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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Aug 30. 2017

내가 쓰던 물건들

“손대지 마시오”

메리야스 박스 뚜껑에 붙은 연노랑색 도화지에 해골 그림이 곁들여진 경고문이 있었다. 그 의도는 미라의 무덤을 만든 사람처럼 비장했던 것 같은데, 다음의 노래를 조그맣게 불렀을 것이 쉽게 상상되었다.

‘(해골을 그리며) 아침 먹고 땡, 저녁 먹고 땡,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오네요~’

경고문의 효과 덕분인지 먼지가 쌓일 시간 동안 손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했다. 이제 때가 왔다. 미라의 저주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 안에 든 보물에 대한 탐욕이 더 큰 법, 주저 없이 박스를 열었다. 20년 남짓 닫혀 있던 박스의 뚜껑을 들어 올리면서, 오래된 관절이 움직이듯 끼이이익~~ 소리를 내는 돌문을 상상했다.


'어린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낸 물건들


짜임새 있게 꾸린 여행가방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어 펼쳐놓았다. “이건 뭐람” “그래 그랬었지!” 하는 소리가 물건 하나 들어 올릴 때마다 따라붙었다.

 

문구류가 많았다. 그중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강시 캐릭터다. 강시는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까지 국민학생들로부터 뜨거운 인기몰이를 했었다. (맞다. 나는 옛날 사람이다. 강시 이야기를 알아듣는 당신이라면 나와 같다.) 중국옷을 입고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채 두 발로 콩콩 뛰는 좀비 캐릭터를 좋아했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꽤 소름 돋는 일지만, 당시에는  캐릭터가 들어간 문구류나 스티커를 갖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도 꽤 있었다. 그중에는  생일파티 초대장도 있었다. 과연 이 초대장 복사본을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보냈을까?

‘안녕하셔요? 생일이 얼마 안 남았는데 참석해주셔요.’

어린이답지 않은 꽤나 정중한 말투이다. 초대의 말 반대편에는 ‘메뉴 아닌 ‘식단’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과일, 떡볶이, 과자, 사탕, 음료수, 잡채 등이다. 그  생일파티를 했었을까? 아마 했을 것이다. 매번 이렇게 파티 초대장을 보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누구를 초대하고, 누구에게 초대받는지가 그 당시 꽤 중요한 문제였던 건 분명히 기억난다. 받았던 선물은 기억이   나지만, 내가 주는 선물은 비슷했다. 연필 12 들이  다스였다. 생일선물로 연필 한 다스가 그렇게 환영받을만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신 엄마가 특별하게 포장해서 손에 들려주었다. 연필을  개씩 포장해서 위아래를 리본으로 연결하는 식이다. 포장 덕분에 특별해진 선물을 들고 가면 왠지 체면이 서는 기분이었다.

 

걸스카우트 대원 회원증도 찾았다.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인 어느 날, 예쁜 원피스를 입고 성당에 쿠키를 팔러  언니들에게 첫눈에 반했었다. 학교에 가면  걸스카우트에 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 걸스카우트는 4학년 때부터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원자들은 많고 단원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성적순으로 기회를 줬다. 그 당시  성적은 그 정도로 상위권이 아니었다. 게다가 낯을 심하게 가리는 나머지 동네에서는 활달하고 학교에서는 조용한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스카우트 수요 조사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칠판으로 나가서 이름을 적었다. 아마 인생에서 처음으로  용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만약 그때 걸스카우트를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담임선생님께서 나에게 특별하게 기회를 주셨던  같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학교에서 말수는 많지 않았지만, 소원하던 것을 하게 된 성취감 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살던 연립 단지는 16가구가 거주하는 2층짜리 건물 4개 동만 있었다. 널찍한 놀이터도 있었고, 차의 통행도 적었다. 고만한 나이의 어린애들이 많아서 매일 미친 듯이 뛰어놀았다. 어찌나 뛰어다녔던지, 온 힘을 다해 밀어내던 지면의 촉감이 발바닥에 인이 박혀 아직도 느껴진다. 해가  여름에는 어른들이  먹어라, 이제 그만 들어와라, 여러 번 불러도 노는데 열중하기 일쑤였다.

‘엄마 늦게 들어와서 미안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숙제했습니다. 답장 줘요’

이 메모를 보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놀다가 늦게 들어간다고 혼나기는 마찬가지였구나 싶다. 지금 엄마에게 보여주고, ‘사람이 바뀌기 쉽지 않다’는 증거로 내밀만 하다. 당시에 메모는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방법이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없으니, 갑자기 외출을 하게 된 엄마는 다급한 와중에 메모를 남겼을 것이다. 잡히는 대로 집어 든 종이  켠에 껌을 뱉어 놓듯이 급히 적어 놓은, 짧지만 다정하고, 소소하지만 힘 있는 당부의 말. 그 말을 기억하려고 하자  짧은 메모만으로도 부재를 느낄  없이  찼던 기분이 느껴졌다.

 

자물쇠를 잃어버린 열쇠 뭉치, 다람쥐도 아닌 것이 박스에 묵혀  도토리, 동물 퀴즈 카드, 온 동네를 주름잡을  사용했던 공기놀이 알, 어디에 쓰려고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명함들도 있었다.


20 전쯤에 내가 쓰던 물건들이다. ‘사람은 참 유한한 존재구나’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핸드폰의 용량이 가득 차서 더 이상 새로운 사진 한 장 찍기 힘든 꼴이었다. 그래서 뭐든 비워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박스를 정리하면 나아질까 싶었다. 맞았다, 더 이상 강시 스티커나 도토리는 필요 없었다. '어린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낸 것은 마종기 시인이 쓴 '바람의 말' 같은 것이었다.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마종기, 바람의 말 중-

그동안 한 번도 박스를 열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십수 년 동안 못 봤던 친구를 길에서 우연히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 순간에 어린 시절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기억이라는 심연에서 물건을 건져낼 때마다, 선명하게 따라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세심한 관심과 무한한 애정으로 이만큼 지내왔다는 것이었다. 같은 이치로 내가 알지 못한 때에도 누군가는 지금도 나를 응원해주고 기도해준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힘이 났다. 박스를 정리하는 내내 따뜻하고 눈이 부실 정도로의 환한 기운을 느꼈다.


내가 쓰던 물건들로 얻은 기운 덕분에,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잘 쓰였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그러니 나는 꽤 유한할지언정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무한해질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손대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었던 상자에 손을 댄 것은 참 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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