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만 떨지 않으리라
회사원 시절 나는 거의 매일을 사장이랑 회의를 해야했다. 유럽인이었던 그는 한국을 같잖게 보는 오만한 인물이었고, 그래서 나랑도 참 많이 부딪쳤다. 다들 저 놈은 언제 본국으로 돌아가나, 사장은 언제 바뀌나란 말을 자주 했는데, 본사에서도 한국에 보낼 마땅한 인재가 없어서인지 그는 참 끈질기게도 오래 해먹었다. 미운 마음이 가득하던 어느 날, 그의 모습에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도 내 부하직원에게 이렇게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름대로는 잘 챙겨주고 보호해준다곤 했지만 일이 똑바르지 않으면 칼같이 혼을 냈고 편한 상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성을 하고 일기를 썼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사장이 바뀐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서 진짜 놀랐다. 어떤 인연도 나에게 뭔가를 가르치러 온 사람이라는 걸, 그 숙제가 끝나면 그 인연도 끝난다는 걸 제대로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한심하지만 마당발과 인맥왕이란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그동안 무수한 인연들을 만났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아니다 싶은 사람은 다 잘라내고 검증된 사람만 내 곁에 두었다. 모두가 나의 스승이라는 걸 알고 난 후에도 안정된 것에만 취한 것인지,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고픈 마음인 것인지, 나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는 사람과는 저절로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다 최근, 옳고 그름에만 집착하여 정작 내가 실천해야 할 아우름과 그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놓치고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았다.
나에게 온 사람들은 각자의 임무를 실행하고 그 역할이 끝나면 홀연히 사라진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오래전부터 누구에게든 함부로 정을 주지말고 인연의 오감에 초연하라고 하셨다. 집착이 되어버리는 순간 마음이 괴롭기 때문이다. 어차피 올 사람은 와서 갈 때 되면 알아서 가는데 나는 그들이 가기도 전에 내가 먼저 밀어냈다. 잘 풀어 가도 되는 걸 그렇게 무자르듯 끊어버렸다. 세상엔 비인도 많기에 그런 사람은 걸러낸다고 치더라도 약간의 흠을 가진 사람에게도 그렇게 모질게 대해야했나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 중생구제가 어떻고 하는 모순적인 행동을 깊이 반성 중이다.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모르는 게 되어버리고,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최선이 아닌 결과를 부를 수도 있으며, 거만한 사람을 싫어하던 내가 사실 진짜 거만한 인간이었음을 인정한다. 뭔가 다 뚫린 느낌이고 홀가분한 기분이다. 태만한 마음을 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겠다. 새로 태어나서 다양한 사람들과 섞이고 배우고 품어주면서 더 열정적으로 살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