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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콘 Sep 08. 2023

[차대왕] 적호

 빈약해 보이는 나무집들과 울타리들이 모두 넝마가 되었다. 300명이 채 안 되었던 마을 주민들은 오늘부로 10명도 남지 못했고, 그마저도 동아줄에 감겨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 앞에 서 있는 병사들은 잘 다듬어진 갑옷과 무기로 무장되어 있었는데, 고작 천 쪼가리나 입고 있던 마을 주민들에게는 분명 과한 상대였을 것이다.



사방에 작은 불씨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운 좋게 살아남았으나 주인을 잃은 가축들은 엎어진 여물통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집주인이었던 자들은 이미 죽은자와 곧 죽게 될 자로 나뉘었고, 한바탕 광기가 휩쓸고 간 자신들의 거처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남녀노소와 관계없이 모두가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가족들의 시체를 안아보지도 못한 채 손이 등 뒤로 묶여 무릎이 꿇려 있었다. 




 “정리는 끝났느냐.”




굵고 진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리자 병사들은 일제히 대열을 맞추고 잡담을 멈추었다. 곧이어 대열이 양 갈래로 나뉘었고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포로로 잡혀 있던 마을 주민들 중 한 명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마주한 것은 침을 흘리며 그를 향해 으르렁대고 있는 거대한 호랑이였다.



붉은 줄무늬를 지닌 이 호랑이는 적호로 불렸으며, 북방 전역에 공포의 대상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호랑이 그 자체가 공포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호랑이를 타고 있는 수성이었다.



그의 무자비함은 북방 이미 이름만으로도 아이를 울릴 만큼 널리 퍼져 있었다. 심지어 북방국 부여에서는 으레 그가 타고 다니는 적호도 그보다는 인자할 것이라 말했다. 포로는 고개를 조금 더 들어 올려 적호 위의 얼굴을 보고자 했다.



수성은 짙고 날카로운 눈매로 폐허가 된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칠흑 같이 검은 수염이 그의 턱을 전부 감싸고 있었고 굳게 다문 입은 산이 내려앉을 만큼 무거워 보였다.



콧대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 있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검은 눈동자는 그의 차가운 심성을 보여 주었다.



나아가 금수가 놓여 그의 황토빛 철갑은 그가 또 하나의 붉은 호랑이로 보이게 했다. 그의 투구에는 은빛 호랑이의 얼굴이 수성의 미간에서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포효하고 있었다. 




“예. 이들은 무기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 출처를 심문해 보려 잡아두었습니다.”




그의 왼쪽에 있던 한백이 말 위에서 포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성하고 제멋대로 자란 수염에 도깨비의 눈을 한 그는 수성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정도로 가벼운 갑옷이었지만, 그의 덩치가 산과 같다는 소문에 걸맞게 큰 몸집을 지녀 완전 무장한 수성에 뒤처지지 않는 풍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편날도끼는 본디 언월도였으나, 한백은 창을 짧게 만들어 도끼처럼 휘두르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창이 짧아졌다해도 보통 사람에게는 양손으로도 벅찰 무겠지만 그에게는 한 손으로 휘두르기에 딱 좋은 정도여서 한백이 가장 애용하는 무기기도 했다.



그의 도끼 날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본 포로는 날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좀 전에 죽은 자기 노모의 피가 아닐까 생각했다.



수성은 한백의 말을 들으며 포로들을 내려다보았다. 한백과 달리 수성의 몸에는 핏방울 하나 튀어 있지 않았는데, 한백이 있기에 수성이 굳이 전투에 일일이 나설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수성의 오른팔 한백의 무예는 이미 고구려 전역에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내깃감이었다. 또한 그는 충성심 또한 남달라 국왕 태조대왕도 그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성이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한쪽에 쌓여 있는 무기들이 보였다. 몇몇은 조악하기 그지없었으나 그사이에 몇몇은 날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



날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지 않고 끝이 뒤로 휘어 있는 것을 보고, 수성은 이게 옥저의 칼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사로잡힌 이들과 같은 유목민들에게 이런 무기는 거래를 통한 습득만이 유일할 것이다.



그 말인 즉 슨, 머지않은 곳에 그들의 마을이 있고, 시장이 꽤 활성화 된 큰 마을 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수성은 날붙이더미에서 시선을 떼고 다 타버린 마을 너머 북서쪽에 지평선과 같이 흐르고 있는 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무슨 무기를 들고 있다 한들 하루 살기가 바쁜 한낱 유목민들이 문제 될 것이 있겠느냐.”




한백은 말머리를 수성에게 가까이 한 후 포로를 내려다보며 지체 없이 답했다.




“지당한 말씀이옵니다.”




힘이 가득 실린 눈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던 수성은 적호의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앞으로도 포로 따위는 필요 없다. 모조리 죽이고 불태워라.”




“명 받들겠습니다!”




한백이 도끼를 든 오른손으로 왼 가슴을 치며 답하자 모든 병사들이 일제히 따라 했다. 




‘더 이곳에 묶여 있을 순 없다… 순식간에 몰아치고 끝내버릴 것이다.’




수성은 이를 갈며 전초기지로 돌아갔다. 



* * *



수성이 돌아온 그의 전초기지 움집에서는 그의 스승이자 심복인 진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사들이 움집의 천막을 양쪽으로 들어 올리자 수성이 들어왔고 뒤따라 들어온 적호가 움집 구석에 바람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았다.



적호는 피 묻은 자기 앞발을 핥다가 그 육중한 몸을 그대로 바닥에 뉘였지만, 진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움집 안에는 부여곰의 가죽이 얹어진 수성의 침상이 있었고, 바닥에도 늑대가죽 여럿을 이어만든 모직물이 깔렸었다.



횃불 네 개가 움집의 각 구석을 비추고 있었고, 적호가 드러누운 반대쪽에는 그의 갑옷과 무기를 걸어놓을 수 있는 철장이 있었다.



침상 부근으로 중앙에는 작은 나무 탁자가 놓여져 있었는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술병과 잔 하나가 놓여져 있었고 작전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 탁자에는 또 그가 앉는 황금의자와 다른 이가 앉을 목재 의자가 있었는데, 황금의자에는 호랑이 가죽이 얹어져 있었다.



진당은 그 탁자 옆에서 온화한 미소로 예를 갖추어 그를 환영했다. 수성의 부관이자 군사인 진당은 고구려 최고 문관들의 상징인 청옥빛 관복 위에 잿빛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던 의자 옆에는 진당보다도 더 늙었을지팡이가 벽에 기대어져 있었는데, 그는 성 밖에 나설 때마다 그 지팡이를 지니고 싶어 했다.



수성은 그가 허리도 휘지 않았는데 대체 그 지팡이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궁금해하곤 했다. 진당은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인상이었다.



모두가 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떤 자는 백 년을, 또 어떤 자는 천 년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소문이 날 법도 한 것이, 새하얀 머리는 가지런히 정돈되어 묶여 있었고, 가슴께까지만 얌전히 내려와 있는 그의 수염은 은은한 백색을 띠고 있었다.



진당은 수성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후 부드럽게 말했다. 




“순조롭게 잘 풀리고 있는 듯합니다.”




수성은 자기 스승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투구를 벗으며 답했다.




“그렇소. 이제 저 강 건너 산둥성이 전까지 점령하는 데에 내일 밤까지면 충분할 것이고, 비로소 고구려는 전에 없이 넓은 영토를 얻게 될 것이오.”




진당은 또 한 번 미소와 함께 고개 숙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포로를 모두 죽이고 이곳을 모조리 불 태우라 명하셨다 들었습니다.”




수성은 호랑이 가죽이 덮인 의자에 몸을 얹으며 말했다.




“그렇소.”




그의 단답에 진당은 미소를 잠시 거두고 그에게 우려의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감히 장군의 명에 토를 달 생각은 아니옵니다. 허나 포로 하나 남기지 않고 지나간 자리에 불씨만 남기는 것은 이곳에 정착하게 될 우리 백성들이 이 땅에 대한 이해도 어려울 것이고, 달아난 이들이 원한을 품고 약탈을 서슴지 않게 될까 우려되옵니다…”




수성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잠시 고민하고는 고개를 돌려 적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 진당의 말도 일리가 있었고, 수성이 늘 포로를 남기지 않고 죽여 왔던 것은 아니다.



허나 이 원정이 길어지면서 수성은 지치기 시작했고, 그가 지켜왔던 수많은 규칙들은 이미 하나둘씩 생략되어가고 있었다.



그에게는 어느새 자비보다는 고집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 




“흥. 어차피 씨가 남아 있어 봐야 화만 불러일으킬 것이고, 이곳으로 이주 할 우리 백성들에게 그 화가 분명 번질 것이니, 흔적도 없이 태워 버리는 것이 소인이 보기엔 더 확실한 길이오.”




“전하.”




진당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수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성은 자기 앞에 놓여져 있던 술병을 들어 잔을 가득 채운 후 고개를 들어 단숨에 술을 목뒤로 넘겼다. 그 후,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진당을 말없이 잠시 바라본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이미 명은 내려졌소. 이 땅은 깨끗하게 정화된 후 영원히 고구려의 것일지니 정착하게 될 백성들 걱정은 붙들어매시기 바라오.”




수성은 진당에게 높아질 뻔한 언성을 겨우 가라앉혀 답한 후 마음이 답답해 움집을 나와 해가 자리를 비켜 주고 있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진당이 따라나와 그의 뒤에서 차분하게 말했다.




“이 늙은이에게 말 못 할 고민이라도 혹시 있으신 겝니까.”




수성은 진당의 말에 조금은 진정이 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원정이 어느새 두 해를 넘기고 있소.”




진당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어릴 적부터 봐 왔던 수성이라면 분명 그에게 부여된 이 임무와 원정이 무슨 의미인지 눈치챘을 것이며, 불같은 성격의 그라면 분해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대체 뭘 얼마나 더 증명하고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진당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인도 몸이 이제 예전같지 않소. 살아생전 50년 동안 전투를 치르는 동안 단 한 번도 국왕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소. 감히 그럴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고. 하지만 진당, 그대는 알지 않소. 그 자리가 본디 누구 것이오? 어마마마의 약조가 어찌 그리 쉽게 무산될 수 있단 말이오?”




수성은 진당을 돌아보며 억울함이 가득한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거대하고 흉포한 갑옷을 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성은 너무나도 작아 보였다. 




“전하…”




“그대는 꼭 알아두었으면 하오.”




수성이 뒤돌아 진당을 보며 말했다. 수성의 미간은 어느 때보다 깊게 파여 있었는데 그것이 분노인지 슬픔인지는 판단하기 힘들었다. 




“소인은 이미 진즉 고국을 위한 왕이 될 준비가 끝나 있었소. 소인이 지켜야 할 백성, 맞서야 할 적, 수복해야 할 땅. 모두 다 잘 알고 있소. 언제 그 영광의 자리가 이 손에 올 지, 아니, 오기나 할지 알 수 없다만 소인의 스승 그대는 부디 기억해주시오.”




진당은 고개를 올려 수성을 바라보았다. 수성의 날카로운 눈매가 붉게 차오르고 있었다. 수성은 이를 갈며 진당을 향해 말했다.




“소인은 언제 왕이 되더라도 선조들에게 한낱 부끄럼없는 위대한 왕이 될 것이오!”




진당은 고개를 숙여 그의 결의에 경의를 표했다. 그의 근심 가득한 표정을 숨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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