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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림 May 25. 2022

01.사랑했고 미워했으며 그리워하는 도시에 있는 너에게

 2022.05.25 한샘이 한샘에게

(최)한샘이 뉴욕에서 보내온 첫 편지

https://brunch.co.kr/@secretgarden/9 



안녕, 헬레인 한프 역을 하고 있는 한샘. 나는 퀼러 카우치는 아니지만 책방을 운영하는 Q라고 해.

Q의 유산이라니, 그런 엄청난 말을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영광으로 생각할게.


 첫 편지어서일까. 흥분과 설렘이 너의 편지에서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만 같았어. 모니터를 뚫고 글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을 받았지 뭐야. 너는 원래도 부지런한 아이인데 편지에 담을 글감을 찾아 얼마나 더 기민하게 주위를 살필까. 눈과 귀를 한껏 열어둔 여행자가 되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아.

 흔치 않은 같은 이름을 가진 우리가 만나게 된 건 10년 전에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지금도 서로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챙기며 지내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신기해. 관계의 소멸은 상대방에게 일어나는 일이 더는 궁금하지 않을 때 시작되는 것일 텐데, 나는 우리가 만나기 전에 너라는 사람을 궁금해했던 것만큼이나 지금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여전히 매우 궁금하거든. 누군가를 계속해서 궁금해하는 건 관계를 끌고 나가는 힘이 되나 봐. 서로 애쓰지 않으면 사그라드는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신기하지 않을 수 있겠어. 우연히 시작된 것 같으나 너의 말처럼 뉴욕이 우리를 이어 준 것이기도 하니, 그 도시에서 보내온 편지가 참 반갑다.


 미국. 내가 한 번도 가 보고 싶다거나 궁금해하지 않은 나라. 조금 무서워하는 나라.

‘무서워한다’라는 표현 안에는 뜻 그대로 두려움도 들어있지만 거부감도 들어있어. 그 거부감은 세계 경제를 손에 쥐고 흔들며 정작 필요한 것들은 힘이 없는 나라에서 취하고, 환경 파괴의 주범이면서도 모든 문제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듯 의기양양한 모습 때문일 거야. 두려움은 아무래도 영어 때문인 것 같고. 하지만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국에 온유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는데 바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국에 가거나, 미국에 살고 있을 때지. 지금도 떠오르는 사람이 몇 있네.

 너의 편지를 기다리며 소피 칼의 <뉴욕 이야기>가 생각났어.  뉴욕에서 폴 오스터를 본 적이 있는 너의 영향을 받아 폴 오스터를 읽기 시작했고, 폴 오스터로 인해 소피 칼을 알게 되었기에 뉴욕에 있는 너를 생각하니 그 책이 떠올랐나 봐. 하지만 소피 칼의 책은 어디에 꽁꽁 숨었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대신 1965년에 뉴욕에 도착한 장 자크 상뻬의 이야기를 읽었지. 뉴욕에 갔을 때 상뻬는 영어를 못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대. 이미 유명했고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편집장과 동행이었는데도 그렇게 느꼈다고 하지. (그러니 나는 어떻겠어. 생각만 해도 역시 두려워) 하지만 뉴욕을 채운 색깔들에 반했고, 에너지와 재미를 느꼈다고 하더라. 기묘하고 꿈틀거리고 움직이면서 신나면서도 신기한 것들로 채워진 도시. 네가 뉴욕에서 느꼈던 좋은 에너지도 이런  것들로부터 왔던 것일까?


 한때 매우 사랑했던 것을 예전만큼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일은 용감한 일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매우 슬픈 일일 거야. 그렇기에 그 고백을 미루고 다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 테고.

편지를 쓰고 나서 가장 좋아하는 동네를 느린 걸음으로 걸었니? 네가 커피를 마실 거란 가장 뉴욕스러운 카페는 어떤 곳이니? 생각해 봤는데 ‘뉴욕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더라. 내가 아는 너라면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주인공 네 명이 브런치를 먹던 그런 풍경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뉴욕의 카페’ 하면 내게 떠오르는 것은 그런 모습 뿐이어서.


 여기는 다음 주로 다가온 지방선거 때문에 선거 유세 차량의 음악 소리가 예고 없이 도로를 덮곤 해. 오늘도 어찌나 시끄러운지 저녁 바람이 시원한데도 창문을 꼭꼭 닫고 라디오를 틀어 소리를 눌러야 했어. 후보 이름을 외치고 000 뿐이야- 같은 의미 없는 가사가 반복되는 트로트 가락이 대부분인데, 정작 남는 것은 후보의 이름이 아니라 소음으로 인한 불쾌감인데도 유세의 모습이 안 바뀌는 것을 보면 참 이상해.

 나는 요즘 책방의 운영 시간을 두고 매일 고민을 하고 있어. 하루에 몇 시간을,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책방을 열어두어야 나머지 시간에 글도 쓰고 번역도 하고 집의 시간도 챙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야. 바이러스로 인한 변화는 모두에게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 것은 아니었고, 너도 잘 알다시피 나는 조금 힘든 시간에 처했었잖아. 열심히 일해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쉬지 못했는데 지난달에 코로나에 걸린 걸 기점으로 이제 정말 몸을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일과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시간표를 정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지. 버티다 보면 조금씩 나아질까 기대하던 하루들이 모여 어느덧 2년이 훌쩍 지났네. 여전히 현재진행중인 어려움들이 있지만 나는 많이 단련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2년 3개월 만에 운동을 다시 시작한 아이를 데려다주며 만난 선생님이 그간 어떻게 지내셨냐고 묻는데 나도 모르게 가정에 닥쳤던 일을 말하고 만 거야. 가슴이 꽉 막혀서 숨이 안 쉬어질 것 같던 일을 가까운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해 버리다니, 운동센터를 나오며 헛웃음이 나오더라. 나는 '지나 보니 좋은 경험이었다', '버티면 좋은 날 온다', 같은 말들을 정말 싫어하거든. 그건 결국 어두움이 지나고 밝은 날을 만난 사람들, 버텼더니 좋은 날을 맞이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잖아. 아직 어두움 속에 있고 어려움을 버티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또 다른 상처가 될 뿐이지. 하지만 그 말을 나보다 수십 년을 더 사신 분이 하시면 그 세월 속에 내가 가늠하지 못하는 시대의 다른 어려움이 있겠거니 싶어 날카로운 마음을 조금 내려놓게 돼. 오늘 물어보신 선생님도 나이가 우리 부모님과 비슷하셔서 그냥 말이 튀어나왔나 봐.


 오늘 너의 sns 에는 로마의 시그니쳐 같은 파란 하늘과 노란 건물이 담긴 사진이 올라와 있었고, 너는 반나절만에 그 도시에 반해버렸다고 적었지. 그리고 나는 네가 그 도시에 반할 줄 알고 있었단다. 내가 살았던, 내가 떠나온 그 도시는 여행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상한 매력을 가진 곳이거든. 도시 자체가 주는 이미지는 매우 다르지만 네가 뉴욕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내가 로마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너의 표현에 따르면 갈 때마다 무한 증식하는 것으로 보이는 뉴욕과는 달리 로마는 어쩜 시간이 지나도 이렇게 변하는 게 없을까 하는 도시였어. 물론 21세기 이후 아주 조금씩 바뀌기는 했지만 말야. (세상에 나는 20세기에 로마에 가서 21세기를 맞이했던 거구나!)  네가 올린 사진 속 파란 하늘을 보니 같은 색의 하늘과 같은 수치의 미세먼지를 공유하고 있지 않음으로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지. 너는 지금 그곳에서 아름다움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지 않을까.


 익숙하지만 낯선 감정들을 느끼는 도시에 몇 년 만에 도착한 너. 그곳에서 다시 낯설지만 설레는 도시로 떠난 너. 볼 것과 느낄 것,  할 말이 얼마나 많을까? 편지를 주고받기로 한 건 아무래도 좋은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아. 너의 글을 받아 읽기만 할 것을. 새로운 에너지를 찾는 여정에 있는 너에게 이곳의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다.

 아, 주머니에 꽂고 산책 나갈 시집으로는 권누리 시인의 한여름 손잡기》를 추천할게.  마음이 맑아지는 사랑시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사랑이 존재하는 시집이고, 무엇보다도 이 여름에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여름의 조각에 비싼 값을 매겨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팔아대는 나의 영원하고 무용한 사랑이 있다


 어쩜 이런 표현을 할까? 시인들이란 참.

너의 유럽 일정이 끝날 때 즈음에 맞춰 보내려고 하니 뉴욕에서 머무는 곳의 주소를 알려주기 바라. 이거 정말 프랭크가 된 기분인걸. 그렇다고 헬레인 한프처럼 먹을 것을 보낼 필요는 없어. 하지만 뉴욕과 유럽의 예쁜 엽서는 받고 싶구나.

그럼 나는 어제와 오늘이 다를 바 없는 작고 노란 책방에서 너의 로마 이야기를 기다릴게.


Ciao!




2022. 05. 25

용인에서 한샘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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