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마야부시코]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70세가 되면 나라야마라는 산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풍습이 있는 옛 일본의 가난한 시골마을의 이야기였죠. 70이 되었지만 아직 너무도 건강하고 지혜로운 주인공은 전통에 따라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스스로 이를 빼고 힘없고 약한 노인인 척, 자식과 공동체의 죄책감마저 덜어주려 하면서까지요. 물론 영화를 처음 보고서는 적나라한 성적 묘사나 장면들을 주로, 자주 이야기했지만 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도 이어졌습니다. 생의 의미는 생산성일까요? 생산성은 무엇으로 결정하며 누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요? 결국 특정 기준에 따라 더 가치 있는 생명이 존재할까요?
단순히 생산성 = 존재 가치라고 믿지 않았음에도 저도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좁게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피로한 몸부림이었고 넓게는 나라는 사람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임을, 전형적인 방식으로 내 생은 의미가 있음을 찾고 싶었던 것이죠. 그리고 종종 그 언니를 떠올렸습니다. 아버지를 돌보는 ‘역할’이 사라지면 언니의 생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을까요? 어떤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저의 생은 의미가 없을까요?
아니요, 격렬한 발버둥 속에서도 저는 삶은 그 쓰임에 따라 가치가 나뉘지 않는다 믿었습니다. 생명은 모두 공평하게 유한하듯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세상에 태어나면서 사회와 관계 내에서 이미 의미를 획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라도 부모에게는 애써 키울만한 딸이었고, 마음을 기대는 친구 하나 정도는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저에게 남은 것은 사는 게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이 소중하고 의미 있는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생의 시계는 가차 없이 흐르기에 삶에 대한 주체적인 선택이나 즐거움을 미룰 수 없다고요. 유한한 시간 안에서는 저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제가 책임질 수 있는 자유 안에서 하고 싶은 것을 선별하고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니까요.
결국 죽음에 대해 자각은 제가 유희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스스로의 변명이자 되새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