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해가 채 제자리를 찾기도 전에 땅은 무섭게 진동하며 먼지를 날리고 있었다. 고구려의 보병들은 진열을 유지한 채 평야를 지나 강을 건너고 있었다.
먼 고국의 땅을 벗어나 전투를 치르기 시작한 지 어느덧 두해 하고도 반년이 되어가고 있었으나, 그 기세는 마치 어제 진군을 시작한 마냥 창천하고 있었다.
한백은 가장 앞서 강 건너의 땅에서 넘어오는 군사들을 향해 말을 돌렸다. 그는 느릿느릿한 병사들을 탓하듯 외쳤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오늘이 이번 전투의 가장 중요한 날이 될 것이다!”
허리까지 차오르는 강을 무거운 갑옷으로 무장한 채 건너려니 병사들은 강 건너에 가까워질수록 속도가 더뎌졌다.
더군다나 강 바닥이 밟을수록 질어져 뒷 행렬의 진군은 더욱 지체되었다. 수성은 한백이 이끄는 첫 진의 뒤에서 제 2진을 이끌며 강을 건널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제와 같이 강 건너 먼발치를 주시하며 오늘 있을 전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서쪽으론 산맥이 병풍을 치고 있으며 그 아래로 내려오는 강줄기가 동남쪽을 향해 있었다. 그 강줄기 덕분에 고구려는 이 비옥한 땅을 얻음과 동시에 외부의 적들로부터도 산맥을 끼고 방어가 가능하게 될 것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고구려가 북쪽으로 가장 넓게 확장할 것이란 점은 수성에겐 참을 수 없는 멋진 명패였다.
때마침 날씨도 한껏 쾌창했기에 그는 어제와 같이 무리없는 전투를 예상하며 이미 이곳을 사수하기 위해 건설할 요새의 위치를 고민하고 있었다.
한백의 제 1진이 강을 전부 건너고 이제 수성을 선두로 한 2진이 강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그 순간, 괴성과 함께 땅이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서쪽 산맥을 타고 내려오는 큰 무리의 야만족이 말을 탄 채 그들을 향해 돌진 중이었다.
한백은 그를 향해 돌진하는 적들이 반가운 듯 입꼬리를 올린 후 부대를 향해 외마디를 외쳤다. 그의 명을 들은 방패병들은 강을 등지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아 방패를 땅에 꽂았다.
그사이로 창병들이 방패 사이로 창을 내밀었다. 한백은 군사들 앞에 위치하며 등에서 도끼를 뽑았다.
“제 2진이 강을 다 건널 때까지 버틴 후 반격한다!”
그의 지시에 응답하는 군사들의 함성을 들은 후 한백은 수성을 되돌아봤다. 수성 그조차도 강을 미처 다 건너지 못한 상황이었다.
한백은 손에 침을 뱉어 도끼자루를 부여잡으며 혼잣말했다.
“오늘은 어제보다는 재밌겠구나.”
야만족들의 기마병들이 사정권 안에 들자 한백의 궁병들이 그의 신호에 맞춰 공격을 개시했다.
적잖은 적들이 화살에 무너지며 뒤엉켰다.
하지만 이어오는 야만족들은 멈추지 않고 돌진했다. 두 진영의 사이는 점점 좁아졌고, 마침내 격돌했다.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지고,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이 강을 울렸다.
한백은 단번에 적을 베어나가며 자기 뒤에 있는 수성을 향해 아무도 접근 못하게 했다.
방패병들과 창병들이 뒤엉켜 싸우고, 궁병들이 칼을 꺼내 들어 백병전에 가세하기 시작했을 때 천둥과 같은 굉음이 울렸다.
야만족의 말들은 그 소리에 놀라 일어섰고, 순간적으로 모두가 경직되어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수성이 강을 건넌 것이었다.
적호의 입에는 야만인이 물려 있었고, 그 피가 적호의 턱을 타고 떨어지고 있었다. 야만족은 물론 아군조차 그 패기에 눌려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수성은 눈에 불을 켜고 자기 창을 고쳐잡으며 낮게 말했다.
“네놈들의 장난질은 이게 전부인 게냐.”
야만족이 탄 말보다 족히 세배 크기의 적호가 뛰어오르며 전투는 양상이 바뀌었다.
적호로 인해 겁을 먹은 말들이 제멋대로 날뛰며 야만족을 땅에 떨어트리기 다수였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수성의 기세에 전과같이 공격하지 못했다.
비등비등했던 전세가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하자, 야만족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적을 쫓아라!”
한백의 지시에 병사들은 더욱더 기세가 올라 야만족을 쫓았다. 야만족은 다시 산맥으로 달아나지 않고 강을 오른편에 끼고 강줄기를 따라 달아났다.
수성도 적호를 탄 채 한백과 함께 적을 쫓았다. 하지만 그는 달리던 중 무언가 큰 소리를 듣고 놀라 멈췄다. 강 중류에 야만족이 만들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둑이 터진 것이다.
계략이었다. 터져 나오는 물줄기를 보고 수성이 야만족을 보니, 말에 탄 채 달아나던 야만족이 곁눈질로 그를 보며 미소 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야만족은 방향을 틀어 산맥을 향해 달아났고, 물줄기는 거센 속도로 강가의 고구려군을 덮치려 했다.
그 용맹한 한백조차 놀라 달아날 생각도 못 하고 굵은 물줄기만 바라보던 그 찰나, 맑은 메아리가 산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지진이 일어나며 강 하류에 위치한 땅이 갑자기 일어났다. 수많은 크고 작은 돌들이 일어나자 강줄기는 속도가 늦춰졌고 곧 계곡을 이루었다.
수성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지 못해 사방을 두리번거렸고 전초기지 쪽 언덕에 홀로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진당을 보았다.
수성은 자기 스승이 얼마나 도술에 능통한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전투의 목적으로 쓰이는걸 반기지 않아 자주 보긴 힘든 일이었으나, 고구려에 거의 유일한 도인인 진당은 분명 수성의 군사력에 큰 재산이었다.
진당이 어떤 능력을 갖춘지 다 아는 자는 없으며, 이번과 같은 경우에도 그가 땅까지 다룰 수 있었는지 수성은 몰랐었다.
수성은 그를 향해 창을 들어 올리며 감사를 표했고, 한백을 포함해 모든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그에 맞춰 수성의 제 2진이 전부 강을 건너 진열을 재정비했고, 한백의 1군과 함께 산맥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야만족 잔당들을 향해 돌진했다.
진당은 아군들이 무사히 재정비 한 모습을 본 후에서야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병사들이 다가와 진당을 부축했고, 진당은 부축을 받으며 자기 천막으로 향했다. 두 병사들이 그를 침상에 앉히고 천막을 벗어났고 진당은 기진맥진해져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내쉬었다.
그는 곧 목이 말라 고개를 숙인 채 간이 침상의 옆에 두었던 물병을 찾아 손을 더듬었다.
“목이 타느냐.”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진당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침상 맞은 편 어두운 곳에서 들렸던 것이 분명했다. 진당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찌푸렸다. 누군가가 침소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그늘진 곳이어서 무릎만 빛에 닿았다.
“게 누구냐?”
그가 물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대답이 없었다. 몇 초간의 침묵이 이어진 후, 의문의 사내는 다시 진당에게 말을 걸었다.
“네놈이 배운 도술이란 것은 인간의 의지가 자연의 우위에 있다고 하더냐”
연이은 의문의 목소리와 함께 갑작스러운 황금빛이 침소를 밝혔다. 진당은 자기 앞에 누가 있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폐…폐하!”
진당은 침상에서 미끄러지듯 바로 절했다. 그의 맞은편에는 무장하지 않은 자가 자기 정체를 숨기려는 듯 모포로 몸을 감싼 채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존재를 진당이 바로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깨에 좀 전의 황금빛을 발한 봉황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봉황은 불에 휩싸인 채 그의 어깨에 앉아 진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당은 어찌나 놀라고 겁을 먹었는지 온몸이 사시나무와 같이 떨리고 있었다.
모포에 가려져 코 아래에서부터 보여지는 국왕의 용안은 실로 근엄했다.
큰 숲을 이룬 것과 같이 수북하지만 결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배꼽께까지 내려와 있는 흰 수염과 무겁게 닫혀 있는 입술, 그 입술의 틈으로 울리는 국왕의 음성. 그는 고구려 그 자체였다.
국왕은머리를 덮고 있던 천을 걷고 진당을 바라보았다.
무겁게 뻗어 있는 굵은 눈썹 아래로 실같이 길게 뻗어 있는 눈, 그 안에 침착하지만 강력하게 빛을 발하는 눈동자가 보였다.
미간에 산맥처럼 찌푸려진 살은 그의 표정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했다. 그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는 표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떤 명을 내리더라도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국왕은 진당에게 물었다.
“진당. 짐이 물었느니라.”
“예! 폐하..!”
진당은 고개를 더 깊이 숙이며 답했다.
“송구하옵나이다. 전하! 부디 천벌을 내려주시옵소서!”
국왕은 천천히 손을 올려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대는 여전히 수성을 물가에 내논 아이와 같이 바라보는구나…”
진당은 진즉 자기 항변을 떠올렸으나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왕이 어떤 생각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천막 밖에서 넓게 울려 퍼지는 함성이 들렸다. 고구려군의 승리였다. 적호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고 병사들의 함성이 더욱더 높아졌다.
국왕은 자기 어깨에서 황금빛 빛을 발하는 봉황을 쓰다듬어 그 빛을 죽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직 절을 하는 진당을 내려보았다.
“자연에만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니라.”
국왕이 말하며 몸을 천막 출구 쪽으로 틀자 검은 값옷으로 중무장한 두 병사가 천막 문을 걷어 올렸다. 검은 갑옷의 병사들은 국왕이 비밀스러운 일을 행할 때 호위하거나 지시받는 국왕의 직속 별동대인 흑막대였다. 국왕은 천천히 빛이 드는 천막 출구 쪽을 향하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진당은 국왕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절로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국왕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치는… 어길 수 없는겠지.”
진당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말의 화살이 누굴 향하는지 진당은 알 수 있었다. 국왕은 어제 자신과 수성의 대화를 들은 것일까. 도대체 국왕은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생각하는 걸까. 국왕은 두건을 젖혀져 있던 두건을 머리에 쓰고 조용히 천막을 나갔다. 진당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빌어먹을 까마귀들’
그는 이렇게 멀리 있는 자신조차도 왕의 까마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에 뒤늦게 분개했다.
고구려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의 그늘이었다.
그는 수성에게 이를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 수성에게 또 다른 근심거리나 화를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진당은 무릎에 손을 대며 힘겹게 일어났다.
그는 힘겹게 침상 옆 작은 의자에 앉아 자기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그가 한창 도술을 배우던 때가 떠올랐다. 왕의 말이 옳았다.
이러려고 배운 도술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에게 도술을 알려 준 도사들은 그 처럼 누군가를 섬기거나 어떠한 나라에 몸을 담지도 않았다.
하지만 진당은 그들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기에 그곳을 떠났다. 그는 세상에 정의를 세우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날 밤 결국 잠에 편히 들지 못했다.
지금 자기 행보가 정말 옳은 것일까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