상오는 그를 따라 굴 밖으로 나갔다. 굴에서 그리 머지않은 곳에 작은 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곳에서 둘은 나란히 박혀 있는 큰 돌에 앉았다. 이 자리는 상오가 첫 임무를 나가기 전 어렸을 적부터 운강과 함께 자주 찾곤 했던 자리다. 운강은 자리에 앉아 다리 사이에 있는 풀무더기에서 작은 돌멩이를 하나 주워 손에서 쥐락펴락 하기 시작했다.
상오는 옆에 앉아 흐르는 천을 바라보며 운강이 대체 무슨 생각하는지 쫓아가려 했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던 중 말을 먼저 꺼낸 건 운강이었다.
“국왕께서는 어떠시냐.”
운강의 물음에 상오는 눈빛이 무거워져 시선을 깔며 답했다.
“예전만큼 정정하진 못하십니다. 나날이 흰 머리가 많아지시고, 목소리에도 슬슬 금이 가는 것이 보입니다.”
운강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게 여간 쉬운 일이겠냐. 세자들은 주변의 기대에 미치지 못 하는 데에다가 너를…”
운강은 말실수를 한 듯 말을 하다 말고 상오를 바라보았다. 상오는 운강이 하려는 말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도 들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말을 경청했다.
“너를 옆에 두고도 제대로 대접해주지 못 하는 것도 큰 짐일 수 있을 것이다.”
운강이 못다 한 말을 뱉음과 동시에 상오는 자기 다리 사이에 있던 풀무더기를 한 움큼 뽑아냈다. 그는 곧 손을 털어내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절 죽이지 않으신 것만 해도 영광 아니겠습니까.”
운강이 껄껄껄 하며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맞는 말이다. 널 처음 나에게 맡기러 오셨을 때 저 동굴 안의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몰랐지. 이곳은 또 어찌 아셨는지…”
상오는 그의 웃음소리가 참 좋아서 따라 미소 지었다. 운강은 바닥에 있는 돌을 계속 고르며 말했다.
“네놈이 열다섯 때 즈음이었나. 다른 놈하고 다툰 후 나에게 찾아와서 하는 말이 애미 없는 놈이라 놀림 받았댔나? 그러면서 나한테 지 애미를 찾아가겠다고 울면서 화를 내던 적이 있었지.”
“그때 제 뺨을 처음 때리지 않으셨습니까.”
상오가 웃으며 답했다. 운강은 전보다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럼.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해야 맞지. 왜 그런지도 말해줬지 아마?”
그 물음 직후에 둘은 말을 맞춘 듯 동시에 말했다.
“니 애미가 살아 있는지 조차 모르는데 누굴 찾아가겠단 말이냐.”
상오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풀을 하나씩 뜯는 데에 반해 운강은 입을 크게 벌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1,2분가량을 그렇게 웃고 난 후 운강은 눈물을 닦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세자들을 볼 때 마음이 어떠하냐.”
상오는 허리를 뒤로 펴 하늘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아무 생각 없습니다. 그들에게 저는 없는 사람이고, 저에게 그들은 그저 지켜야 할 왕실일 뿐입니다. 뭐 밉다거나, 서운하다거나 하는 생각은 일절 없습니다. 게다가 언젠간 제가 모셔야 할 국왕이 될 왕손이니…”
운강은 그 말을 듣고 지금까지 골라냈던 돌 중 가장 매끈하게 생긴 돌을 손에 쥐며 말했다.
“그래. 좋은 자세다. 그래도 한 번씩 물어보면 바로바로 답하니 내 마음은 편하구나.”
그는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기 위해 잠시 뜸을 들였다. 예전엔 고구려에서 가장 가는 암살자이자 왕의 검은 손이었지만, 이젠 그나마 보이는 한 눈도 제 역할을 다 했는지 흐릿하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옳았는지 모르겠구나. 너에게…”
“아버지가 왕이라는 것 말씀이십니까.”
상오가 그의 말을 끊었다. 운강은 술에 취하거나 이렇게 잠시 옛날얘기를 할 때면 꼭 그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상오는 그가 이제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여타 다른 노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안다. 그는 운강을 바라보며 눈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제 핏줄이 국왕의 것일지는 몰라도, 저는 스승님을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까마귀로 살 것입니다.”
운강이 돌을 귀찮다는 듯 던졌다. 돌은 천을 향해 계속 굴러 갔으나 결국 천에 빠지지 않고 그 직전에 멈추어 자리했다.
“그래… 네놈에게는 그 또한 복이지…”
수풀 소리가 나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더니 흑막병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날세게 발을 놀려 그들 앞에 선 그 흑막병은 허리를 굽혀 둘에게 인사한 뒤 상오를 보며 말했다.
“타국에서 고구려를 치기 위한 군사를 대규모 징집하고 있다는 전갈이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