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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림 Feb 09. 2021

#05_한껏 흐물거리다.




언니의 시어머니, 한국식으로 말하면 사돈어른. 아이와의 관계를 말하자면 사실은 이모의 시어머니를 만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게다가 국적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이렇게 친밀하게 이어지는지 신기할 뿐이다. 

로마에 올 때마다 시간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이번처럼 같은 집에서 여름을 나게 될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한여름에 오니 이런 일이 다 있다. 시간은 느리디 느리게 흐르고 모든 것이 정지한 것 같은 이 시골마을에 서서히 스며드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우리가 그렇게 지낼 수 있도록 마음 써주는 언니의 시어머니의 이름은 리아이다. 시어머니라는 호칭도 없는 판에 사돈어른이라는 호칭이 있을 리 만무, 그녀를 어찌 불러야 할지 물었을 때 너무나 당연하게 이름을 부르라 했지만, 아이들이 할머니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너무 어색해해서 할머니라는 뜻의 논나 nonna를 붙여 논나리아를 부르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렇게 언니의 시어머니는 우리에게 논나리아 가 되었다. 


건강한 식사빵과 요리를 내는 작은 식당의 주인이 되는 것이 꿈인 아이를 모든 요리에 동참시켜 주는 논나리아덕에, 아이는 남부 이탈리아에 적응해가고 있다. 아이의 노트는 남부 가정식 레시피로 채워지는 중이다. 

타인의 배를 채우기 위한 그 노동이 논나리아와 아이에게는 기쁨의 창작활동 시간이라 우리는 그저 감사히, 맛있게 먹을 준비를 하고 기다린다. 다진 고기에 이탈리안 파슬리와 빵가루, 치즈와 소금을 넣고 치대어 만드는 뽈뻬따(미트볼)는 아이가 좋아하는 메뉴인데 오늘은 논나리아의 가르침을 받아 직접 만들었으니 더욱 맛있게 먹을 것이다. 나는 먹지는 못할 테지만 몇 해 전 먹어본 그 맛을 기억한다. 재료의 맛이 아니라 정성과 따스함의 맛이었다. 




논나리아는 채식을 하는 내게 적당한 잔소리와 함께 식탁에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한 가지씩 꼭 올려주는 것으로 각별한 애정을 표한다. 샐러드에서 고기가 없는 부분의 루꼴라를 건져주고, 단백질 섭취가 중요하다며 콩을 잔뜩 넣은 파스타를 준비한다. 논나리아의 음식은 다 맛있지만 내가 요즘 특히 맛있게 먹는 것은 달콤한 홀토마토에 감자와 콩을 넣고 푹 끓인 것이다. 단순한 재료로 만들어진 그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심심한 맛이 주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먹는 것이 단순해질수록 관계의 단순함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간결하고 단순한 관계에 대해.


음식은 왜 다 맛있는지 늘 과식으로 이어진다. 토마토 요리도 채소 요리도 더 너무너무 맛있어서 난리다. 납작 복숭아도 많이 먹었는데 이 동네는 천도복숭아가 훨씬 맛있어서 매일 사러 간다.



하루의 마무리는 매일 맥주다. 아니, 시작도 맥주다. 낮에는 부엌 하얀 타일이 깔린 작은 식탁에서, 해가 지면 추워지는 옥상에서 마신다. 해질녘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산책하다 바다 위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한 잔 하기도 한다. 이 동네에는 식료품점이 딱 하나 있는데 그곳에  있는 맥주는 동양인 자매가 다 없애버릴 판이다. 언니의 시어머니는 이 술주정뱅이들을 어쩔까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어제는 동네의 조그만 광장에서 콘서트가 열렸다. 12시가 되도록 앰프는 꺼질 줄을 모르고 아이들은 그 큰 노랫소리에도 잠을 잔다. 우리는 옥상에서 낄낄대며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맥주를 마셨다. 사람들이 흩어지기도 전에 우리가 취해 내려와야 했다. 


 그렇게 별과 술에 취해 침대에 누워서 가슴에 두 손을 포개 얹고 오늘은 이 이야기를 꼭 써야지 하는데, 분명 메모장에 뭔가를 적고 있었던 것 같은데 또 창 아래 동네 사람들 수다 소리에 깨고, 또다시 노란색 커튼을 통과해 들어오는 아침의 햇살과, 그 햇살에 춤추는 먼지를 바라본다. 꼭 쓰려던 이야기는 이미 꿈처럼 사라진 후다. 영화 인셉션처럼 이게 현실이 아니고 내가 설계한 꿈 속인 걸까. 가끔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이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이곳에 오고 나서는 그 경계가 더 불분명해졌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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