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장장 Mar 07. 2022

025. 책,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제주도 무명서점에서 일일 책방지기를 하던 지난주, 이틀 간의 책방지기 기간 동안 한 권의 책은 읽어내리라 다짐하고 책장을 찬찬히 둘러보다 눈에 띈 책은 바로 이 책이었다.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시집 책방을 운영하는 시인 유희경의 일상 에세이를 보며 처음 경험해보는 책장지기의 삶과 바쁘게 요리를 하고 채워진 술잔을 내미는 광장의 일상이 더 가까이 떠올랐다. 


 다양한 사람들이 왔다가는 시집책방 위트 앤 시니컬의 나선형 계단의 입구는 백 년 된 건물의 좁다란 계단의 광장과 닮아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처럼 나선형 계단을 올라오는 손님의 머리끝부터 허리와 전신이 보이기까지의 입구를 시작해 서점을 둘러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보며 다양한 생각들과 혼잣말이 마치 내 것인 것처럼 생생히 느껴졌다. 


 나름대로 만들어 놓은 공간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아무나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장만의 취향으로 채워놓아도 어떤 공간이 될지는 이용하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이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새겨졌다. 이틀간 서점에서 이 책을 읽으며 서점을 이용하는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음식이 아닌 상품을 준비해 두고 책을 가지고 올 때까지 막연히 기다려야 하는 그 시간들이 낯설었지만, 책에서 본 어떤 순간들이 겹쳐 괜히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 조금 남은 부분을 남기고 책방 문을 닫았지만, 아쉬운 마음을 알았는지 일행이 끝까지 읽어도 좋다는 배려에 마지막까지 책은 선물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시'라는 건 막연히 어려웠다. 그 속에 무슨 뜻을 함유하고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는, 불안한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명확한 맺음이 아닌 사유의 미로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부쩍 몇 년간 시집을 선물 받는 일이 잦았다. 선물 받은 시집을 마냥 덮어둘 수만은 없어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곤 했는데, 그러다 만난 문장들에서 위로를 받으며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지만 시집은 여전히 가깝지 않은 친구의 친구 같은 존재다. 그래선지 이전부터 체크해 놓고, 신촌에 있을 때부터 한 번쯤 가 봐야지 했던 위트 앤 시니컬을 혜화로 옮길 때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빠른 시일 내에 방문하고 싶어졌다.  




*



p.112 좋아서 하는 일은 의식하지 않고 좋아했으면 좋겠다. 


p.121 자주 보던 이가 나타나지 않으면 걱정이 앞선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음악을 바꾸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그들.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으므로 이러한 불안을 냉큼 구겨 던져 버리지만, 오래지 않아 그중 누군가가 찾아오면 은근 심통이란 것이 생기기도 한다. 때론 나도 모르게 투정 어린 안부를 전하곤 한다. 그럴 때 그도 나도 동시에 무안해진다. 서점은 그저 책을 '판매'하는 '가게'라는 것을. 그들은 내킬 때 찾아오는 '손님'이며 서로에게 아무런 의무가 없다는 것을 잊기도 하는 것이겠지. 아마도 나는 서점에는 무언가 특별한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p.165 제법 손때가 탄 걸 보니 퍽 아끼는 모양이네. 사소한 것을 아끼는 사람들은 어쩐지 신뢰하게 된다. 나와의 인연도 닳디 닳을 때까지 아껴줄 것 같다. 


p. 172 수백 년 전에 쓰인 책과 바로 어제 출간된 책이 나란히 놓여있다. 유통기한 없음. 그것 스스로 소멸되지 않는 한, 제 아무리 철 지난 사유일지라도 책은 썩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러니 그것을 찾는 사람들도 각양각색이다. 



p.174 뜬금없이, 오늘도 서점 문 열길 잘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언제가 가장 힘드세요? 아까 어린이의 질문 중 하나. 당황해서 글쎄... 하고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었다. 사실 별로 힘들지 않아. 꽤나 멋진 일이 심심치 않게 많거든. 




좋다고 생각하고 쓴 문구들은 내가 광장에서 손님을 맞이하며 느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긴 것 같다. 특히 단골손님이 한참 오지 않을 때, 그리고 그를 떠올린 지 얼마지 않아 왔을 때 부리는 괜한 심통이 그렇다. 투정 어린 안부와 무안함. 광장도 그저 음식을 '판매'하는 '가게'라는 것을. 그들은 내킬 때 찾아오는 '손님'이며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잊기도 했나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024. 골 때리는 그녀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