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음식
"수박이요, 수박. 달고 싱싱한 수박이 왔습니다”
수박 트럭이다.
엄마가 단출한 지갑 하나를 챙겨 들고 나서면
나도 수박만한 웃음을 짓고 따라나선다.
맛있는 수박 하나 달라고 하면 그냥 주는 법이 없다.
아저씨들은 과도로 수박에 삼각형 인증마크를 새겼다.
작은 과도에 삼각뿔 모양의 맛보기 수박이 쭉 끌려 나오면 그걸 먹어보고 샀다.
맛없는 수박이 걸려서 손님이 삼각뿔만 먹고 안사가면 어쨌을까? 지금 생각하면 짜릿한 생각이 들지만
아저씨들은 한치의 주저함이 없었다.
요즘 마트에서 수박을 살라치면, ‘수박 겉핥기’라는 말을 실감한다.
‘밑 부분의 배꼽 모양이 작고, 검은 줄이 선명하고, 검은 줄 위에 혈관같이 줄이 뽈록 올라온 것이 달다’는 등의
수박 고르기 노하우를 따라해보지만 수박을 딸 때까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가끔 대범했던 아저씨들이 그립다.
수박의 꽃말이 ‘큰 마음’이라는데,
수박 아저씨들은 큰 마음을 가졌었나 보다.
수박은 아프리카가 원산으로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재배되었다고 하고,
우리나라에는 인도, 중국을 거쳐서 고려 때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단다.
수박의 한자 이름이 ‘서과(西瓜)’, 즉 ‘서쪽에서 온 박’인 이유다.
조선시대에는 수박 한통이 쌀 다섯 가마 정도에 해당되었다 하니,
지금처럼 수박 빨리 먹기나 하며 여유 부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정성스럽게 화채로 만들어 먹었다.
오미잣국에 넣어 양을 많게 하려는 의도도 없잖아 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화채(花菜)는 ‘꽃나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화채를 만들 때 꽃은 중요한 모티브다.
국어사전에도 "“꿀이나 설탕을 탄 물이나 오미잣국에 과일을 썰어 넣거나 먹을 수 있는 꽃을 뜯어 넣고
잣을 띄운 음료”라고 되어 있다.
나도 오랜만에 수박꽃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동그랗게 파내던 스쿱은 끝내 못 찾았다. 대신 외할머니께서 당근 등을 모양낼 때 쓰시던 틀을 찾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꽃 모양이다.
가격 할인을 하길래 사 본 망고수박이라는 것 덕분에 노란 꽃잎도 보게 되었다.
수박에 모양 틀을 올리고 내리면, 오드득 샤드득 눈 밟는 소리가 난다.
더위에 듣기 좋은 배경음이다.
<재료>
수박, 사이다, 민트 잎
<방법>
1) 수박 속을 모양낸다.
동그랗게 파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는 집에 모양 틀이 있어서 활용했다.
손쉽게 한 잎 크기로 깍둑썰기 하기도 한다.
2) 1)을 그릇에 담고, 시원한 사이다를 부은 후, 민트 잎 등으로 모양을 낸다.
전통적으로 하자면, 오미잣물(건오미자를 물에 우려내거나, 오미자청을 물에 풀어 냄)을 붓는다.
우유를 넣기도 하고(최근에는 딸기 우유를 넣는 것이 유행인가 보다.)
어렸을 때는 쿨피스를 넣어 먹기도 했다.
요즘에는 큰 수박을 언제 다 먹을까 싶고, 껍질 처리가 곤란해서 잘 안 사 먹는다는 말이 쉽게 들린다.
씨 없는 수박도 모자라 껍질이 얇고 미니호박만한 망고수박이 개발된 것도 이런 소비형태 때문이라는 것도 읽은 적이 있다. 마트에 가면 소분해서 랩을 씌어 파는 수박도 있다. (그렇다고 옛날처럼 맛보기용은 아니니 수박 겉핥기로 구매하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
수박은 씨가 많아서 다산을 뜻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에도 수박이 나오는데, 이것이 현재 5,000원 뒷부분에 그려져 있다.
‘되는 집에는 가지 나무에도 수박이 열린다’는 속담은 ‘잘되는 집에는 가만히 있어도 좋은 일이 저절로 생긴다’는 뜻이란다. 그만큼 수박은 풍요의 의미였단다.
작은 혹은 잘린 수박을 지나, 굳이 수박 한 통을 산다.
질펀하게 앉아서 격의 없이 파먹다가 수박 국물을 호로록 거려도 좋고,
삼각형으로 잘라 뾰족한 곳부터 베어 먹어도,
눈 밟는 소리를 들으며 모양을 내도 좋을 것이다.
더워서 그런지 쉽게 지치는 요즘에
두 팔을 쫙 벌려 큼직한 수박 만한 공간을 만들고
그것이 가진 여유와 큰 마음을 가득 품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