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이었던 지하, 난방이 되지 않고 따뜻한 물이 안 나오는 방, 합판으로 나누어진 집, 바닥이 뚫린 집, 주차장 가운데 있는 집...
삼백에 삼십. 백에 사십오. 병을 얻게 되고, 악착같이 모은 돈 천.
부모의 지원 없이 청년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읽는 내내 꼭꼭 모아 붙들고 있던 마음은 뒤에 실린 집필 후기에서 넘쳐버려 기어이 눈물이 나게 만들었다.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나도 자리가 바뀐 것에 있어서 어디 가도 뒤지지 않을 이야기가 한 보따리인 사람인데.
이제는 아이들이 있어서일까. 이전에는 자유로 느껴지던 부분이 서러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두 분의 작가님이 지금은 자신의 창작물로 이름을 알리고 작업을 하며 잘 풀리셔서 다행이다.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작업하실 수 있게.
며칠이 지나 앞의 책 속 순이, 고정순 작가가 궁금해 읽었다.
읽고 나니 부제인 '그곳은 힘들고 이곳은 외롭다'가 어떤 말인지 알겠다.
그곳을 지나오며 겪었던 가난의 기억과 보이지 않는 경계에서 느꼈던 쓸쓸함이, 이제 그곳을 지나 이곳에 오니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페이지마다 느껴졌다.
익명의 지인들이 등장하는 산문을 읽을 때면 조금 불편해하기도 한다. 내가 누군가의 글 속에 알파벳으로 등장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고, 그들은 저자들의 기억과 달리 그렇게 나쁘거나 우스운 사람들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기에.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알파벳으로 지칭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그런 불편한 마음을 느끼지 못했다. 왜인가 했더니 그리움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작가가 지나온 시절에 띄우는 편지가 아닐까. 그 시절의 나에게, 동생에게, 언니에게, 엄마와 아빠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친구라 칭하기 애매했던 인연들에게. 그리고 지금은 떠나온 영등포에게.
한편으로는 가난해 보지 않은, 아파본 경험이 없는 이들은 이 글을 어떻게 읽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아주 아주 찢어지게 가난해도 봤고 (두 살 터울인 언니는 이 시절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이로 보면 나보다 선명하게 기억해야 맞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아주 부유해도 봤고 (시기적절하게 이때 음악을 공부하고 유학도 갔다) 쫄딱 망하기도, 많이 아프기도, 글이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싫은) 엄청난 상실을 겪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고 생각해 왔다. 내 삶이 너무 파란만장하고 현란하여 작가가 될 소양을 갖추었다고 착각했었다. 이런 경험을 내 안에 싸매고 있으니 잘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나는 그 기억들을 가지고 그저 잘 읽는 사람이 되었다.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 많으니 깊게 읽을 것이 많아 잘 되었군 생각하기로 했다.
순탄하게 살아오지 않은 나여서, 내가 나여서 좋다고.
글을 읽는 동안 창동에, 수유리에, 개포동에, 로마에 있는 나의 기억들을 몽땅 끌어모아 소환시켜놓고도 정작 저자는 자신의 삶이 너무 뻔해서 소설 쓰기를 깨끗하게 포기했다고 적혀있었다.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세상에 남아있는 글 중 반은 찍어버려야 할 것이다. 아닌가. 산문집이라도 내주셔서 다행이니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자리>의 김소희 작가에 대한 글은 언제 나올까 기다리며 끝까지 읽었는데, (출간 순으로 보자면 이 책이 4년 앞선다) 말미에 '가족'이라는 챕터로 짧고 굵고 진하게 실은 글을 읽다가 먹먹해져 왔다. 둘은 서로에게 이런 존재였구나.
내게도 있겠지, 이런 이 한 명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