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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림 Jun 25. 2022

돌아갈 곳이 없는 것만 같아

05. 한샘이 한샘에게

(최)한샘이 보내온 다섯 번째 편지

https://brunch.co.kr/@secretgarden/13


 서울에 다녀왔어. 모임이 있었거든.

주차를 하고 모임이 있던 공간까지 10여분 거리였는데, 길을 찾으며 걷느라, 또 길을 따라 있는 작은 가게들을 구경하느라 거의 20분을 걸었어. 더운 날이었는데 걸을만 했어.

그런데 서울에서 나는 이방인이더라. 길을 몰라서였을까. 말도 통하고 글도 읽을 수 있지만 그래도 낯설고 두려웠어. 버스 안에서 호흡 곤란이 오고 쓰러졌던 기억이 있는 나는 대중교통을 타지 못하잖아. 그래서 편리한 대중교통도 장점으로 다가오지 않고 말야.

나고 자란 도시가 분명한데 나는 더 이상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 모르겠어.

이제는 지도 앱이 없이는 섣불리 나설 수 없는 곳, 좁게 느껴지는 도로와 높은 밀도의 사람들로 다가오는 도시.

서른까지만 해도 나는 늘 서울에 ‘돌아가서’ 살 거라고 말했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게 서울이 대체 어떤 의미였길래 자꾸 돌아가야 한다고 했던 걸까. 지금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데 저 말을 들으니 신기했어. 물론 이제는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아니게 되어버린 도시이지만. 


 거쳐간 곳들을 생각해볼 때마다, 그곳들에 얽혀있는 감정들을 글로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서울 16년. 로마 7년. 용인 2년. 사천(경남) 2년. 강릉 3년. 수원 3년. 다시 용인 7년. 그리고 화성 3년.

내 43년의 삶이 나누어져 지나온 이 도시들 중 좋기만 한 도시가 있었을까? 내 의지로 머문 도시는 어디였을까? 그런 곳이 있기는 했나? 그래도 그리움의 크기가 가장 큰 곳은 아마도 로마이겠지.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고 묵직한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일, 달지 않은 빵과 파스타로 식사를 하는 일, 노란 벽의 건물들 사이를 걸어 장을 보러 가는 일,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에 데굴데굴 구르며 웃는 일, 해가지면 마주 앉아 땀을 닦으며 맥주와 와인을 원 없이 마시는 일, 그렇게, 뜨거운 여름을 관통하는 일. 오래 멈춰있던 이런 일들이 마치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이어지고 늘 하던 일처럼 세포에 스며드는 날들이 이어지던 여름날들. 


 다시 찾은 로마에서는 언니가 업무를 보러 간 동안 세 아이를 데리고 걸어서 이태리에서는 보기 드물게 영국식 아침식사를 파는 정원이 보이는 레스토랑에 간 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브루스케타와 한낮의 열기를 식혀줄 생맥주를 시키고 두근거렸던 마음. 알콜이 들어가니 자신감이 붙는지 생각나지 않던 단어들도 튀어나와 말 잘한다는 칭찬도 듣고 눈치로 분위기를 파악한 아이들이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봐주는 것에 으쓱해졌던 그날의 강렬한 기억.


 오래 전 살았던 로마의 시간은 혼자 모든 것을 결정했어야 하는 시간이라 비록 힘들었지만, 내 삶의 무게만 감당하면 되는 젊은 날이 전부였기에 이제는 그 어렵던 시간도 그리워지네. 여름마다 가서 몇 주를 머물다 올 수 있었던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그리움의 크기만큼이나 슬퍼지기도 하고.


영화 Revolutionary Road (2008)

 리처드 예이츠의 소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다시 읽었어. 물론 영화도 다시 봤지.

소설에 마음을 붙이기 위해 평소 좋아하는 소설을 다시 읽은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이야기여서 읽었어. 최근의 내가 위태로워 보여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너는 아마도 걱정하고 있겠지. 하필 이 소설을 다시 읽었다고 하면 너의 걱정이 더 커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첫눈에 반해 결혼하여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있는 예쁜 집에 정착하여 딸과 아들을 낳고 살아가는 젊은 부부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새로워. 에이프릴은 생기 넘치고 꿈꾸는 듯한 프랭크의 모습에 사랑에 빠졌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 된 프랭크는 절대 아버지처럼 회사원으로 살지 않겠다던 그 다짐이 무색하게 아버지가 수십 년을 일한 바로 그 회사에서 일하며 평범한 삶을 이어가잖아. 나름대로 만족하는 프랭크와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이고 위태로워 보이는 에이프릴.  조용하고 매일이 똑같은 그 삶 속에서 에이프릴은 행복하지 않아.


  파리로 이사 가겠다는  ‘비현실적인’ 계획을 세우며 둘은 잠시나마 아무 근심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 프랭크가 회사를 때려치울 생각으로 장난처럼 낸 기획안이 사장 마음에 들어 승진 소식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야. 그다음은 뻔하지. 프랭크는 마음을 바꾸고, 에이프릴은 절망하고.

 만일 에이프릴이 꿈꾸던 인생이, 행복한 미래가 남편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 '혁명'이 좌절되었다 한들 함께 헤쳐나가면 그만이었을 테지. 현실에 적응해가는 프랭크가 에이프릴에게 있어 다시금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본인의 삶조차 포기할만한 이유가 되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만, 살아갈 힘을 잃고 마는 에이프릴에게 나는 왜 이렇게 동화되는 걸까.

 서로가 생각하는 행복의 모양과 고통의 모양이 다른 시간이 길어지면, 서로를 견딜 수 없게 되는 것 같아. 나도 잘 알아.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우리의 미래는 엉망진창일 가능성이 높다는 걸.  그런데도 나는 계속 삐딱선을 타고 싶어. 왜냐하면 자꾸 미래만 바라보다 보면 그려놓은 미래가 되기 전에 나는 죽을 수도 있으니까. 사람들은 그렇게들 죽잖아. 행복해질 만하니까 갑자기 아프고 좀 살만해지면 갑자기 사고가 나기도 하고. 너무 허망해지면 그런 일들이 생겨. 그러니 행복해지려는 시점을 정해놓고 산다면 어쩌면 영영 서로 다른 말만 하다가 뒤돌아 걸을지도 모를 일이지.


서울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다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이 편지는 어차피 여기를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는 거니까, 서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방향을 잃었어도 그게 오늘의 나이니 괜찮겠지. 오늘의 나는 이렇게 조금 힘겹게 흔들리고 있어.


2022. 06. 25

한샘이 한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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