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의 상태는 심각했다. 산적의 단도에 뱀독이 묻어 있었다는 것이 궁의의 진단이었다. 모든 약재를 사용해 그를 치료하겠지만, 몸 안에 퍼진 독을 빼내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궁의는 말했다.
한백의 피가 온몸에 묻은 수성은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 있는 한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백은 수성에게 가장 듬직한 병사였다.
그가 다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는 수성에게 아직 와닿지 않았다. 그는 아까부터 한백의 곁에서 흐느끼고 있는 소야에게 눈이 갔다. 실로 장안의 화제라 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수성은 한백과 오랜 기간 전쟁에서 등을 마주 대어왔지만 그의 딸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 본 적도, 마주한 적도 없었다. 사실 애초에 수성에게 있어 여자에 대한 욕망은 거의 없었다.
지금 그의 처지에 여욕은 화를 부를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소야는 대제 때 누구보다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한 분칠과 의복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자기 아버지가 칼에 찔려 누워 있는 걸 보며 눈물을 한없이 흘리고 있었다.
분이 다 번지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지만 그 또한 비 맞은 연꽃잎과 같았다. 수성은 그녀에게 무심하게 말을 걸었다.
“소야라고 하였느냐.”
소야는 눈물을 닦으며 수성에게 절을 올렸다.
“예. 그렇사옵니다.”
수성은 소야와 막근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한 왕실의 세자가 정약결혼을 통해 세력 확장을 도모할 생각은 않고 이쁘장한 소녀와 히히덕거리기만 하려 드니, 수성은 소야의 고운 얼굴을 인정하는 것 과는 별개로 막근이 한심했고 그런 그가 왕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백을 잘 보살피거라.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수성은 말을 끝낸 뒤 소야의 인사도 받지 않고 뒤돌았다. 뒤돌은 수성의 앞에는 막근이 서 있었다. 수성은 놀란 눈으로 막근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자저하. 저하께서 어찌 이곳에.”
“숙부님이십니까.”
놀란 것은 막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놀란 기색이 뻔했지만 황급히 수성에게 예를 갖추었다. 수성은 우두커니 인사를 받고는 바로 그를 지나쳐 갔다.
“수, 숙부님!”
수성이 뒤돌자 막근이 다시 예를 갖추며 말했다.
“숙부님께서 고구려를 위해 이루신 업적, 저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수성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찢어 죽이고 싶은 사람이 바로 막근이었다. 그가 태어난 그날, 수성은 억울함과 분노에 휩싸여 이틀 밤을 자기 침소에서 울부짖었다. 막근도 수성이 자신을 그렇게 대하는 것을 알기에 가까워지려 하기보단 두려워 피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막근이 건네준 인사는 수성에겐 유일한 위로였다.
“황송하옵나이다. 세자저하의 은덕, 뼈에 새기어 더욱 분발하겠나이다.”
수성은 막근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발을 뗐다. 막근은 멀찌감치 사라지는 수성을 본 후에야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소야가 그에게 귀띔해준 것 덕분에 조금 더 용기내어 숙부와 가까워진 것 같았다.
막근은 소야에게 이 일을 자랑할 생각에 홀로 뿌듯했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지금은 가서 그녀를 위로해 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백의 침소 뒤 담벼락에서는 상오가 이 모든 일을 관찰하고 있었다. 한백의 상태 점검과 막근, 수성의 대면. 본인이 직접 봐둬야 할 정도로 중요한순간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귀는 열려 있었을지 몰라도 눈은 소야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소야는 이 모든 순간 내내 소리 없이 울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웃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웠지만 우는 모습마저도 상오의 눈에는 아침 빗방울을 머금은 꽃과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때문에 막근과 수성이 대화를 끝내고 서로 갈 길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상오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녀의 슬픔에 그는 난생처음 느끼는 쓰라림을 가슴 깊은 곳에서 느꼈다. 그녀가 웃게 해주고 싶었다. 아니면 작은 위로라도.
그는 재빠르게 근처 길가에서 꽃을 한 움큼 뽑아서 그녀의 방문 앞에 두고 작은 조약돌로 꽃이 날아가지 않게 누르려 했다. 하지만 그 찰나 바람이 불어 꽃들이 날아가려 하니 그가 급하게 꽃을 잡으려 하다가 마루를 밟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누구십니까?”
소야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한백의 방에서 문을 열며 말했다. 상오는 재빨리 꽃을 조약돌로 누르려 했다. 하지만 꽃이 바람을 타고 그녀의 앞으로 한 두 잎 날아갔고, 이내 소야와 상오가 눈을 마주쳤다.
“흑…흑막병..?”
소야는 상오를 보고 놀라 눈이 커졌다. 흑막병에 대해서는 선조의 못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 흑막병의 등장은 결코 좋은 예감이 아니었다.
상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모습을 들킨 것에 대한 당황도 있었지만 살아생전 여인에게 무언가를 건네본 적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게다가, 더욱 가까이에서 본 소야의 모습은 그의 재빠른 발도 그 자리에 묶어 버렸다.
그는 소야에게 들킨 그 순간 얼어버려 그의 눈 아래부터 가려진 천이 벗겨진 걸 몇 초 후에야 깨달았다.
소야는 그의 얼굴을 처음 본 것이었다. 선조의 못에서 화초들을 관리하고 있자면, 으레 왕에게 와서 보고를 올리던 것이 그였던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맨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그 깊은 눈빛 아래로 선 굵게 자리 잡은 콧대와 입은 단번에 이 사람이 비밀을 지킬 줄 아는 묵직한 성격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자아내게 했다.
소야는 외간 남자, 더욱이 흑막병을 마주하게 된 이런 상황에서는 달아나 방에 숨어들어가야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겠으나, 베일에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을 마주한순간 이상하게도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어딘가 막근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나 막근이 온실 속 고운 화초와 같은 모습이라 한다면, 이 남자는 야생화의 눈빛을 보이었다.
상오는 황급히 목으로 내려간 천을 다시 끌어올려 코를 덮었다. 그는 문 앞에 두고 가려던 꽃을 들고 일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바람에 날아가 몇 송이 남지 않은 그 꽃을 바라보며 소야는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꽃을 보고, 상오를 보았다. 상오의 눈은 그녀에게 많은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상오로부터 초라한 꽃송이를 전해 받았다. 상오는 그녀에게 꽃을 쥐어 준 뒤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말을 삼키고 뒤돌아 사라졌다.
소야는 담벼락을 손쉽게 넘어가 사라지는 상오를 본 후 자기 손에 쥐어진 꽃을 보았다. 보랏빛 꽃이 줄기는 흙에 묻어 거칠게 보였으나, 꽃잎만은 이쁘게 발하고 있었다.
“도라지꽃…”
그녀는 꽃을 주워 들고는 집 앞에 뻗어 있는 산맥 멀리 바라보았다. 그녀는 몇 분을 그렇게 멍하니 산을 바라보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 * *
이튿날 아침, 국왕은 문무관들이 허둥지둥해서 그에게 올리는 보고를 듣고 있었다. 이번 원정으로 기세가 드세질 고구려를 경계해서 부여와 옥저가 힘을 합친 것이라고 그들은 왕에게 얘기했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국왕 앞으로 한 장군이 나와 왕에게 예를 갖추고 보고를 올렸다.
“현재 부여 측에서는 3만 명, 옥저에서 모인 자는 8천 명 정도의 규모로 파악이 되옵나이다.”
왕은 그 보고를 듣고도 일체 동요하지 않았다. 왕의 까마귀가 이미 진즉에 그에게 보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소식 이후로 장희와 하묵은 어찌 된 일인지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상오는 그들이 부디 급하게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길 바라며 방 한구석에서 회의를 지켜보았다.
“수성은 들으라.”
수성은 고개를 숙이며 국왕의 부름에 답했다.
“아직 북방 원정이 마무리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대가 직접 부여의 이름으로 난을 일으키려는 자들을 모두 소탕하도록 하라. 짐이 기마부대 5천 명 내주도록 하겠다.”
신하들이 모두 놀라 수근댔다. 제아무리 수성이고 상대가 부여의 난민들이라 한들, 굳이 수적 열세를 내주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처사였다. 수성은 국왕에게 처음으로 억울한 듯 말했다.
“송구하오나 전하. 신의 충복 한백은 병상에 있사옵니다. 이런 상황에 여섯배가 넘는 적군을 저 혼자 상대하라 하시는 겁니까!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왕은 그의 반론에 심기가 거슬린 듯 눈썹이 흔들렸다. 왕에게 권위와 체통은 언제나 중요했다. 이를 먼저 눈치챈 한 신하가 수성에게 말했다.
“이번 북방 원정으로 인해 병의 수가 극소하고, 남쪽으로도 경계를 늦출 수가 없어서… .”
신하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성은 왕을 향해 말했다.
“하오나 전하…”
“대장군인 그대가 지금 짐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냐!”
국왕의 호통에 수성은 멈칫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그는 목에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국왕은 다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대에겐 도술이 있지 않으냐.”
수성은 얼 빠진 표정으로 국왕을 바라보았고 모든 장군들과 신하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수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당의 도술로 자신이 이길 수 있었던 전투를 국왕이 봤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국왕은 여전히 얼음같은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당 또한 놀라서 고개를 들어 수성을 바라보았다. 진당이 도술을 부린다는 것은 수성을 포함한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말한 바가 없으므로, 의도치 않게 그 부분은 기밀이 되어 있었다.
가끔 수성의 전투에 태풍이 일어난다던가, 지진이 일어난다던가 하는 일이 발생한 것은 병사들 사이에서는 수성의 능력, 적호의 능력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는 진당의 처지에서도 섭섭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 도술을 부리는 자가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경계를 불러일으키는지 잘 봐 왔기 때문이기도하고, 그 또한 사적인 이득을 위해 도술을 부리는 것에 대해 일말의 불편함을 내심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국왕이 직접 도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수성에게 붙어 있는 도술에 관한 소문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수성은 고개를 숙이며 이를 갈았다.
“명 받들겠나이다.”
“출군하라.”
수성은 절을 한 뒤 일어나 궁을 나섰다. 힘이 한껏 들어간 그의 주먹에 핏줄이 올라섰다. 그는 이를 갈며 다짐한 후 곧장 무기고로 향했다. 진당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수성의 뒤를 아무말없이 따라나섰다.
“이건 나가 죽으라는 이야기요. 하지만 형님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오.”
수성이 말하자 진당은 답했다.
“필시 국왕께서 다른 계획이 있으실 겁니다.”
수성이 발걸음을 멈추고 진당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획? 군사 오천으로 삼만을 막는 일에 자기 동생을 출전시키는 것이 어떻게 계획일 수 있소? 그것도 이제 막 원정을 마치고 온 대장군한테!”
진당은 수성을 진정시키기 위해 차분한 어투로 설명했다.
“하오나 현재 고구려에 남은 병력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수성은 진당의 말에 이를 갈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무기고 한 편에 잠들어 있는 적호에게 다가가 그를 깨운 뒤, 병사에게 적호의 안장을 채우도록 손짓 했다. 진당은 수성이 무장하는 것을 보며 말했다.
“제가 있는 힘껏 가진 재주를 부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수성은 적호 위에 올라타며 진당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재주가 많이 필요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