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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Oct 13. 2016

무성영화와 이별하는
채플린의 방식

모던 타임즈, 1936

유성영화가 대세로 기울었음에도 무성영화를 고집했던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은 1931년 <시티 라이트City Lights>의 개봉 홍보 차 고향인 영국을 찾는다. 할리우드를 너머 세계적인 배우로 발돋움한 그는 뜨거운 환대 속에 유명인사들과 만남을 가졌고,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에 머무르던 마하트마 간디와도 약속을 잡았다.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그의 존재를 알 리 없었던 간디는 배우와의 만남이 내키지 않았으나 그가 빈민가 출신이라는 것을 전해 듣고 마음을 돌린 터였다. 채플린 역시 간디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신문에서 읽은 몇몇 기사가 전부였다.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된 날,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눈을 반짝거리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플린은 뭔가 재치 있는 대화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 입을 뗐다. 독립운동가보다 기계문명 반대론자로서 간디의 생각을 묻는 것이었다. 그의 질문에 돌아온 간디의 말은 이랬다. 기술의 도움을 받아 세계가 진보하길 바라지만 인간이 희생되지 않기를 원한다고. 기계가 빨라질수록 거기에 얽매인 인간의 삶도 바빠질 수밖에 없다고. 기계가 인간을 부유하게 만들어 줄 순 있겠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진 않는다고. 최고의 독립이란 모든 불필요한 것을 떨쳐버리는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기계를 바라보던 채플린은 간디의 말뜻을 금방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온다. 그리고 산업화와 과잉생산이 초래한 대공황으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서 몇 년 간 생각을 정리했고, 그를 바탕으로 <모던 타임즈Modern Times>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다. 8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관객을 울고 웃게 만드는 코미디 영화의 걸작을.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이상한 질감의 영화다. 무성영화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유성영화의 느낌을, 유성영화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무성영화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유성영화가 첫선을 보이고 10년이 지난 시점. 대다수의 할리우드 영화사가 토키 영화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에도 무성영화를 향한 애정을 거둘 수 없었던 채플린은 <시티 라이트>부터 유성영화의 아성에 마음이 흔들렸다.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이 몰락한 이후에는 더더욱. 당초 <모던 타임즈>는 유성영화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으나 그는 돌연 마음을 바꿔 무성영화로 완성했다. 무성과 유성 사이를 서성이는 이 영화의 질감은, 그래서 쉬이 갈피를 잡기 어려웠던 채플린이 고심한 흔적으로 읽힌다. 


흥미로운 점은 유성영화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영화음악에 대한 채플린의 사랑 역시 깊어졌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30년대로 접어들면서 극장에 소속된 악단들이 하나둘 사라졌고, <시티 라이트>를 오케스트라 연주로 극장에서 상영하고 싶었던 채플린은 어쩔 수 없이 필름에 음악을 새겨 넣었다. 배우에서 작가로, 감독으로, 그리고 제작자로 자신의 영화를 스스로 통제해야 직성이 풀렸던 완벽주의자 채플린이 영화음악에까지 손을 뻗게 된 계기다. 12편의 장편과 4편의 단편을 포함해 전부 16편의 영화음악이 그에 의해 만들어졌다. <모던 타임즈>는 <시티 라이트> 다음으로 선보인 두 번째 영화음악. 채플린의 작품 중 가장 복잡하고 가장 사랑받은 스코어다. 영화에 감돌던 멜로디에 반해 냇 킹 콜Nat King Cole은 그를 'Smile'로 재탄생시켰고, 지금도 시대의 명곡으로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으니. 


유성영화 제작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므로 오케스트라도, 녹음실도 없었던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를 폭스 영화사의 레코딩 스튜디오를 빌려 제작했다. 1935년 11월 18일부터 12월 17일까지 한 달을 꽉 채워서. 길어야 열흘 정도를 연주와 녹음에 할애하는 다른 영화에 비하면 꽤나 긴 스케줄이다. 당시는 물론, 비용 때문에 일주일을 넘기길 꺼려하는 요즘 기준으로도. 뿐만 아니라 40명 남짓한 연주자를 고용했던 <시티 라이트>에 비해 그 두 배에 달하는 70여 명의 오케스트라 세션은 규모 역시 상당했다. 자신의 마지막 무성영화(일지도 모르는) <모던 타임즈>에 아낌없이 쏟아붓고 싶은 채플린의 선택이었으리라. 그러나 스코어의 연주와 녹음에 이렇게 시간과 규모가 늘어나게 된 까닭은 채플린의 독특한 제작 방식도 한몫했다.


<모던 타임즈>의 사운드트랙 ㅣ CPO(2015)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알았으나 악상을 악보로 표기할 줄 몰랐던 채플린은 영화음악을 작곡할 때마다 전문 음악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면, '음악적 제휴관계(Musical Associate)'로 맺어진 작곡가와 편곡자 그리고 지휘자는 채플린이 어떤 멜로디를 흥얼거릴 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음표로 바꾸고 가다듬어 악보에 옮겼다. <모던 타임즈>에 동원된 음악가는 모두 세 사람. 작곡가 앨프레드 뉴먼Alfred Newman과 편곡자 에드워드 포웰Edward Powell 그리고 조수로 갓 고용된 23살의 데이비드 락신David Raksin이다. 이들이 참여하면서 채플린이 마음에 품었던 음악의 색깔은 희석됐으리라 여기기 쉽지만, 그와는 반대로 꼼꼼하다 못해 까다로운 독재자로 음악가 위에 군림한 채플린은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수없이 고쳤고, 그것도 모자라 녹음하는 스튜디오에 나와 빨간 펜을 들고 연주자와 지휘자의 악보에 끊임없이 코멘트를 달았다. 필름 가장자리에 녹음된 사운드 트랙이 일부 남아 있었으나 영화음악을 음반으로 발매하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 없었던 <모던 타임즈>가 2015년 뒤늦게 앨범에 담길 수 있었던 것도 채플린의 빨간 펜 주석으로 뒤덮인 악보 덕택이다. 그의 의도를 충실히 재현하기 위해 음악가 티모시 브록Timothy Brock은 수천 페이지가 넘는 악보와 필름을 일일이 비교해가며 14개월에 걸쳐 이 영화의 음악을 복원해냈다.


축사에서 쏟아져 나오는 가축과 지하철에서 빠져나오는 노동자들의 출근길 풍경을 포개 놓으며 휘황찬란한 팡파르로 시작하는 'Opening'은 이내 조립 라인에서 쉴 새 없이 나사를 조이는 떠돌이(채플린)의 모습을 비춘다. 거대한 공장의 위용이 금관악기의 차갑고 웅장한 선율로, 기계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애쓰는 떠돌이의 바쁜 손놀림이 목관악기가 내는 날렵한 스타카토로 유쾌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이 유쾌함은 곧 악몽으로 바뀐다. 사장의 지시에 따라 더욱 빨라진 기계는 그를 삼켜버리고, 그 충격으로 넋이 나간 떠돌이는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되니까. 채플린은 기계의 스피드만큼이나 빠른 템포로 이 장면과 음악의 싱크로율을 맞췄다. 인간의 힘으로 연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속도로. 깨지기 쉬운 인간의 정신적인 고통을 음악을 연주하는 뮤지션(그리고 그 음악을 듣는 관객)에게도 분담시킨 것이다. 무자비한 악보를 본 숙련된 연주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채플린은 이 무성영화를 악단의 라이브 연주로 상영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감하며 극한의 난이도를 제시했을지 모른다. 유성영화의 유일한 장점이 음악을 마음대로 입히는 것이라고 그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으니까.


떠돌이와 짝을 이루게 될 말괄량이 아가씨 'Gamin'이 등장하면서 음악은 한층 드라마틱해진다. 바나나를 훔쳐 배고픈 아이들에게 건네는 당돌한 소녀의 모습이 실업자가 된 아버지의 표정과 겹쳐질 때 20년 뒤 히치콕의 스릴러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긴장스러운 현악 선율이 고개를 내민다. 암울함과 서스펜스가 동시에 서린. 채플린은 바이올린에서 일찌감치 범죄의 향기를 맡았던 것일까. 굶주림 때문에 빵을 훔친 그녀를 대신해 감옥에 간 떠돌이에게 따라붙는 음악은 이제 가보트(Gavotte) 스타일의 경쾌한 멜로디로 가난 속에 싹튼 로맨스를 꿈꾼다. 허름한 판잣집에 보금자리를 꾸민 두 사람을 흐뭇한 시선으로 지켜보게 만드는 'Shack of Paradise'에 이 달콤한 라이트모티프가 슬그머니 다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지금은 뻔한 기법이 되었지만, 오로지 감정에 초점을 맞추기도 벅찼던 초기 유성영화 음악들 사이에서 감정과 액션의 절묘한 균형점을 찾은 채플린의 스코어는 재미를 너머 혁신이라 할만하다. 


유성영화로 기획했으나 무성영화로 가닥을 잡은 <모던 타임즈>는 음악과 음향만을 녹음했지만, 몇몇 장면에서는 대사나 다름없는 소리도 들린다. 모니터를 통해 작업 지시를 내리는 공장 사장의 말이나 감옥에 간 떠돌이가 무심코 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성우의 목소리가 그것.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 모든 '대사'를 오로지 스피커나 라디오 같은 기계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대사를 대사가 아니라 음향의 일부로 바라봤던 채플린의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그러나 <모던 타임즈>를 무성과 유성이 혼재된 걸작으로 치켜세우게 만드는 장면 중 하나는 노래하는 채플린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흔히 '넌센스 송(Nonsense Song)'으로 알려진 이 노래는 레오 다니데프Léo Daniderff가 1917년에 발표한 'Je cherche après Titine'를 차용한 곡. 티틴이라는 아가씨에게 반한 한 사내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그린 폭스트로트다. 노래를 외울 시간이 없어 소매 자락에 가사를 써놓은 떠돌이는 춤을 추다 그를 잃어버리고, 결국 엉터리 불어와 이탈리아어를 뒤섞은 노래로 좌중을 폭소케 한다. 뜻을 몰라도 즐길 수 있는 무성영화, 그리고 비극과 희극을 교차시킨 눈물겨운 코미디를 사랑했던 채플린다운 명장면이다.


노래와 춤 그리고 비극에 대한 사랑으로 음악을 만들고, 그 모든 요소가 영화의 리듬이 되어 이야기로 읽히는 <모던 타임즈>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경찰에 쫓겨 거리에 나앉은 떠돌이와 말괄량이.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푸념에 떠돌이는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린다. 총총걸음으로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그들의 실루엣 뒤로 황홀한 멜로디가 휘몰아친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무성영화와 함께 채플린은 1915년 영화사 분장실에서 탄생한 떠돌이도 함께 떠나보냈다. 중산모와 콧수염, 지팡이와 커다란 구두로 영원히 기억될. 유성영화에서 말하는 떠돌이 캐릭터는 상상할 수 없다면서. <모던 타임즈>는 채플린의 마지막 무성영화이자, 주인공 떠돌이가 등장하는 최후의 작품이다. 두 사람이 걸어가는 길 아래 깔아놓은 음률은 무성영화에 아쉬운 이별을 고하는 채플린의 방식일 것이다.  




01 [05:11] Opening - Assembly Line

02 [11:21] Lunch Time - Charlie's Breakdown - Walker's Rally

03 [08:21] The Gamin - Jail

04 [15:24] Tragedy at the Demonstration - Out of Jail, Out of Job - Chance Meeting

05 [07:55] The Night Watchman - Skating - Intruders

06 [07:11] The Next Morning - Shack of Paradise - Race to Factory Gate

07 [08:14] Mechanic's Assistant - Lunch Break - On Strike - Gamin's Dance Sequence

08 [09:30] Reunion - Charlie the Waiter

09 [02:24] Titina

10 [04:12] Fin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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