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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효진 Jun 15. 2022

교육소설 ep14.

태양과 우주먼지


*본 소설은 허구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 학교, 학원 이름, 인물 등은 실제 사건과 관계없습니다.












어머님들, 가능한 날짜에 


표시해주세요.







 현주는 3학년 3반 단톡에 녹색어머니회 투표 공지를 띄웠다. 


 반대표를 맡게 되면 녹색어머니회뿐만 아니라 각종 봉사활동, 학교의 전달 사항 전달 등 자질구레한 일들을 많이 맡아야 한다. e알리미를 통해서 공지가 다 나가고 투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도 왜 이리 엄마들의 손을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주는 반대표 완장이 싫지 않다.


아니 정확히는 이 순간을 기다려 왔고 본격적으로 완장질을 즐기고 싶다. 학창 시절 임원은커녕 부장 한 번 해본 적 없는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던 현주가 이토록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모두 딸 채윤의 입지를 위해서다.


그리고 엄마들 관계에서 중심에 서는 것이 은근히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일, 21일, 25일



속속들이 가능한 날짜에 투표가 이어졌다. 



'흠..' 






25일 김하진, 유이안, 양채윤


26일 박아린, 김준서, 김민재








 투표결과를 훑어보던 현주의 왼쪽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어릴 적부터 신경 쓰이던 아린맘 연지


애 방치한다고 생각했는데 새롭게 부상한 다크호스 준서


교육정보만 빼먹는 얌체 워킹맘 민재까지 



이 셋의 조합이 현주는 마뜩잖다.






분명 끝나고 자기들끼리 


무슨 얘기가 오갈 텐데..








겨우 차지한 반의 중심 자리에서 왠지 주변부로 밀려날 것 같은 쎄한 느낌이 밀려왔다.





 카톡창을 닫고 인스타그램 아이콘을 눌렀다.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을 참 얄궂다.


현주의 머릿속이라도 읽는 듯 제일 보기 싫지만, 보고 싶은 아린맘의 피드가 늘 상단에 뜬다. 끊임없이 아린이네의 일상들에 노출된다.



 그 사이 아린맘의 팔로워는 2.2만으로 늘어났다.






별생각 없이 올린 


아린이의 영어 스피킹 영상을 


보시고 연락이 와서


탄탄영어 주니어 모델까지 


하게 되었어요.


저는 그저 즐겁게 영어를 


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노출해주기만 한 건데


아린이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다 해보네요.



아린이의 모델 데뷔 기념으로


탄탄영어 상담 문의만 하셔도 


수강 시 10% 할인권 


지급 이벤트 열어드려요.



프로필 링크에서 신청가능합니다.


상담 연락처 입력하실 때 


‘아린맘’ 같이 적어주세요.








 아린이는 저렇게 적극적인 성격이 아닌 것을 현주는 알고 있다.






다 엄마 욕심에 저러는 거면서 


아린이가 좋아서 하는 척은








 작위적인 아린맘의 태도에 현주는 오한이라도 난 것처럼 입술 양 끝을 아래로 내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벌써 5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아린이 정말 대단해요. 


우리 애도 탄탄영어하고


 아린언니처럼 


스피킹 터지면 좋겠어요.







아린맘 믿고 바로 신청했어요!







아린이 리터니 아니고 


국내파인 거 맞죠? 


그런데 꼭 원어민 같네요. 


대단해요.








 이어지는 댓글에 현주는 진저리가 쳐졌다.


스크롤을 내리다 한 댓글에서 현주의 손가락 움직임이 멈췄다.






아린이가 탄탄영어를 해서 


영어를 잘하게 된 게 아니라 


잘해서 탄탄영어 모델이 된 거 


아닌가요? 







푸하하하.










 현주는 오늘 처음으로 밖으로 소리 내 웃었다.






제정신인 댓글은 이거 하나네.


솔직히 지랑 지네 엄마 


외모 이쁘장하니 된거지.


이 동네 아린이 정도 영어 하는 애들 쌨구만.








현주는 하마터면 그 댓글에 ‘좋아요’를 누를 뻔했다.



 






원장님, 채윤이 레테 결과 어때요?









 J 수학학원 반도 모집하고 있고 과외도 하고 있지만 현주는 채윤을 끌고 수학꿈 학원 레벨테스트를 보러 왔다.


대형학원에서 멱살 잡고 선행을 이끌고 그사이 생기는 학습 구멍은 작은 학원과 과외로 알아서 메꾸어 주어야 하는 것이 학군지의 수학 사교육 방식이다. 






씁.. 채윤이가 S 수학학원 프리미어 반 


붙었었다고요?








 미심쩍어하는 듯한 수학꿈학원 H원장의 씁 소리에 현주는 가슴 한구석이 움찔했다.사실 채윤이의 수학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것은 현주도 잘 알고 있다. H 원장의 심호흡 하나에 그 모든 걸 확인받은 것 같아 현주의 귀까지 빨개졌다.






원장반은 힘들겠죠..?







네, 어머니. 제가 지도하는 반은 


안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선생님이 지도하는 기초반이 있는데 


거기 정도는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요.








 현주의 자존심에 기초반은 용납할 수 없었다.






네, 한번 생각해볼게요.


원장님 저 하나만 여쭙고 싶은데 


민재 얼마 전부터 여기 다니죠? 


민재 제가 여기 추천한 거예요.







그러시군요.


민재가 적응하느라 


조금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긴 한데 


기본적으로 아주 똘똘한 친구더라고요.


 소개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현주는 구부리고 있던 등을 쭉 폈다. 어쩌면 핀 것은 등이 아니라 체면인건지도 모르겠다.






아, 저 그리고 또 하나, 혹시 준서.. 


여기 다니나요?






 H 원장이 손목을 꺾어 애플워치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준서요? 준서가 많아서..







3학년 3반 김준서요.







아, 그 준서. 준서도 아시나요? 


그러고 보니 다 같은 반이군요. 


네, 준서도 지난달부터 여기 다니죠.


그런데 그건 왜..






심드렁한 기색은 어디가고 미소를 띈 H 원장의 표정만 보아도 준서가 환영받는 학생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준서가 원장님 반 맞나요?







네, 맞습니다.







준서가 잘하나 보죠?







준서가 선행이 되어 있는 스타일은 아닌데 


과제집착력도 있고 


사고력 문제도 탄탄하게 잘 풀길래 


제가 욕심나서 원장반에 넣었습니다. 


선행 부분은 주말에 보충 수업 추가로 


열어서 메꾸고 있고요. 


그동안 학원을 안 다녔던 터라 


갑자기 하기에 양이 꽤 많을 텐데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번엔 현주가 이 사이로 공기를 들이켰다.



'원장이 탐내서 따로 보강해가면서 끌고 갈 정도라니.'






그런데 준서는 왜 물어보시죠?








 현주는 꼬았던 다리를 풀며 양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별일 아니라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원장님. 


뭐 좀 궁금한 게 있었어요. 


아 저 그리고 채윤이 여기 레테 본 건 


다른 엄마들에겐 이야기하지 말아 주세요. 







네, 그러시죠. 


어머님들 사이야 워낙 조심스러워서 


말 옮기고 다니는 건 


저도, 우리 학원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절대 금기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그럼 또 뵈어요.








 수학꿈 학원은 이미 워낙 잘되고 있는 터라 팀 짜서 올 테니 채윤이를 받아달라는 요청이 먹힐 것 같지 않아 현주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채윤아, 얼른 신발 신어. 







엄마 이거 바닥도 털이라 너무 미끄러워. 


나 그냥 양말 안 신고 맨발로 신으면 안 돼?








안돼. 오늘 양말까지 아웃핏이란 말야.


너 리본 머리띠랑 색도 깔맞춤인데?







아, 너무 불편한데. 


알았어...








 오늘따라 아침에 늦잠을 잔 현주는 서둘러 채윤의 등교 준비를 했다.에어랩으로 하나하나 컬을 넣어줄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분무기로 칙 칙 물을 뿌려 양 갈래로 땋았다.






웨이브 넣었으면 훨씬 예뻤을 텐데!


엄마가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더 이쁘게 해줄게. 


얼른 나가자.







 필라테스 레슨이 바로 있는 터라 지난주에 산 룰루레몬 요가복을 입고 채윤이와 집을 나섰다.



 학교 앞 사거리에 녹색어머니회 엄마들이 노란 깃발을 들고 교통 지도를 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채윤맘. 안녕, 채윤아.







안녕하세요, 아줌마








채윤의 인사에 누군가 얼굴을 보니 민재 엄마였다.



'아, 오늘이 26일이지.'



 횡단보도 좌우를 살피니 아린맘과 준서 엄마의 얼굴도 보였다.






아, 네.









 현주는 민재 엄마의 인사에 전처럼 밝게 응수가 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침부터 정장 마이에 주름스커트까지 입고 나온 아린맘을 보니 내심 부아가 치밀었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보이지만 워낙 화려한 외모라 시선이 간다.






 어릴 적부터 늘 그랬다.


무심하다는 듯 교실 한켠에 앉아 있지만 늘 교실은 연지를 중심으로 돌았다. 마치 태양 주변을 도는 태양계 행성처럼 주변의 남자 아이들은 그 궤도에서 자전과 공전을 반복했다.



 아린맘 연지가 유학을 갔던 중1 봄 무렵부터 연지는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았다.



 연지가 가출했다는 소문이 반에 떠돌았다.


 늘 까불거리던 준철이가 옆 학교 짱 남자애가 연지를 따먹었다는 이야기를 쉬는 시간에 큰 소리로 말했다. 


 사실 걸레였다느니, 동네에 좀 잘나가는 남자애 중에 연지랑 안 자본 애가 없다느니 하는 말을 연이어 늘어놓았다.




 '퍽' 하는 소리가 났다.



 반에는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현주가 돌아보니 좀전까지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지껄이던 종철이는 뒷통수를 잡고 '하, 씨발' 을 되내이고 있었다.


 종범이가 준철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니가 봤어? 니가 봤냐고?! 


한 번만 더 헛소문 지껄여 봐. 


내 귀에 연지에 대한 이상한 소문 들어오면


니 대갈통부터 갈겨줄 테니까.








 이 순정만화의 한 장면 같은 촌스러운 연출이 눈앞의 현실이라니 현주는 그저 코웃음이 났다. 그럼 병약한 여주는 시한부 선고라도 받아서 학교를 안나오나.



 공부도 잘하고 외모도 훤칠했던 종범이는 서글서글한 성격까지 갖춰 요즘 말로 ‘사기캐’였다. 반 남자애들에게나 여자애들에게나 인기가 많았다. 쉬는 시간엔 수학 문제집을 풀다가도 점심시간에 나가서 남자아이들과 농구를 하는 아이였다. 


 그런 종범이가 감싸고 도는 여자, 그게 바로 아린맘 연지였다. 반 아이들은 그 이후 누구도 연지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따라서 종범이가 그렇게 화를 내는 건 그날 이후로는 본 적이 없다.



 연지는 그 이후로 학교에 나온 적 없이 유학을 떠났다는 이야기만 들려왔고 모두가 종범이의 눈치를 보아서인지 자세한 사실을 말해주는 이가 없었다. 


그 이후로 몇 번인가 방학이면 종범이가 금발로 탈색한 연지와 함께 있는 것을 동네에서 보았다. 태양을 호위하는 행성들처럼 연지를 감싼 몇몇의 동네 오빠들 사이에 종범이가 끼어 있었다.



 사실 연지가 현주에게 피해를 준 건 없다.


 어찌 보면 비교 대상 자체가 안되는 태양과 우주의 먼지, 그게 연지와 현주의 위치였다. 다만 아린맘이 된 연지와 채윤 엄마가 된 현주 사이가 되자 그 역학관계가 완전히 뒤틀렸을 뿐이다. 








 현주는 인스타그램을 보고 즐거운 적이 없다.


그 작은 정사각 네모 상자의 모임에는 부러움, 비웃음, 열등감 등 부정적인 감정의 시발점들로 일렁인다. 그렇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을 켠다.



 오늘도 역시나 아린맘의 피드가 제일 먼저 보인다.







번 주말도 캠핑장에서 


힐링 시간을 가졌어요.


원래 캠핑장엔 쉬러 가는 거라고 


책은 노블 아니면 금지인데 


요즘 역사에 푹 빠진 아린은 손에서 한국사 책을 놓질 않네요.



지난 번에 공구했던 


스토리 오브 더 월드 와 


에브리띵 유 니드 투 빅 팻 


노트북 시리즈로


역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한국사가 고작 한 페이지만 


나와 있는 걸보고 


분개한 아린이가 한국사를 


제대로 공부해서 


세계에 알리고 싶다나.



본인이 검색해서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이 


있다는 걸 알아 와서는


응시해보겠다고 난리네요.



저는 그냥 시험장에만 


따라가 주려고요.


역시 부모는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옆에서 묵묵히 따라가기만 하면 


아이들은 다 알아서 


잘하는 것 같아요.



아린이가 요즘 푹 빠져 있는 


한국사 시리즈 아린맘픽으로


다음 주에 공구 열겠습니다.



스토리 오브 더 월드 시리즈도 


내일까지 열어드릴 테니


프로필 링크에서 


서둘러 구매해주세요.



+ 오늘 캠핑의 특별 초대 손님 


민재네


아린이랑 같은 반인 민재는


 영유에서 베스트 스피치 상을 


놓쳐본 적 없는 야무진 친구예요,


수학꿈 학원에서도 


원장 반 수강 중인 영재랍니다. @jively_minjaemom



모든 아이는 특별합니다. 


아이주도학습을 추구합니다. 


-아린맘











'지영? 민재???'



 현주는 태그된 계정을 눌러 보았다.


프로필에 민재와 민재 엄마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민재 엄마 이름이 지영이었나.'



 제일 최근 피드에 아린맘과 함께 웃고 있는 민재 엄마의 사진이 보였다.







좋은 사람과 즐거운 주말


또 만나요.








 이 명확한 지각 변동에 현주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텀블러를 놓칠 뻔했다.


 민재 엄마를 알고 지낸지 5년이 넘어가지만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는지도 몰랐다.



 스크롤을 쭉 내려 피드를 살펴보았다.



'폴바셋 아이스크림 라떼는 또 왜 이리 좋아해.'



 민재 사진들 사이에 간간히 교육 인플루언서들 피드를 리그램 한 피드가 섞여 있었다.


 한참을 내리자 채윤이와 함께 했던 원데이 클래스 사진과 cage 가방 사진, 대치동 특강 듣던 사진들까지도 나왔다. 모두 현주가 주선해서 함께 다녔던 곳이었다. 어디에도 현주에 대한 언급도 감사도 없었다.






대기업 다니는 워킹맘인 것도 멋진데, 어쩜 아이 교육까지 이렇게 꼼꼼하게.. 정말 대단하시네요. 


전업맘인 저는 반성하고 갑니다.








 댓글을 읽자 헛웃음이 나왔다.


 






가식적인 건 알았는데 박쥐였어.


연지랑 몇 번이나 봤다고 친한 척은.


안 그래도 민재 요즘 소문도 


안 좋은데 어떻게 감당하려고?









 현주는 아까부터 깨물고 있던 입술을 풀고 서둘러 임원 엄마들 단톡방을 검색했다.






저희 임원 엄마들도 한 번 만나야죠.


담임 선생님이 저 통해서 


전하시는 말도 있고요.


다음주 화요일에 애들 등교시키고 


브런치어떠세요?






단톡방의 2가 사라지기를 현주는 내려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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