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결핍
인도에서의 생활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꼭 우연한 것은 아니었으나 뜻하지도 않은 일이었기에 얼떨결에 시작한 파견 생활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에 간 것을 제외하고 외국 생활은 처음이었지만, 8년 전 왔던 배낭여행 덕분인지 인도의 혼돈은 익숙했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 일주일 간 숙식을 모두 해결했을 금액으로 하루 방값을 치르는 호사스러운 생활이 새삼스럽기도 했다. 6개월이라는 기간이 썩 긴 시간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고단한 양육의 의무를 전적으로 부모님께 맡기고 떠나오기에는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었다. 게다가 결혼한 지 5년 만에 관계들로부터 멀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인도 여러 지역에서 일하던 주재원들의 귀임 환송회가 있었다. 각자 3~4년 간의 주재기간 동안 좋은 점과 힘든 점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맡은 업무도 다르고 업무 환경도 달랐지만 하는 이야기는 전부 같았다. 인도에 처음부터 오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어쩌다가 오게 되었고, 거친 환경이었지만 견디며 지내다 보니 크고 작은 성과를 이룰 수 있었으며 가족, 동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지나고 보면 다 추억이고 앞으로의 인생에 밑거름이 될 거라는 그런 이야기. 삶의 진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과 다름 아닌 이야기이겠으나, 어쩐지 군대 전역 소감을 듣는 것 같기도 하여 조금은 쓸쓸해졌다. 아마 나의 이야기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겠지.
대학에 다닐 때 과에서 단연 돋보이던 동기가 있었다. 언젠가 그가 쓴 리포트를 읽고 나와의 수준 차이에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하지 않겠냐는 예상을 뒤엎고 기자가 된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고, 문화부에 배치받은 그가 써내는 문학 관련 기사들은 역시나 탁월했다. 그런 그가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기자를 그만둔 것은, 그러나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는 것은 그가 섬세하게 적어 내린 글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안타깝게 느껴진 것도 있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 친구의 타임라인에 얼마 전에는 시로 등단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이번에는 기자로 복직했고 그것도 다시 문화부로 돌아왔다는 반가운 글이 올라왔다.
어쩔 수 없이 기자직을 그만두어야 했을 때 그는 가족이 모두 잠든 밤에 혼자 깨어 글을 썼다고 했다. 글쓰기가 지닌 치유의 힘을 모르지는 않지만, 생활인으로서 백지를 마주하며 문장을 이어 붙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알기에, 매일 밤 그를 책상 앞으로 이끈 동력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한다. 삶이 주는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외치고 싶은 욕망이었는지, 아니면 둘 다 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떤 절실함이 있었으리라는 것만 짐작해볼 수 있다. 운명의 굴레 속에서 그가 내린 선택들은 그를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게 했고 그가 그리는 삶의 궤적에는 분명 뭉클한 면이 있다.
단지 같은 과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그와 나의 삶을 비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에 대한 고민을 차치한다면, 그와는 달리 나의 선택들은 나를 제자리에 머물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핍의 결핍, 이라는 이야기를 함께 일하는 형으로부터 들은 것은 한참 전이다. 욕망의 기저에는 결핍이 있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절실함도 생겨나는 것일 텐데, 나에게는 그 결핍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나의 욕망에는 절실함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키친테이블 노블’이라는 단어를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에서 보았을 때도, 신간이 나오면 챙겨보는 어느 소설가가 실은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직장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늦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책상에 앉아 백지를 마주 했던 일은 내 기억에 없다.
결핍의 결핍이라는 말을 오랫동안 곱씹어 왔으나, 그것이 어떠한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욕망은 생기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 다만 삶이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그럴듯해 보이는 손쉬운 대답들을 이어갈 때 내가 끝내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안다. 삶에서 꼭 무언가를 증명해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지만, 적어도 어느 한순간에는 내가 그리는 삶의 궤적이 스스로에게 납득될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삶이 던지는 물음에,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니라 꼭 하고 싶은 대답을 한 번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때 나의 이야기는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