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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성훈 Dec 16. 2020

최초의 악수

나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는 어른이 되기 위하여

순하게 생겨서는 고집 있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가끔 이 말을 들을 정도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훨씬 많다는 뜻이다. 올해 초에도 사소한 고집을 피웠다.


나보다 어린 회사 동료에게 말을 안 놓겠다는 고집을. “말씀 편하게 하세요.”라는 말을 세 번쯤 들었을 때 편하게 놔버렸다면 무르익은 술자리의 분위기가 조금 더 좋아졌을 거다. 상대방이 괜찮다는데도 굳이 내 방식을 고수한 이유가 있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예전 일 때문이다.


살다 보면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중요했던 순간이. 백팩의 어깨끈을 손에 꽉 쥔 내가, 축구에 몰입한 친구를 바라본다. 그런데 웬 중년 남성이 난입해 친구에게 길을 물어본다. 명백히 반말투였다. 신나게 달리던 친구는 걸음을 멈췄다. 짧은 대화가 오갔고, 중년 남성은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


무례하다고 느꼈다. 아마 그 사람은 자신의 나이가 더 많으니까 반말을 해도 괜찮고, 아이들 놀이인 축구야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때, 앞으로 16년간 변치 않을 다짐을 했다. 잊지 않으려고 여러 번 속으로 되뇌었다.


어른이 되면,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반말하지 말자. 
그게 교복을 입은 학생이라도.


다시 한번 느꼈다. 나이가 많다고 성숙한 건 아니란 걸. 나보다 한참 모자란 애가 키는 한뼘이나 더 큰 것처럼. 둘 사이에는 상관 관계가 없었다. 억울하게도.


그 반대 증거를 열심히 찾아헤맸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충분히 성숙한 사람이. 나의 오랜 갈증이자 콤플렉스였다. 위인전을 봐도 왜 존경하는 사람이 없을까. 왜 주위에 본받을 만한 어른이 없을까. 이 질문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해결되지 않은 채로 성인이 되었다. 여전히 어른을 욕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는 동안 내 자리는 운동장 구석에서 점점 중년 아저씨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교복이 후드티로, 비즈니스 캐주얼로 바뀌어갔다.


운동장의 한가운데에서 30대의 나는 중학생인 나를 바라본다. 분노를 담은 검지 손가락 끝이 나를 가리킨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애타게 찾아 두리번거렸던 그런 어른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말을 걸어볼 것이다. 


어른을 못 믿고,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해 혼자 끙끙대는 이유가 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니까. 가장 괜찮은 상담사는 아니지만 나를 가장 오래 관찰해 온 사람이니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다. 그때 들었던 노래를 듣고, 라디오 작가가 될 거라며 쌓은 한 박스짜리 일기를 읽으며 예전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닐 거다. 마음의 응어리를 푸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마냥 우울하지도 않을 거다. 마음이 아프고 힘들다는 건, 원하는 바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조금 더 여유로워진 지금의 내가 감싸면 된다. 과거의 일기장을 애틋하게 바라보면서.


운동장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중년의 남성을 바라본다. 세월이 흘러 남성의 모습은 조금 변했다. 길을 물어보는 대신, 여기저기 큰 소리를 내고,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나에게 그 중년은 헤묵은 감정을 주체못하고 부실한 내면을 휘두르는 걸로 보인다.


헤묵은 감정은 사소하면 잠깐의 서운함이 되고, 권력을 잡으면 폭력이 되고, 정도를 넘으면 범죄가 된다.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1인분의 마음속 응어리는 풀어주고 가야지. 가장 처절하게 무너졌던 때부터 시작하는 게 자연스러울 거다. 뒤늦게 사춘기를 마주한 열아홉 살. 부모님은 내가 모범생인줄 알았고, 선생님은 나를 다크호스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던 그때로. 


열하홉부터 시작해 한 살씩 올라오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줄 거다. 아직 하지 못한 말과 풀리지 않은 마음을 찾아 떠나는, 내가 나를 구원하는 이야기다. 


벌써부터 적당히 감추거나 포장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하지만 숨김으로써 가장 손해보는 건 나 자신이다. 마음에서 애매하게 건드려지지 않은 영역이 남으면 과거의 나는 고립될 테니까. 숨기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건, 그만큼 상처가 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록하고 직면해야 한다는 신호다.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지럽지만 않다면.


마주하고 나면 응어리를 풀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혼자서 끙끙 싸매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처럼, 하나의 태도를 선택해야지. 그 태도를 그러모으면 새로운 다짐이 만들어질 거다. 그 다짐이 나에게 방향성을 선물해주리라 믿는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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