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L Sep 26. 2016

대만 청춘영화를 듣다

<연연풍진>부터 <나의 소녀시대>까지

언제부터였을까. 나의 영화음악 컬렉션에 대만산 앨범이 하나 둘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한 건. 기억을 더듬어보면 <비정성시(悲情城市)>부터였을 거다. 대만 뉴웨이브의 걸작으로 치켜세우는 잡지 기사를 읽고, 동네 비디오 가게를 헤매다 만난 그 영화는, 부끄럽게도 좀이 쑤실 만큼 느린 데다가 밤낮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침침했고, 테이프가 돌아가는 도중 잠들어 결국 끝을 보지 못한 채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자장가가 되어준 센스S.E.N.S의 영화음악은 초반부만 돌려 본 반복 학습(?)의 결과였는지 뇌리에 새겨졌다. 겉멋 든 새내기 대학생이었던 내게 글로 배운 대만 뉴웨이브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고, 처음 대면한 대만 영화는 음악만 기억에 남은 셈이다. 공교롭게도. 


젊은 날의 오기였을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만 뉴웨이브 탐험은 그 후로도 이어졌다. 얼마간 소득도 있었다. 뒤늦게 본 허우샤오시엔(侯孝賢)의 <동동의 여름방학(冬冬的假期)>은 외갓집에서 보낸 추억이 떠올라 한동안 망연했고, 양덕창(楊德昌)의 <고령가소년살인사건(牯嶺街少年殺人事件)>은 인생의 영화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니. 머리가 굵어지면서 대만의 역사와 정치 상황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됐을 즈음 큰 스크린으로 다시 본 <비정성시>는 우리 근대사와 비슷하게 흘러가는 몇몇 장면을 보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센스의 멜로디가 자장가가 아니라 쓰라린 과거를 위무하는 음악이라는 인상도 그때 받았다. 허우샤오시엔과 양덕창의 뒤를 이은 뉴웨이브 2세대도 흥미로웠다. 세대 단절과 퀴어 코드를 꺼내 든 이안(李安)과 차이밍량(蔡明亮)의 영화는 사운드마저 기발했고, 보고 나면 한 달치 양식을 마련한 것 같은 허우샤오시엔의 작품은 색다른 영화(와 음악)에 대한 갈증을 풀어줬다. 마이너한 영화 취향이 그 무렵 내 안에 슬그머니 자리 잡았던 것 같다. 홍콩, 대만, 중국 영화를 뭉뚱그려 그냥 '홍콩 영화' 아니면 '중국 영화'로 부르던 시절, 꼬장꼬장한 나는 정색을 하며 영화의 국적을 따지곤 했으니까. 아니, 그건 대만 영화야, 하면서.


말랑말랑한 대만 청춘 영화의 음악을 듣는다면서 왜 이런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그건 대만 영화음악에 대한 나의 애정이 대만 뉴웨이브에서 시작됐고, 대만의 청춘영화가 음으로 양으로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느껴서다. 80년대와 90년대 사이를 화려하게 물들인 대만 뉴웨이브가 세계 영화제를 휩쓸었지만, 정작 대만 내에서는 하품 나는 예술 영화로 외면받았고, 그들의 상업 영화 시장을 망하게 한 주범이라는 따가운 비난을 받았음에도.




허우샤오시엔, 이토록 찬란한 청춘이 사라지면 어쩌나


대만 영화 속 청춘의 이미지가 내 마음을 건드렸던 첫 번째 순간은, 뜻밖에도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다. 대만 근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간을 정곡으로 찌르지만, 평범했던 한 가족이 풍비박산 나는 과정으로 담담하게 풀어낸 이 영화에는 메이지 시대의 한 일본 소녀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이토록 찬란한 청춘이 사라지면 어쩌나. 언젠가 지나가버릴 청춘에 조바심을 내던 소녀가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절에 벚꽃처럼 사라지고 싶다면서 폭포에 몸을 던진 이야기. 시간 앞에서 늘 무기력한 허우샤오시엔의 청춘은 찬란하면서도 그토록 서늘한 구석이 있다.


<연연풍진> <쓰리 타임즈> <밀레니엄 맘보>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허우샤오시엔은 <비정성시>에 앞서 청춘의 서늘한 기억을 들춘 적 있다<연연풍진(戀戀風塵)>에서다. 그의 성장기 4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영화의 카피는 '성장의 기억, 청춘의 봄날 같은 사랑(成長的記憶 靑春的春戀)'. 1965년 작은 탄광 마을, 그 시절 그곳에 사는 열다섯 소년소녀는 졸업 후 가난한 살림에 돈을 보태기 위해 타이베이로 온다. 힘든 객지 생활이지만, 서로를 의지해 사랑일지도 모르는 미지근한 감정을 키워가던 두 사람은 소년이 군대에 가면서 헤어지고, 소녀는 그가 보낸 연서를 배달하던 우체부와 결혼한다.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달리 첫사랑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사랑. 뭔가 대단한 사건을 일으키기보다 곁에서 지켜보기를 좋아하는 허우샤오시엔은 커져가던 사랑의 감정이 쪼그라드는 순간을 묵묵히 화면에 가둔다. 진명장(陳明章)의 쓸쓸한 기타음에 담아서. 


대만 영화음악에서 가장 중요하게 쓰이게 될 기타, 그중에서도 어쿠스틱 기타는 <연연풍진>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의 장편 데뷔작 <환상의 빛(幻の光)>의 스코어를 작곡했던 진명장은 70년대 대만 대학가에 몰아쳤던 포크 가요의 유행 속에 그의 궤적이 남아있다. '기타를 연주하는 것이 사탕수수를 먹는 것만큼 좋았다'는 스물두 살의 청년은 군에 징집되면서 음악에 대한 흥미도, 확신도 잃어버리지만, 제대 후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고향에 기타 학원을 열면서 음악과 다시 연을 맺는다.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로서 음악을 업으로 삼은 그에게 대만의 음악은 과연 어떤 것인가, 라는 고민은 민요 가수 진달(陳達)의 노래를 접하면서 큰 영향을 미친다. 진명장의 포크 기타에 깊숙이 배인 민요의 감성과 짙은 향토색 그리고 서정적 정취는 그로부터 기인한다. 본토에서 출생했으나 대만인이나 다름없이 성장한 허우샤오시엔에게 정체성은 곧 영화의 화두였고,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청춘의 기억을 그의 아릿한 기타 선율에서 찾으려 했다. 


▶ 戀戀風塵(연연풍진)  - 진명장



<연연풍진>은 낭트 영화제에서 색다른 상을 받았다. 작품상이 아니라 음악상. 대만 영화의 음악이 외국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최초의 기록이다. 이 작은 사건은 향후 허우샤오시엔의 필모그래피가 디스코그래피와 얼추 비슷해지는 모종의 계기가 됐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무렵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한 뮤지션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다. 임강(林强)이다. 허우샤오시엔의 음악적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임강은 1990년 첫 번째 앨범을 내놓으면서 가수로 데뷔한 인물. 거칠고 반항적인 이미지로 유명했던 그가 감독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음악가가 아니라 배우로서다. <호남호녀(好男好女)>와 <희몽인생(戱夢人生)>에 출연했던 그를 <남국재견(南國再見,南國)>에 또다시 배우이자 음악 감독으로 발탁하면서,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는 현대로 진입한다. 록, 펑크, 엠비언트 계열의 음악 컴필레이션 앨범 같은 <남국재견>의 사운드트랙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세기말 청춘의 이미지라면, 그와 묘한 대구를 이루는 <밀레니엄 맘보(千禧蔓波)>를 지배하는 사운드는 테크노다.


<밀레니엄 맘보>의 오프닝. 허우샤오시엔의 청춘은 아름답고도 서늘하다.


2011년에 2001년을 되돌아보는 비키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지금 20대 후반이라면, 십 년 전엔 10대 후반이었을 그녀는 자신의 생일날 누군가 터뜨린 샴페인 마개와 중국산 폭죽처럼 맥이 없다. 그토록 아름다운 시간을 맞이했음에도. 찬란하다 못해 현란하기까지 한 그녀의 청춘은 이른 나이에 동거를 시작한 하오하오에게 묶여있다. 남루한 과거와 답답한 현재 그리고 불안한 미래. 어디로든 출구가 보이지 않는 비키의 삶은 무위도식하는 남친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테크노 음악처럼 권태롭다. 반복되는 루프와 차가운 전자음, 몽롱한 보컬로 현현하는 무기력한 청춘의 이미지.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죽이는 것처럼 보이던 그녀는 잭의 도움으로 결국 대만에서 벗어나지만, 일본에 거처를 마련해준 사내 역시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이라면, <남국재견>의 방황하는 젊은이들은 살 길을 찾다 논두렁에 차를 처박아 버렸지만, 비키는 눈으로 뒤덮인 유바리에서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것. 그녀가 터널을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오프닝의 나른한 일렉 기타음과 보컬은, 그래서인지 실낱 같은 희망을 품게 하는 영화의 엔딩곡 같이 들린다. 최종 기착지가 캘리포니아에서 홋카이도로 바뀐 왕가위의 <중경삼림>을 닮은.


▶ A Pure Person - 임강



세 개의 다른 시대와 공간으로 이루어진 <쓰리 타임즈(最好的時光)>는 에피소드마다 소제목이 붙어있다. <연애몽>, <자유몽> 그리고 <청춘몽>. 청춘의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한 대신, 각각의 에피소드를 사뭇 다른 스타일로 연출하는 허우샤오시엔은 작곡이 아니라 선곡으로 방향을 틀어 색다른 음악적 심미안을 보여준다. 향수를 자극하는 60년대 가요와 팝으로 첫사랑의 기억을 <연애몽>에서 수줍게 들춰봤다면, 1911년 항구 도시의 유곽을 무대로 삼은 <자유몽>은 무성영화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할 수 없는 시대를 한탄한다. 피아니스트 여국원(黎國媛)의 즉흥곡을 배경음악으로 깔고. 현대 타이베이로 무대를 옮긴 <청춘몽>의 남녀는 각자 연인이 있으면서 서로를 탐한다. 더 이상 설렘도, 기다림도 없는 시대. 고독과 속도감으로 가득 찬 도시의 서늘한 공기를 채우는 것은 대만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활동하는 뮤지션의 노래들이다.


선호도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세 에피소드 중 가장 달콤한 이야기는 <연애몽> 아닐까. 입대를 앞둔 청년이 한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이 에피소드는 플래터스의 노래로 시작해 아프로디테스 차일드의 곡으로 끝난다. 시작도 못한 짝사랑에 울적해진 첸이 당구를 칠 때, 그의 눈에 맺힌 물기는 아무 말 없이 떠난 야속한 소녀 때문이 아니라 눈에 스민 담배 연기 때문이리라. 그 순간 플래터스의 노래는 빛으로 다가선다. 그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온 또 다른 소녀, 슈메이처럼. 군대에 간 첸은 몇 달 뒤 짧은 휴가를 받아 당구장을 다시 찾지만, 슈메이는 더 이상 거기에 없다. 귀대일이 다 되어서야 겨우 그녀를 찾은 청년이 어색한 인사를 건넬 때 우리는 알고 있다. 첸이 얼마나 애타게 슈메이를 찾았는지. 또 그녀가 어떤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지. 비 오는 밤거리를 걷는 이 과묵한 연인들의 속내가 'Rain and Tears'에 살포시 포개진다. 빗물인 척 애써 감추는 눈물이지만, 그건 그대의 눈에 흐르고 있다고. 이젠 사랑의 눈짓을, 사랑의 대답이 필요하다고. 말없이 낀 손깍지는 그 화답일 것이다.


▶ Rain and Tears - Aphrodite's Child




여름날, 좌절 그리고 방황의 계절


인생을 사계에 비유한다면, 여름은 청춘의 계절이다. 한겨울에도 10도 아래로 수온주가 떨어지지 않는 영화 속 대만은, 그래서 내 눈엔 청춘의 나라로 보인다. 생동하는 젊음의 이미지를 정성스레 기록하는 성장영화가 그들의 필모그래피에서 자주 눈에 밟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리라 짐작한다.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채 현실의 문턱 앞에서 쭈뼛거리는 청춘의 날숨이 더욱 뜨겁게 느껴지는 것도 필시 그 때문일 터다.


<연습곡> <점프 아쉰> <여름의 끝자락>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진회은(陳懐恩) 감독의 <연습곡(練習曲: 單車環島日誌)>은 성장영화면서 로드무비다. 또한 극 영화와 다큐멘터리 사이에 절묘하게 발을 딛고 있다. 배낭과 기타를 짊어진 밍은 자전거로 섬나라 대만을 일주 중이다. 가끔씩 사람들과 대화를 방해하는 그의 청각장애는 큰 핸디캡이 아닐뿐더러 영화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보여주겠다는 야심 대신 청년이 지나가는 소도시의 풍경을 함께 바라보고, 거기서 조우한 인물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소임을 다한 영화는 타이틀에 딸린 부제목처럼 일기, 기록에 가깝다. 누군가 블로그에 올린 대만 여행기보다 더 소소한.


<연습곡>에서는 대만 뉴웨이브의 체취가 느껴진다. 영상이나 음악이나. 허우샤오시엔의 촬영 기사였던 진회은 감독은 <호남호녀>의 영화음악을 작곡했던 숨은 이력이 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메가폰을 잡은 대신 뉴에이지 음악가 리신윈(李欣芸)에게 전적으로 스코어를 맡긴 이 영화에서도 음악은 관망할 뿐 참견하지 않는다. 간간이 들리는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 소리는 밍의 깊은 속내보다 청년의 그윽한 시선에 먼저 가닿는다. 그리고 공명하듯 울린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무작정(인 것처럼 보이는) 자전거 여행을 떠난 밍에게 일주일의 방황은 자신의 한계를 증명하기 위한 모험도, 인생의 답을 구하기 위한 여정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허비한 청춘의 시간도 아닐 것이다. J.R. 톨킨이 썼듯, 방황하는 모든 이가 길을 잃은 것은 아니므로. 이 수더분한 청년이 짓는 마지막 미소는 누구보다 건강하고 아름답다.


▶ 出發(출발) - 리신윈



청춘의 좌절과 방황이라는 말에서 떠올릴 수 있는 온갖 클리셰가 <점프 아쉰(翻滾吧! 阿信)>엔 다 들어있다. 놀라운 점은 이 클리셰가 실화라는 것이고, 그 주인공이 이 영화의 감독 린유쉰(林育賢)의 형 린유신(林育信)이라는 사실이다. 체조선수를 꿈꿨으나, 소아마비로 인해 다리 길이가 달랐던 아쉰은 좌절하고 방황하다 거리의 폭력배로 전락하고,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돌아와 다시 체조복을 입는다.


도피하는 아쉰. 물구나무를 선 그의 눈에 세상은 뒤집혀 보이고 열차는 곧 컴컴한 터널로 진입한다.


<점프 아쉰>은 스포츠 영화로 힘차게 도약해 성장영화로 불안하게 착지한다. 하지만 그런 힘과 불안이 청춘의 단면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흥미로운 대목은 왕걸, 소혜륜, 두덕위의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8-90년대 홍콩 영화를 오마주하는 이 상업 영화에도 대만 뉴웨이브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는 것. 불안한 청춘들의 통과의례 같은 허우샤오시엔의 터널처럼, 아쉰은 터널을 지나 도피하고, 터널을 지나 돌아온다. 그리고 깨닫는다. 남을 이기는 것보다 자신을 이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걸.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는 천타이양(亂彈阿翔)의 록 넘버 '翻滾吧(점프)'와 주제가 '完美落地(완벽한 착지)'는 그렇게 치열한 여름을 보낸 뒤 다시 도약대 앞에 선 청년을 위한 송가다.


▶ 翻滾吧(점프) - 천타이양



약한 심장 때문에 잠시 학업을 중단한 가수 지망생 아웨, 미적분을 좋아하는 우등생이자 선생님을 사랑하는 문제아 화줜, 그런 화줜을 짝사랑하는 원리, 아버지를 따라 대만으로 전학 왔지만 학업에 적응하지 못해 5년째 학교를 다니는 아키라. <여름의 끝자락(夏天的尾巴)>에 등장하는 소년소녀들은 이제 끝나가는 여름도, 다가오는 가을도 반기는 기색이 없다. 늦여름 열기에 무력해지고, 어느새 거기에 둔감해진 것처럼. 분위기는 다르나, 이 영화의 메시지는 <족구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재미있으니까 하는 족구처럼, 여름의 꼬리를 흔들자는 아웨의 노래도 재미 때문이다. 어른들의 눈에는 하찮고 쓸모없어 보이지만, 열정을 쏟게 만드는 재미난 것들이 저마다 있다고. 학업이나 인생의 성공과는 상관없이. 나이브한 생각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서 정말 무용할까. 산다는 것의 기쁨 그리고 일상의 행복이야말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삶의 가치가 아닐까.


전문 영화음악가가 드문 대만은 영화에서 대중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제법 크다.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는 답답한 정치와 사회에 대한 해방구로, 개인의 욕망과 아픔을 토로하는 창구로 늘 대중음악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특히 독립 영화와 짝패를 이룬 인디 뮤지션과 싱어송라이터의 활약이 대만 영화에서 활발해진 것은 허우샤오시엔 이후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인다. <여름의 끝자락>을 만든 정원탕(鄭文堂) 감독도 다양한 밴드 뮤지션을 불러 모아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꾸몄다. 여러 이름이 눈에 띄지만, 그중 주목할만한 싱어송라이터는 정원탕 감독의 딸인 정의농(鄭宜農). 에노Enno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직접 출연했을 뿐 아니라 시나리오를 썼고, 다섯 곡의 자작곡을 보태 아버지의 영화에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영화에 진한 잔상을 남긴 그녀의 곡 하나를 고른다면, '小小的我(작고 작은 나)'. 앓고 있는 병과 음악에 대한 아웨의 심경이 전해지는 이곡은 담담한 멜로디에 감춰진 힘 있는 노랫말, 수수한 보컬이 참 좋다.


▶ 小小的我(작고도 작은 나) - Enno



퀴어, B면의 첫 번째 곡


거리낌 없이 꺼내기엔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꾸준히 말을 걸어오는 영화들이 있다. 퀴어영화다. 학원물과 나란히 성장해온 대만의 퀴어영화는 할리우드로 영화적 망명을 떠난 이안과 커밍아웃한 차이밍량의 90년대 작품들 이후 2000년대 대만 영화에서 낯설지 않은 소재가 됐다. 마치 레코드의 플립 사이드(Flip Side) 같은 이 영화들은 앨범의 타이틀곡은 못되더라도 B면의 첫 번째 곡으로서 충분한 지위를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대만 영화의 틀 안에서는.


<남색대문> <열일곱살의 하늘> <여친남친> <영원한 여름>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같은 반 친구를 좋아하는 몽크루의 하루는 고달프다. 여자이기에 남자를 좋아해야 한다는 자기암시를 하루에도 수없이 되뇌는 그녀는, 짝사랑에 괴로워하는 린위에쩐 앞에서 자신의 고민을 입밖에 낼 수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연애편지를 전하고, 가면을 쓴 채 함께 춤을 추는 것. 오로지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얄궂게도 위에쩐을 대신해 장시호에게 마음을 전한 몽크루는 되레 그의 호감을 사고, 그렇게 세 사람이 집어 든 사랑의 짝대기는 슬그머니 어긋나 버린다. 


사랑의 대상을 두고 이성과 동성 사이에서 먼저 고민해야 하는 몽크루에게 위에쩐의 가슴 아픈 짝사랑이나 장시호가 마음먹고 털어놓은 비밀은 차라리 행복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고민은 누구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것인가에 앞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에까지 가닿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색대문(藍色大門)>담담하게 처절하다. 학칙과 교칙으로 둘러싸인 파란 교문 안은 미성년의 세계다. 그 세계가 규정한 질서를 깨트리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절박하게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몽크루는 담벼락에 조용히 마음을 새긴다. 소리 없는 아우성 같은 낙서를. 푸가를 닮은 피아노 멜로디는 그 견고한 세계를 바라보는 허우지안(侯志堅)의 묘안이다. 바로크 시대의 푸가는 엄격한 질서와 체계를 미덕으로 삼았으므로. 그리고 작곡가는 한 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연습곡 형식이라는 디테일을 거기에 더한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풋풋하게도, 단조롭게도, 갑갑하게도 들리는. 수없이 연습해야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악곡처럼, 그녀 역시 '정상적으로' 사랑하기 위해 허허로운 다짐을 계속 되뇔 것이다. 비록 몽크루의 진심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익명의 낙서로 남겠지만, 장시호가 그 곁에 있었다는 것이 작지 않은 위안을 준다. 그녀가 교문 밖 세상으로 발을 딛기 전,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친구를 적어도 한 사람 얻었으니까.


▶ 序曲(서곡) - 허우지안



가끔씩 꿈에 나타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미지의 연인. 그런 멋진 인연을 꿈꾸며 타이베이로 상경한 티엔차이는 천하의 바람둥이 바이티에난을 만난다. 첫눈에 서로 반하지만, 전혀 다른 연애관을 가진 두 사람. 어렵사리 시작된 사랑에 시련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이별의 아픔을 겪은 후 티엔차이는 꿈에 그리던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 <열일곱 살의 하늘(十七歲的天空)> 진부한 영화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연애담과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적인 갈등 구조는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것이 남자와 남자 사이의 이야기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아무리 진부하고 뻔한 내용이라도 퀴어영화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순간, 낯설고 부담스러운 것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열일곱 살의 하늘>은 사랑스러워 보인다. 어둡고 쓸쓸한 영상과 감성에 호소하는 퀴어영화의 어떤 클리셰를 벗어나 오히려 상업 영화의 달달한 화법으로 말을 걸기 때문이다. 밝고 맑고 아름답게. 그리고 가볍고 유쾌하게. 


대만 뉴웨이브의 토양에서 자라난 퀴어영화지만, <열일곱 살의 하늘>은 그 영토로부터 가장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게이가 주인공인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어쩌면 지극히 '대만 뉴웨이브스러운' 환경에서 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반면교사도 영향이라면 영향일까. 예술 영화가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상업 영화가 부실한 콘텐츠로 오랫동안 외면받았음을 지적하며 대만 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진 진영용(陣映蓉) 감독은 퀴어영화가 표방하는 '다르지 않음'에 관한 이야기를 정말 다르지 않게 풀어낸다. 발칙한 아이디어지만, 감독이 야오이(やおい) 혹은 BL물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스물세 살의 신세대 여성이기에 가능했으리라. 칙칙한 인권 대신 화사한 판타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감독은 상업 영화의 달콤한 향기를 가장 먼저 음악으로 풍긴다. 스코어를 한 곡도 사용하지 않은 대신 오로지 삽입곡에 의지해 사운드트랙을 채운 것이다. 그것도 임억련(林憶蓮)에서 강미기(江美琪), 황립행(黃立行), 도철(陶喆) 등 중음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가수들의 명곡으로. 덕분에 영화는 저예산이지만 음악은 블록버스터급인 <열일곱 살의 하늘>은 대만 영화 OST 중 제일 몸값 나가는 앨범이 됐다.


▶ 褪色(퇴색) - 靈感(영감)



우리가 대만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한두 가지는 아니겠지만, <여친남친(女朋友男朋友)>을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는 1949년 대만 전역에 내려진 계엄령이 해제된 시점이 87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성혼에 대한 입법 문제를 아시아 최초로 거론했을 만큼 그들의 퀴어 커뮤니티가 의외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애국가(국기 게양)로 경직된 사회를 꼬집는 장면은 <고령가소년살인사건> 이후 대만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본격적인 퀴어물이 아니더라도 드라마와 코미디에 양념처럼 삽입된 퀴어 코드가 종종 목격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보수적이고, 지극히 진보적인 사회의 단면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대만이라는 땅 위에 아무렇지 않게 서로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기를 모두 겪은 양아철(楊雅喆) 감독은 이미 10년 전 <남색대문>의 원안이 된 소설을 쓴 인물. 몽크루와 장시호, 린위에쩐이 그랬던 것처럼 <여친남친>의 인물들을 둘러싼 삼각관계도 이등변 삼각형을 그린다.

 

<여친남친>의 시위 장면. 시와 음악이 중심이 된 교원민가의 정신은 90년대에도 일부 계승됐다. 

  

<여친남친>에는 약 30년의 시간이 담겼다. 긴 세월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들이 그렇듯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래가 하나의 영화적 장치로, 인물의 관계를 설명하는 의미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에겐 낯선 장르인 대만의 교원민가(校園民歌)가 등장하는 것은 그 대목이다. '캠퍼스 민속 가요'쯤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장르가 대만에 출현한 것은 70년대 초중반. 중국이 UN에 가입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UN에서 지위를 잃은 대만은 들끓었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자신의 문화를 돌아보는 사회운동이 펼쳐진다. 문학과 음악을 중심으로.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음악을 맡았던 진명장이 포크송과 진달의 민요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고령가소년살인사건>에 등장하는 엘비스 프레슬리나 <쓰리타임즈>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더 플래터스의 노래에서 엿볼 수 있듯 5-60년대 대만인이 즐겨 들었던 미국의 팝송 대신 '唱自己的歌(우리 자신의 노래를 부르자)'는 기치를 높이 세운 교원민가가 70년대 음악의 대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81년에 결성된 추추합창단(丘丘合唱團)은 강렬한 리듬과 허스키한 여성 보컬로 나긋나긋한 교원민가를 한층 대중적인 가요로 탈바꿈시킨 장본인. 이 그룹사운드의 등장으로 다양한 밴드 뮤지션들이 대만 가요계에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추추합창단이 해체된 후에도 리드 보컬을 맡았던 진지주안(金智娟)은 여성 싱어송라이터이자 로커로서 지금도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1985년에서 2010년까지 영화 속 시간을 관통하는 '河堤上的傻瓜(제방 위의 바보)'는 추추합창단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곡. 뽕짝을 섞은 디스코풍의 댄스곡처럼 들리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애처로운 가사는 사랑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이의 마음을 바보에 빗대 노래한다. 사랑을 내색할 수도, 그렇다고 받아줄 수도 없는 메이바오와 리암 그리고 아론처럼.  


▶ 河堤上的傻瓜(제방 위의 바보) - 추추합창단



영화의 내용이 주인공 이름에 복선처럼 깔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진정도(陳正道) 감독의 <영원한 여름(盛夏光年)>도 그렇다. 초등학교의 과학 시간. 행성과 항성과 혜성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교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싱(행성)과 쇼우헝(항성), 후이지아(혜성)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소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름처럼 누군가의 주위를 맴돌거나, 스스로 빛을 내거나, 갑자기 나타나 뜨겁게 타오른다. 우정과 애정의 궤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이들은 모두 다 누군가의 별이면서, 모두 다 외로운 별이다. 일본 퀴어영화의 고전 <모래알처럼(渚のシンドバッド)>이 테마라면, <영원한 여름>은 그 변주곡 같다. 이야기는 다르나 여러모로 비슷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작은 미동에도 다치기 쉬운 열일곱 동갑내기에게 사랑은 꿈과 낭만으로 가득 찬 로맨스가 아니라 불안한 청춘이 앓는 지독한 열벙처럼 다가온다. 그들의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여름이라는 것도, 그들의 공간이 쉬이 벗어나기 어려운 섬나라라는 것도. 


주지호(周志豪)와 양성쟁(楊聲錚)이 함께 만든 이 영화의 음악은 영롱한 음색이 가장 큰 미덕일 신시사이저로 대부분 만들어졌다. 그것도 23곡에 달하는 스코어를 작곡에서 녹음까지 단 2주 만에. 젊은 감독의 영화에 주어진 시간과 예산이 워낙 적어서였다. 그럼에도 영화에 빽빽하게 들어찬 음악은 별빛처럼 빛난다. 시간에 좇겨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선택한 신시사이저 사운드가 매력과 혼돈으로 가득 찬 이 청춘 영화에 얼추 들어맞기 때문이다. 음악의 완성도가 높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가소로울 만큼 성의 없는 곡 사이에서 때때로 강한 빛으로 명멸하는 임팩트 있는 스코어가 있다. 밤하늘의 별이 모두 찬란하게 빛나진 않는 것처럼. 이 앨범에서 그런 곡 하나를 고르라면, '我們真的都沒有失去嗎?(우리는 정말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두 남자의 베드신에 깔린 이 곡은 뮤지션보다 감독의 연출, 연출보다 배우의 연기로 음악이 한층 탄력을 받은 인상이 짙다.


▶ 我們真的都沒有失去嗎?(우리는 정말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 주지호 + 양성쟁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노래


청춘 영화의 대부분 청춘의 계절을 지나온 성인 감독에 의해 만들어지기에, 영화의 시선이 앞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만뿐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청춘 영화라도. 애틋한 첫사랑, 때 묻지 않은 순정, 설렘과 순수함에서 비롯된 크고 작은 사건들. 세피아 톤으로 물들인 어제의 기억이 스크린 위에 아련한 추억으로 되살아날 때 프루스트의 후예인 우리들은 저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난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노래와 함께.


<나의 소녀시대> <말할수 없는 비밀> <그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교정. 이 학교로 방금 전학 온 상륜은 미지의 선율을 따라가다 오래된 피아노 연습실에서 한 여학생과 조우한다. 그녀의 이름은 샤오위, 단아한 단발과 쓸쓸한 눈빛 그리고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미소를 지닌 소녀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멀어지고, 그리워하면 그리워할수록 숨어버리는 샤오위가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소년은 절박한 심정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시간을 넘나드는 마법의 악곡을 좇아서.


아마 여기서 부터일 것이다. 대만의 청춘 영화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 싹을 틔우기 시작한 건. 데뷔 초부터 대만 내에서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아이돌이자 싱어송라이터 주걸륜(周杰倫)의 이름이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7년간 가수로 활동하면서 변함없는 지지를 보여준 팬들을 위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배우와 감독까지 도맡은 그의 <말할 수 없는 비밀(不能說的秘密)>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만들어진 기획 영화의 성격이 강하다. 타임슬립이라는 소재를 선택했음에도 '그 시절'보다 '그녀'에 영화의 방점이 찍힌 것은 여성의 두터운 팬심을 고려한 결과일 터다. 여성들이 보고 싶어 하는 로맨틱 판타지를 충실히 재현하기 위해 대만의 전통적인 색채는 거의 희석됐지만, 영화가 건드리는 노스탤지어가 대만의 것임을 엿보게 하는 곡 하나가 눈에 띈다. 샤오위와 상륜이 레코드점에서 듣던 요소용(姚蘇蓉)의 '연인의 눈물(情人的眼淚)'이다. 원곡은 1958년 마카오 태생의 가수 반수경(潘秀琼)의 노래지만, 1969년 대만 여성 관객의 눈물을 쏙 빼놨던 영화 <정인적안루>에서 요소용이 부른 동명 주제곡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부잣집 도련님과 밤무대 여가수라는 신분의 차이가 사랑의 걸림돌이 되는 이 옛 영화의 정서는 비슷한 시기 <맨발의 청춘>에 눈물 흘렸던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진 않으리라.


▶ 情人的眼淚(연인의 눈물) - 요소용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서는 것은 때때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된다. 희미해진 기억을 들추다 그땐 몰랐던 행복,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 차마 용기 내지 못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서투르고 어리숙했던 지난날의 나와 마주치기도 한다. 9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닌 작가 구파도(九把刀)는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첫사랑을 만났다. 그리고 그를 소설로, 다시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那些年,我們一起追的女孩)>로 옮기면서 누군가를 처음 사랑했던 나를 추억한다. 


<늑대 7>에 배우로 출연한 대만 뮤지션들. 동방쾌차합창단, 왕걸, 태정소, 장우생, 성성월량태양(왼쪽부터)


카징텅과 션자이를 중심으로 같은 반 일곱 소년소녀의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영화는 신시사이저의 경쾌한 멜로디를 깔고 출발한다. 그들과 같은 90년대를 보낸 귀 밝은 관객이라면, 추억에 잠시 젖게 될 왕걸(王傑)의 '永遠不回頭(절대 돌아보지 않아)'. 국내에서는 90년대 초 홍콩 영화의 틈바구니 속에 조용히 개봉된 대만 청춘영화 <늑대 7(七匹狼)>의 주제가다. 지금은 사라진 대만의 음반 기획사 UFO그룹(飛碟唱片)에 소속된 가수들을 총출동시킨 기획 영화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거느렸던 왕걸을 비롯해 자동차 사고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싱어송라이터 장우생(張雨生), 3인조 걸그룹 성성월량태양(星星月亮太陽), 록밴드 동방쾌차합창단의 요가걸(姚可傑) 등 한때 중음권을 호령했던 대만 뮤지션들이 주연과 조연, 단역을 가리지 않고 등장한다. 20대 청춘남녀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의 주인공 역시 모두 일곱 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연한 선곡은 아닐 것이다. 또 그 곡이 지난 일을 후회하기보다 앞을 향해 달려가겠다는 청춘의 밝은 의지를 노래한다는 것도.


▶ 永遠不回頭(절대 돌아보지 않아) - 왕걸 + 장우생 + 태정소 + 성성월량태양



사랑의 루저끼리 의기투합했다가 연인이 된 주인공의 사례는, 멀게는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애딕티드 러브Addicted Love>가, 가깝게는 장동건과 김희선의 <패자부활전> 그리고 국내산 스크루볼 코미디의 걸작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찾을 수 있다. 세 작품 모두 개봉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들이다. 천위산(陳玉珊) 감독의 <나의 소녀시대(我的少女時代)>는 그 시간으로부터 멀지 않은 90년대를 배경으로 삼는다. 70년대를 그리워했던 90년대의 영화들처럼, 이제 90년대를 영화로 추억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스마트폰과 유튜브, 엑소는 없었고, 삐삐와 워크맨, 홍콩 4대 천왕이 있었던.


그저 그런 직장에 다니며 그저 그런 연애를 하다 어느덧 30대가 된 린전신은 회사에서도, 연애에서도 깨진 날 열여덟 살의 비망록을 들춘다. 세월이 야속한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라디오 디제이의 멘트는 멜랑콜리하기 그지없고, 그가 띄운 유덕화(劉德華)의 '망정수(忘情水)'가 촉촉해진 가슴에 쐐기를 박는다. 아는 사람은 안다. 홍콩 4대 천왕의 맏형 유덕화의 인기가 90년대 얼마나 뜨거웠는지. 사랑을 잊는다는 묘약 '망정수'는 그의 <열혈남아(旺角卡門)>에 버금가는 먹먹한 결말로 마음 싸하게 했던 액션 누아르 <천여지(天與地)>의 주제가였다. 20세기 초 마약 밀매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상하이에 파견된 유덕화는 아내와 동료를 모두 잃으면서도 임무를 완수하지만, 경찰의 배신으로 어이없이 숨을 거둔다. 남경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그가 최후를 맞는 엔딩에 깔린 이 비장한 주제가가 첫사랑을 소환하는 곡으로 선택받은 까닭은 필시 노랫말 때문일 터다. 그리움에 사무쳐 지난날을 회상하는. <나의 소녀시대>에 생기를 불어넣은 주인공이 린전신과 쉬타이위이라면, 유덕화의 노래는 영화에 반짝반짝 윤기를 낸 세 번째 주인공 아닐까. 2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추억하게 될.


曾經年少愛追夢 一心只想往前飛 / 어릴 적 나는 꿈을 좇았지 내 마음은 앞을 향해 날아갔어 

行遍千山和萬水 一路走來不能回 / 멀고 긴 세월을 지나 걸어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 수 없네

驀然回首情已遠 身不由已在天邊 / 문득 머리를 돌리니 사랑은 멀고 하늘 끝에 내 몸 가눌 곳 없네

才明白愛恨情仇 最傷最痛是後悔 / 비로소 사랑과 분노, 정과 증오가 가장 큰 상처, 고통이라는 걸 깨달았지

如果你不曾心碎 你不會懂得我傷悲 / 가슴 찢어진 적 없다면 너는 내 슬픔을 알 진 못하겠지

當我眼中有淚 別問我是為誰 / 내가 눈물 흘릴 때 누구를 위해 우느냐고 묻지 말아줘

就讓我忘了這一切 / 이 모든 것을 잊게 해줘

啊 給我一杯忘情水 / 아, 내게 한 잔의 망정수를 다오

換我一夜不流淚 / 눈물 흘리지 않는 하룻밤과 바꾸도록


▶ 忘情水(망정수) - 유덕화

작가의 이전글 그란데 모리꼬네 그란디시모 마에스트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