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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림 Jun 01. 2022

02.너는 최선을 다해 그곳을 누리는 이방인이기를 바라

(최)한샘이 로마와 피렌체에서 보내온  편지

https://brunch.co.kr/@secretgarden/10

한샘에게


 로마 이야기 반갑게 읽었어. 로마에서 네가 처음 떠올린 이미지가 27년 전의 어린 정한샘이라는 문장에 나도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되었지.

 9월이었고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공기가 느껴지던 때로 기억해. 공항에 도착해서 한인교회를 통해 마중 나오신 분의 차를 타고 앞으로 내가 살 집 아니, 방이 있는 동네로 이동하는데 그 거리가 생각보다 멀었고, 가는 동안 해가 져서 어두워졌어. 그때는 지금 흔히 보는 하드 케이스는  찾기 힘들었고 모두 펼치면 3단으로 늘어나는 검은 가방이나 체크무늬의 조금 더 단단한 가방을 들고 유학길에 오르던 시절이었어. 김치부터 겨울 옷까지 넣어 어디에 걸리기라도 하면 터질 것처럼 빵빵하게 부푼 짐을 어렵게 끌고 계단을 올라 내 방이라고 소개받은 곳에 들여놓고는 지쳐서 부엌에 잠시 앉았는데 불이 어찌나 어두침침한지 엄마는 눈을 자꾸 비비셨지. 그곳에 사는 동안 어둡고 노란 불에 익숙해져서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마치 이곳이 로마인 것처럼 노란 간접조명만으로 살지만, 처음에는 그 어두운 불빛이 꼭 한 달 뒤면 홀로 남겨질 내 앞날 같아서 서럽고 불안했어. 네 말대로 27년 전에는 미리 그곳에 대해 알아보고 갈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기에 더욱 그랬을 거야. (이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침침한 불빛 아래에서 눈을 비비던 엄마의 나이가 지금의 너와 나보다 아래였더라. 아이의 미래를 가늠해보고 그렇게 큰 결정을 했던 그때의 엄마가 나보다 어린 사람이었다니. 지금의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나는 종종 만약 내가 로마에 도착했던 때에 인터넷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면, 그래서 두렵고 외롭던 그 첫 시간들을 가족이든 친구든 나를 잘 알고 아끼는 누군가와 계속해서 시간차 없이 나눌 수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곳에 더욱 오래 남아있을 결심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 지금도 로마에 살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



 나는 지난주에 오래된 친구들을 만났어. 벌서 30년이 다 되어가는 친구들이고 중학교에서 만나 삶의 모든 과정을 함께했기에 각별한 아이들이라 할 수 있어. 로마에 있을 때는 편지가 오고 가는 데에 한 달이 걸렸는데도 그때조차 연락이 끊기지 않았던 친구들이기도 해. 어렸을 때부터 좋고 나쁜 모습을 다 보았기에 어떤 이야기든 편하게 할 수 있지만, 그만큼 세월을 더 직접적으로 느끼기도 하지. 어느덧 아이의 나이가 이 친구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의 나이를 훌쩍 넘어섰고, 우리 중 가장 먼저 기혼의 삶에 뛰어든 친구의 아들은 성인이 되었으니 아무리 우리가 아직 마음은 청춘이라 해도 입으로는 ‘아이고 세월이 참,’ 하는 탄식 비슷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어?


 이번 모임은 친구의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어. 친구들이 돌아가며 가족 또는 본인이 코로나에 걸리고, 회사 다니는 친구의 월차가 반려되고 이런저런 사정이 겹쳐 네 명인데도 시간을 맞추는 것이 어찌나 어려운지 작년에 보자고 한 것이 5월이 되어서야 만나게 된 거야.

 공부하는 아이의 마음과 몸을 돌보느라 힘들었을 친구에게 우리가 무언가를 대접해야 맞지만, 우리나라의 문화란 것이 또 그렇지가 않잖아? 합격 턱이라는 음식을 맛있게 얻어먹고 들어왔어. 좋은 일이 있으면 밥을 사고, 슬픈 일이나 힘든 일에 안부인사를 건넬 때 꼭 끼니를 챙기라 당부하니 얼마나 먹는 것에 진심인 민족인지. 그래서인지 지난 며칠 한국의 트위터는 집에 놀러 온 아이 친구에게 밥을 주지 않은 스웨덴 이야기로 떠들썩했어. 대부분 어떻게 아이에게 밥을 주지 않을 수 있느냐 라는 의견이었는데 어떤 이는 미리 식사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지 않은 초대에서는 식사를 제공할 의무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러면 다시 아무리 그래도 아이가 아니냐 하는 식이었지. 원글을 보니 우리나라에서만 논쟁이 된 건 아니고,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긴 했더라. 먹고 먹이는 것에 매우 진심인 나라들이 많았고 그 나라의 사람들은 절망하며 글을 남겼더라고. 사실 이 하나의 사건 안에는 식사 시간에 다른 집에 가지 않는다, 가더라도 식사 시간에까지 놀지 않는다 등 문화 차이에서 기반한 교육관이 있기에 섣불리 말을 얹고 싶지는 않았는데, 다만 놀러 온 아이에게 어떻게 밥을 주지 않고 돌려보내느냐 라는 말이 많다는 것이 좀 놀라웠어. 노키즈존이라는 단어를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보자면 모순 아닌가 싶어서. 노키즈존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면 말이 너무 길어지고 이 편지는 산으로 가겠지? 아무튼 어린이에게 좋은 것은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는 걸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도시의 역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든, 그리고 그 공간 구조와 외양, 생활양식이 오랜 기간에 걸쳐 아무리 극단적인 변화를 겪었다 하더라도, 도시에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도시는 이방인들이 머물며 서로 어깨를 맞대고 움직이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오늘 간 그림책 수업에서 접한 그림책 중에, 자신의 주위에 벽돌을 쌓아 자신을 가두는 동안 더 높이 쌓여 올라가는 벽돌집의 높이에 맞춰 몸이 계속 커지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작은 마음을 발견하고야 자신을 감싸고 있던 벽돌을 하나씩 허물기 시작했고, 몸은 다시 작아졌어.


  로마에서 왜 그렇게 외로웠을까. 왜 그렇게 숨었을까. 두려운 건 또 왜 그리 많았을까 생각해보니 로마에 살던 동안 내 모습이 그림책 속 사람의 모습이었어. 나는 나를 가두고 싶었고, 내가 가진 문제들은 내가 그것에 집중할수록 더 커져만 갔지. 분명 내게 다가오는 아름다움이 있었을 텐데도 손을 뻗어 그것을 잡지 않았어. 벽돌을 허물기보다 철저히 고립되는 쪽을 택한 이방인으로 살았던 같아.


 맞대어 움직이던 어깨 끝이 닿아있는 사람들의 낯섬과 냉대를 견디지 못했던 어린 사람. 그리하여 있을 때는 그곳의 작은 아름다움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떠나면 그리워질 일상을 누리지도, 즐기지도 못했던 사람. 그게 나였어. 머물 때는 떠나는 날만 기다렸고 떠나오고 나서도 후련해만 하다가, 세월이 지나 그 모든 시간이 그리움의 영역에 들어간 후에야 머물었던 시간 속에 좋은 기억들을 억지로 끼워 넣어 간직하는 내 모습이 싫어질 때도 가끔 있었어. 지금은 그저 그리움의 도시가 되어버렸네.


너는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누리는 이방인으로 지내다 돌아오면 좋겠다. 나는 요즘 낯선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새로운 것에 놀라는 너의 모습을 상상해보곤 해. 일정이 조금 짧아졌지만 그래서 더욱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 모든 것을 대하고 있지 않을까? 네가 올리는 하늘, 건물, 음식 사진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보고 있단다.


 애초에 이탈리아에 오래 있게 될 계획이어서 우리가 이탈리아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계획이 수정되며 공부를 마무리하지 않은 것이 아쉽네. 그렇지 않았으면 너는 분명 택시 기사의 말을 알아들었을 텐데 말야. 뭐라고 한 걸까? 그런데 십 유로는... cento가 아니라 dieci라고 했어야 해.  cento는 백이잖아. (이러기야?)


2022. 06. 1

한샘이 한샘에게




+하지만 오늘은 로마의 하늘이 부럽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붙이고 싶네.

( 핸드폰 기본 카메라. 무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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