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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Oct 28. 2017

안녕, B712

나만의 공간은 그런 것이었다.

늘 나를 궁금해하는 전화 너머 본가에다는 곧 잔다고 말하고, 밤 새도록 좋아하는 노래를 방이 울리도록 틀어놓고 와인을 홀짝이면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들어가고 싶을때, 자고 싶을 때, 먹고 싶을 때, 나만의 리듬대로 출렁이는 자유가 좋았다.

내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이 빠지는지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장, 설겆이 거리에서 곰팡이를 피우는 생물실, 그리고 왠지 감성적인 날, 못 부르는 노래를 멱 놓아 부르거나, 감동적인 글을 보고 꺼이꺼이 울거나, 낄낄댈 수 있는 난장이었다.

5년 동안 두 번 크게 운 적이 있다. 몇 시간 동안 쓰러져 울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 공간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눈치가 보여서 또는 걱정할까봐서, 방 불을 끈 이불 속에 펄떡이는 울음을 던져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목덜미를 꾹 틀어잡고 있었을 것이다.

혼자 사는 집에는 TV가 없었다. 수 십년간 집에 들어가면 보건말건 TV부터 켜 놓던 나였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딱 5개월만에 ‘실시간’ ‘동시간’의 사람 소리가 그리웠다. 비디오가 라디오를 죽였다고 한탄하는 노래(video kills radio star)도 있지만, 라디오 산업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을 확신하게 됐다. 이따금 식당에서 나오는 YTN 뉴스에서 눈을 못떼고 정말 재미있게 보기도했다. (YTN 뉴스는 몇 개 뉴스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전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도 그때다.) 그럼에도 끝까지 TV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의외로 혼자 있는 시간을 갈급하는 나에게 집은 쾌적한 동굴이었다. 이 곳에 이따금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었다. 늘 쑥스러웠지만 반갑고 좋았다. 그들은 사람이 없어서 덩그런 공간을 솔직한 말투와 따뜻한 숨으로 채워줬다. 내가 며칠간 잠을 못자던 날 찾아와 밥 먹이고 잘 자라고 해주던 친구도 기억한다.

그런 저런 기억을 담은 B동 712호. 어린왕자의 별이 B612인데, 내 것이 B712라고 특별하게 생각했었다. 어린왕자가 제 별을 떠나 여행했듯이, 나도 B712를 기꺼이 떠나기로 했다. 언제인가 별에 두고 온 나만의 꽃을 다시 그리워하고 찾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쉬움이 없다.

그래서 이 남향 볕이 잘 드는, 온통 하얗고 선한 나무색을 띤 덩그런 복층 원룸과 고맙고 가벼운 마음으로 마지막 악수를 한다. B712의 붉은 꽃이 화답하는 것을 느낀다. 따뜻하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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