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의 승리가 퍼진 고구려는 이미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앞으로 식량난과 침략에 대한 걱정은 없을 것이라 떠들었고, 시장에도 벌써 활기가 불어넣어졌다.
태조의 업을 기리는 시가 유행을 탔고, 수성의 전투를 본따 만든 탈춤은 장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볼거리가 되었다.
전투를 묘사한 광대는 붉은 천과 호랑이탈을 쓴 채 춤추는 다른 광대들 옆에서 날이 다 문드러진 칼로 전쟁을 주도하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수성의 위대함을 설파하고 다녔다.
궁에서도 수성의 업을 기리기 위해 한창 축제를 준비 중이었다.
본디 10월마다 고구려에는 대제라 하여 1년 중 가장 큰 축제가 열렸는데, 여러 무술가들의 시합과 화려한 볼거리들이 주 행사였다.
말하자면 대제는 고구려의 유일한 명절이었으며, 타국에서 온 떠돌이 상인들도 고구려의 대제에서는 큰 몫을 챙겨 갈 수 있었다.
매년 크고 작은 승전보를 들어왔던 고구려 국민들이었지만, 이번 전투로 인한 기록적인 승리는 올해의 대제가 더 큰 의미를 지님을 알 수 있었다.
그 기대에 부흥하듯 국왕은 국민들에게 쌀과 고기를 배포하라 명하였고, 모두가 참가할 수 있는 대제의 인기 종목 무투제의 우승 상품을 작년보다 더 큰 규모로 준비하라 지시했다.
“내일이면 수성대군이 도착할 것이다.”
국왕이 궐 밖에 모인 신하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황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있었다.
5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신하들은 동시에 절을 올림으로써 그의 말에 답하였다.
국왕의 오른편 뒤에는 그의 호위무사 상오가 중무장한 채 서 있었는데, 아무도 그가 눈을 깜빡거리기라도 하는 것을 본 적 없으며 늘 왕의 더러운 일을 대행한다 하여 ‘왕의 까마귀’라고 불렸다.
그는 8척은 되어 보이는 큰 키에 새하얀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새하얌이 기생들의 새하얌과는 결이 달라 마치 이미 생기가 날아간 죽은자의 얼굴과 같이 창백했다.
깊게 패여서 길게 뻗어 있는 바늘같은 눈초리는 그의 영민함이 잘 느껴졌으며, 깔끔하게 정리된 수염은 그가 수염조차 전투에는 방해된다며 직접 밀어 버린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상오는 그의 별칭 ‘왕의 까마귀’에 걸맞게 국왕의 직속 별동대인 흑막대의 대장이었다.
그는 그 어떤 신하와도 대화를 나눌 수 없었으며, 왕에게 자기 소견을 말하거나 티조차 낼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왕의 검은 손으로써 왕의 지시를 행할 뿐이었다.
왕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수성대군을 맞이하고 공을 치사하는 것은 간촐히 진행토록 하고, 사흘 후에 대제가 열릴 수 있도록 준비에 만반을 기하거라.”
신하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퇴장하였다. 몇몇 신하들은 할 말이 있어 보였으나, 자연스레 다른 자들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국왕은 그 모습을 확인한 뒤 손을 내저어 신하들을 내보냈고, 곧 그의 옆에 서 있는 상오와 봉황만이 남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며 지시했다.
“막덕과 막근을 내 침소로 들라 하거라.”
그의 말과 동시에 왕을 뒤 따르던 한 신하가 고개를 조아려 답한 뒤, 재빠르게 궁궐 밖으로 나갔다. 상오는 국왕의 뒤를 따라갔다.
“너의 서한은 잘 받았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사실이라고 믿어도 되는 것이겠지?”
국왕이 걸음을 옮기며 말하자 상오가 답했다.
“분명 그 두 분의 대화를 들은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국왕은 자기 침소에 다달았고, 문 양쪽의 궁녀들에 이해 침소의 문이 열리자 국왕은 상오를 제외한 모두에게 나가라고 명한 뒤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수성과 그의 심복들에게 한동안 더욱 집중하여라. 조만간 큰 전투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계속 자극을 주었으니, 그들도 슬슬 반격을 하려 하겠지. 너는 그 전투에 임하지 않고 지금처럼 나의 눈과 귀가 되어 소식을 가져와라. 타국에서는 어떤 일이 있느냐.”
상오는 자리에 앉지 않은 채 막힘없이 대답했다.
“부여의 해시왕이 한나라에 다시 한번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몇 해 전부터 그가 꾸준히 한나라에 무언가 부탁하는 듯한 행태가 계속 포착되고 있습니다.”
왕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고집불통인 해시왕은 어떻게든 이 나를 밀어내고 다 차지하려 하는구나. 당장 고구려의 징병 수를 늘려야겠다.”
상오는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 다시 입을 뗐다.
“타국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수성대군께서 포로를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베어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북쪽의 산적떼가 최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국왕은 그 소식에는 첨언하지 않고 계속해서 창밖을 주시하다가, 알았다는 듯이 손을 들어 상오를 물러가게 했다.
상오가 물러가고 문이 닫히자 왕은 한숨을 얕게 쉬었다.
상오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두 젊은 사내가 국왕의 침소에 들어왔다. 두 사내 모두 새하얀 얼굴에 복사꽃 빛깔의 입술을 지니고 있었으며, 얇고 길게 뻗은 눈썹과 도깨비와 같은 반달 모양 눈매는 국왕의 그것을 빼다 박은 듯했으나 둘의 느낌은 또 사뭇 달랐다.
첫째 아들인 막덕은 올해로 15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나이에 맞지 않게 키가 컸으나 무예를 즐기는 성정은 아니어서 빈약한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총명함은 분명하게 국왕의 그것을 닮아 많은 학자들이 국왕에게 막덕을 칭찬하곤 했다.
둘째 아들 막근은 아직 열 해도 넘기지 않은 핏덩이였다.
짙은 눈썹과 힘이 가득 들어간 눈빛, 장난기가 가득한 앵두 같은 입술과 같은 또래 아이들보다 다부져 보이는 모습은 먼 훗날 나라를 빛낼 장군의 기개가 충분한 모습이었다.
또한 궁 내에서 말썽을 부리고 다니는 모습이나 아이스러운 무지함이 영락없이 자기 어린 시절 같아 국왕은 막근에게 더 기대하는바가 컸다.
그렇다고 막덕을 외면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막근에게 왕위를 넘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그였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할 때면 언제나 수성의 얼굴이 떠올라 그는 남 모르게 신음을 내뱉곤 했다. 수성과 막덕, 수성과 막근. 어떤 모습도 쉬워 보이지 않았다.
국왕은 둘의 인사를 받고 얼굴에 미소가 가득해 두 팔 벌려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들거라. 오늘은 무얼 하고 있었느냐.”
두 세자는 자리에 앉았다. 막근은 당장 자기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었지만 이제 곧 10살이 되니 참는 표정이었다.
형 막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뭇 전과 달라지는 바람의 흐름이 마음에 들어 선조의 못 언저리에서 시를 쓰고 있었습니다.”
국왕은 애정이 가득한 웃음으로 막덕을 바라보았다.
선조의 못은 고구려의 왕가가 대대로 지켜져오고 중요한결정을 내렸던 곳이다.
궁 뒤편에 위치한 못은 언제나 다섯 가지 색의 꽃들이 테두리를 감싸고,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못을 햇빛으로부터 지켜 주고 있었다.
이미 몇 대는 전부터 그곳은 따로 벽을 세워 외부의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엄함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오로지 18세 아래의 아름다운 처녀들만이 왕명 아래 그곳을 관리할 수 있었다.
못 옆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정자에는 화려하게 금으로 뒤덮인 의자가 못 방향으로 놓아져 있었는데, 의자 아래로 빈 공간이 있어 여름에는 시원한 물을 담아 두고, 겨울에는 불을 떼어 의자를 따뜻하게 할 수 있었다.
이 못을 관리하는 여인들은 언제나 이 의자가 최적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못 관리 만큼이나 주된 업무였다.
과거 태조도 아버지로부터 다음 왕의 자리를 수성이 아닌 자신에게 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자리가 바로 그 정자 앞이었다.
아마 수성도 같은 자리에서 아버지로부터 그가 왕이 되지 않을 것을 들었을 것이다.
“또한 이제 저희 영토가 된 곳들의 토양과 지형을 고려하여 식자재를 포함한 여러 것들을 운반할 때 조금 더 튼튼한 운송 수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학자들과 함께 그 방안을 심토중이었습니다.”
막덕은 말을 마치며 고개를 조아렸다. 국왕은 뿌듯한 마음에 어떠한 말도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막근은 그런 국왕의 표정을 보며 약간의 시기를 느낀 표정으로 더 크게 말했다.
“어바마마! 소인이 오늘 잡은 노루의 수를 알면 분명 놀라실 것입니다!”
국왕은 고작 아홉 살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체구의 막덕을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하냐? 어디 말해 보거라.”
막덕은 들뜬 기분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이어 말했다.
“소인은 오늘 궁 뒤편 깊은 산에 오로지 활과 화살만을 지닌 채 들어갔사옵니다. 그곳에 예로부터 농작민들을 괴롭혀온몸집이 큰 산노루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옵니다.”
“노루가 농작민들을 괴롭힌다는 것이냐?”
막근이 막덕을 보며 물었다. 막덕은 한 껏 뾰로통해진 표정으로 자기 말을 끊은 형을 노려보았다.
국왕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그래서 어찌, 그 노루를 볼 수 있었느냐?”
막덕은 다시 손을 휘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정말 집채만 한 노루가 산기슭에 있었사옵니다. 소인이 그 노루의 급소를 정확히 조준해 활시위를 당기니 어찌 그 노루가 멀쩡히 달아날 수 있었겠사옵니까?”
국왕과 막근은 이 조그마한 수다쟁이가 사랑스러워한참을 박장대소했다.
막덕은 자기 영웅담에 스스로가 뿌듯해 덧니를 내보이며 형과 아버지와 함께 웃었다. 국왕은 한참을 웃느라 난 눈물을 닦으며 본론을 꺼냈다.
“근아. 올해 대제가 이제 사흘 후인 것을 알고 있느냐.”
“네. 이번엔 정말 성대할 것이라 들었사옵니다.”
막근은 허리를 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올해 무투제에 출전하도록 해라.”
“어바마마. 허나 소인은 잘 아시다시피…”
평소 책과 붓만 끼고 살던 막근을 국왕이 모를리 없었다. 막근은 국왕의 말에 놀라 항변하려 했으나 그를 바라보는 국왕의 눈빛을 읽었다. 그것은 어명이었다.
“예. 준비토록 하겠사옵니다.”
“자기 부족함을 알면서도 채우지 않으려 함은 네 혼자는 문제 되지 않을 수 있으나, 넌 그리하면 안 되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 말이 맞느냐.”
“예. 지당한 말씀이옵니다.”
국왕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막근의 얼굴에 드리우는 걱정을 모른 채 할 수는 없었다.
“대진은 걱정 말라. 이 아비의 말이 곧 법이지 않느냐. 넌 그저 최선을 다해 준비해 주길 바란다.”
“감사하옵니다. 소인,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막덕이 아버지와 형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어바마마! 소인도 출전하고 싶습니다!”
국왕은 어린 막덕이 그저 사랑스러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덕이 네가 출전하면 우승은 정해진 일인데, 무슨 용기로 다른 이들이 출전하려 들겠느냐. 아서거라.”
막덕은 역시 라고 생각하는 표정으로 국왕을 향해 웃었고, 국왕은 두 아들을 무른 후 문 밖의 신하를 불렀다.
“이번 무투제는 목검을 사용하는 것으로 하라. 그리고 무투제가 열리는 동안 올해는 특별히 더 많은 어의를 그 주변에 모두 대기 시키도록 하라.”
어명을 받은 신하는 뒷걸음으로 왕의 침소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