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물이 품은 애절한 이야기들을 찾다
산과 물이 깊숙이 자리한 곳에는 늘 가슴 아린 이야기가 있다. 탁 트인 곳에서 풀어 놓을 수 없을 어떤 마음들을 조용히 감싸 안아주기 때문일까. 산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좇아 만화책을 들고 달려간 이번 여행지는 강원도 영월, 그리고 그 곁의 충청북도 단양이다.
독특하고 독특한 힐링 만화, <달이 내린 산기슭>
세상 어떤 만화에 그 나름의 독특함이 없으랴만, <달이 내린 산기슭>은 그 중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축에 속하는 만화다. 다른 무엇도 아닌 ‘지층’을 주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 그 지층과 산을 의인화해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 작가 본인이 지층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라는 점이 그러하다. <달이 내린 산기슭>은 작가가 실제로 연구했던 대상 지층 가운데 하나인 ‘흥월리층’을 소재로 삼은 만화다.
작품의 주인공은 지질학자 ‘오원경’. 전국의 산을 돌며 화석을 캐 팔기도 하는 지질학 박사다. 오원경은 거의 10년 만에 들른 어떤 곳에서 문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만난다. 구름 한 점 없어 보이는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은 길옆의 암석층 노두를 때리고, 십 년 감수한 표정으로 길 위에 떨어진 낙석을 어떻게 좀 치워볼까 하던 원경의 뒤에 갑자기 한 소녀의 형체가 공중에 나타난다. 눈을 뜬 소녀는 왜 떨어져 나왔나 영문을 알 수 없어 하며 다시 바위 속으로 스며들어가려 하지만, 어째서인지 들어갈 수가 없다.
원경은 소녀가 동네 돌이나 바위에 깃든 정령인 줄 알았지만, 정작 소녀는 자신을 이 일대 지층인 흥월리층의 정령이라고 소개한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오원경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소녀가 본래 깃들어 있어야 할 ‘흥월리층’이란 지층은 10년 전 조사를 통해 영월층군으로 대체되었고, 지층 구분을 바로 잡기 위해서기는 하나 흥월리층이라는 이름은 사라졌기 때문. 지층명이 비록 인위적인 구분이긴 하나, 부여받은 이름을 잃은 지층의 정령에게 돌아갈 곳은 없는 셈이다. 미안한 마음이 드는 원경에게 지층의 정령은 오히려 쾌활한 표정으로 이렇게 된 이상 놀러 다녀야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너, 안내해라!” 우연히, 사실은 우연만은 아니었던 소녀와 남자의 여행기는 이렇게 엉겁결에 시작한다.
‘지층의 정령’에 ‘산신령’까지 등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층과 화석 등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튀어나오지만 이 만화는 어디에도 이러한 점들에 강세를 넣지 않는다. 미소녀들이 많이 나오지만 성적인 부분을 부각하지도 않는다. 별다른 갈등 구조를 억지로 넣지도 않고, 판타지스러운 부분도 마치 원래 그런 것인 듯 묘사되며, 전문 지식 또한 독자들에게 부담을 안기지 않는 선으로 등장한다. 등장인물 어느 누구도 악당은 없고, 전체를 아우르는 감성은 시종일관 따스함을 잃지 않으며 누구 하나 상처 입히지 않는다. ‘월리’라 불리는 흥월리층 정령과 오원경의 여정 또한 마냥 조용조용히 이어진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독자의 흥미를 잃지 않고 마무리까지 달려갈 수 있는 건 시작부터 일찌감치 흥월리층은 사라졌으며, 이에 따라 ‘월리’의 수명 또한 곧 끝날 시한부라는 점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던지는 데에까지 독자를 데려가는 작가의 솜씨가 실로 쫄깃한데, 막상 현실에서 그 흥월리층을 없애는 논문(《단양군 어상천면 삼태산 부근 캄브리아-오르도비스계의 층서》, 2001.06, 고생물학회지 제17권 제1호 pp23-24)을 쓴 당사자가 바로 이 작품을 그려낸 작가 본인이라는 점을 알고 보면 독자들은 웬만한 복선을 층층히 꼬아 넣은 추리물을 보는 것만큼의 충격을 접할 수 있다. 작가의 페르소나가 작중의 오원경이기에 더욱이 그러하겠다. 결론을 시작부터 알려줘 놓고도 사람들을 끝내 무장 해제시키는 작품의 힘을 독자 여러분도 꼭 한 번 느껴 보시길 바란다.
흥월리와 흥월리층을 찾아가다
오원경과 함께 작중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녀 ‘월리’는 앞서 언급하였듯 ‘흥월리층’의 정령이다. 흥월리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자리하고 있는 지역명으로, 흥월리층은 작가가 논문으로 이 지층명을 없애기 전까지 영월과 단양 사이에 걸쳐 있는 지층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작중에서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원경과 월리가 처음 만난 곳은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이다. 그리고 월리의 이름을 따 온 흥월리는 강원도 영월군에 있다. 충청북도와 강원도라 하니 매우 멀어 보이지만 남서 방향으로 태화산을 넘어서면 바로 닿는 곳이다.
예상은 했지만 월리의 이름이 온 흥월리는 지금은 사라진 지층의 표식지라는 점을 빼면 특별히 볼 만한 게 있는 곳은 아니었다. 다만 등장인물 이름의 출처(?)를 확인한다는 기분으로 한 번 들러보기로 한 셈이다. 마을에 선 안내판에 따르면 흥월리는 태화산 자락에 자리한 곳으로 본래 영월군 남면에 속해 있었으나 1973년 7월 행정구역 개편 당시 영월읍으로 편입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달골, 큰골, 장승개 등 부락 이름들에 우리식 땅 이름이 많이 남아 있는 게 특징인 곳으로 궁예가 첫 출가지인 ‘흥교사’라는 절도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 마을 규모는 102 가구에 주민 수 395명 가량. 산 중턱에 자리한 마을 입구에 “범죄 없는 마을, 풍요로운 고장”이라 적힌 장승이 둘 서 있었다. 길 한 자락에 노두가 있어 혹시나 했지만 월리의 주 구성 성분(?)이라 할 수 있는 돌로마이트와는 거리가 있는 암석이었다. 다소 아쉬웠지만 지질학 시간은 아니니, 이름의 출처를 확인한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흥월리층이라는 지층명을 사라지게 한 연구의 대상지이자 작중 월리와 원경의 첫 만남 장소인 단양 어상천면은 수박이 특산품인지 입구마다 수박 조형물이 서 있었다. 온달장군 설화의 무대기도 해서 온달과 평강의 조형물도 함께 있는 게 이색적이었다. 역시 작중에서 위치가 정확히 묘사가 되지는 않으나 전개 중 중요한 키워드 둘이 보인다. 하나는 519번 국도. 또 다른 하나는 삼거리. 다시 말해 어상천면을 통과하는 519번 국도변에서 갈림길이 나오는 지점이 <달이 내린 산기슭> 첫 화의 주요 장면에 나오는 그곳이라는 이야기다.
이를 토대로 찾아낸 곳은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 심곡리 산11-3. 심곡삼거리 근처에 자리한 노두다. 작중에서는 안전망 없이 도로변 바로 옆에 노두가 있었고 벼락이 떨어지며 길가에 낙석이 널리는 묘사가 있지만 작가의 논문이 발표된지는 17년, 작품이 발표된 지도 벌써 5년이 넘었으니 시간차를 감안하면 될 듯하다. 실제로는 안전망이 있기에 안전하기도 하다. 작중 묘사에 등장하는 버스 정류장도 삼거리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여행을 간 7월 24일은 비껴간 태풍이 몰고 온 습기 덕에 그야말로 전국이 찜통이 되어가던 때라 그 시간에 돌아다니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긴 했지만, 그 덕에 작품 속 분위기를 고스란히 재현해주고 있었다.
기왕 온 김에 지층 탐색하는 기분을 따라하려면 흥월리가 있는 태화산(1027.5m)과 어상천면 쪽의 삼태산(878.2m), 그리고 작중 내내 월리네의 조력자(?) 노릇을 하는 태백 쪽의 함백산(1572.1m)을 올라볼 법도 했지만 여행 전 아내가 “이 더위엔 등산하다 죽는다”며 말렸기에 얌전히 있기로 했다.
영월 운해, 그리고 단종의 자취를 찾아
내가 영월에 가 본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맨 처음엔 아는 분 가족의 장례식 참석차, 그리고 두 번째엔 특강 의뢰를 받아 학생들을 만나러였다. 당시엔 여행이라기보다는 경조사와 업무였기에 기왕 가는 거 뭘 또 챙겨 보는 게 나을까를 고민하다 출발 하루 전 아는 분에게 연락을 했다. 고향이 영월이었던 이 분이 추천한 장면은 봉래산에 자리한 별마로천문대에서 해 뜨기 직전 볼 수 있는 운해(雲海).
내가 사는 의정부에서 해 뜨기 전에 별마로천문대에 가려면 최소 새벽 2~3시에는 출발해야 하는 난점이 있었지만 그렇게나 멋진 장면이라면 뭔들 못하랴! 순서상 만화보다 먼저기는 하지만 운해를 시작으로 영월을 돈 후 단양으로 넘어가자고 결정한 후 눈을 비비며 새벽길을 달렸다. 몸 상태가 과히 좋은 편은 아닌지라 피로가 극심했지만, 그야말로 해가 조금 더 뜨자마자 구름의 디테일이 사라져 멋이 없어질 만큼 정말 찰나의 순간에만 만날 수 있는 절경 앞에 순간 넋을 잃어야 했다. 정작 별마로 천문대는 너무 일찍 온 건 둘째 치고 애초에 지금 공사 중인 모양이나,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봉래산을 찾을 이유는 너무나도 충분했다. 차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급경사의 연속이어서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만 한다. 산을 내려오는 도중 만난 봉래산 삼림욕장의 피톤치드는 여행길이 안겨준 덤이다.
영월 북단에서 남단을 훑도 단양으로 향하는 경로 상 운해를 감상하고 흥월리를 찾는 과정 사이에 볼 곳으로 고른 여행지는 바로 단종 유적지였다. 역사와 역사적 장소에 관심이 많은 내 입장에서 단종 이야기를 지나갈 순 없었다.
개인적으로 조선 왕조를 통틀어 가장 싫어하는 임금이 누구냐 하면 선조와 인조, 성종과 철종을 꼽는 편인데 다섯 손가락을 꽉 채우자면 꼭 들어갈 인물이 바로 세조다. 개인의 능력은 좋았지만 결국 조카 단종을 재위 3년 만에 쫓아내고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었기에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삼촌이 기어이 내린 사약을 자기 의지로 거부하고 목을 매 자기 의지로 세상과 이별한 조카이자,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에게서 물려받은 영특함이 돋보였던 소년 임금의 최후는 지금 봐도 애절함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궤가 많이 다르지만,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은 문득 짧고 조용히, 사라져간 월리를 겹쳐 보게 만들었다. 마침 무덤 저만치에서 마치 무덤을 지키듯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의 이름이 ‘정령송’이었는데,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사릉에서 옮겨온 소나무라 한다. 그걸 보니 단종의 흔적을 더 보고 싶어져 예정에 없이 첫 유배지인 청령포와 최후를 맞이한 관풍헌을 찾았다. 청령포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천상 유배지로, 강의 범람 때문에 오래 머물지는 못하였으나 떠나온 궁을 향한 그리움으로 쌓았다는 돌탑 망향탑과 궁이 있는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는 노산대가 있다. 관풍헌은 안타깝게도 한편이 공사 중이어서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기 어려웠지만 이곳에서 죽어 그 시신이 강에 유기됐던 것을 호장인 엄흥도가 수습해 지금 장릉 자리에 몰래 묻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나 가슴이 아프다.
장릉 근처의 마을길에는 원통하게 죽은 소년 임금과 그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이야기,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을 두고 민초들 사이에 형성된 도깨비 설화에 기반한 조형물들이 서 있어 재밌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단종을 지키는 도깨비 조형물들은 단종로에서 보덕사길로 꺾어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다리 ‘보리밭1교’와 그 주변에 배치돼 있다.
선암마을 ‘한반도지형’에서 지질학 공부를 하다
단종 유적을 다 돌고 흥월리를 거쳐 단양으로 넘어가기 직전, 물이 굽어 흐르며 한반도지형 모양을 띠고 있어 유명해진 선암마을을 찾았다. 사실은 가는 길목의 이정표를 보고 별 생각 없다가 핸들을 꺾은 건데, 도착하고 나니 이곳이 ‘강원고생대지질공원’의 일부로서 교육 시설들이 조성돼 있음을 알고 쾌재를 불렀다.
선택은 우연이었지만 그야말로 <달이 내린 산기슭>을 주제로 한 여행을 지질학적으로 완성(?)시키는 결과 아니었나 싶다. 지층이 형성되는 과정과 이곳의 주 성분인 석회암 분포에 관한 안내, 그리고 한반도 지형 저편의 석회암 광산과 시멘트 공장에 관한 이야기까지 다소 엉성한 듯하면서도 나름대로 충실하게 꾸며놓은 안내판이 인상적이었다.
지층명이 그러하듯 자연이 형성한 풍경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인간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장대하게 펼쳐진 우리나라 모양의 땅덩이를 보니 기묘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지막 일정이었던 단양 어상천면의 노두를 보러가기 전 지질학 공부를 한 번 한 기분이어서 왠지 모를 충실함에 젖기도 했다. 물론 이 더위에 예상치 못하게 등산을 해야 했던 건 힘들었지만 말이다. 청령포의 노산대도 등산을 시키더니만, 결국 이번 여행은 산을 빼놓고 이야기할 순 없었던 모양이다.
* 영상판 <만화 속 배경 여행>에서는 작품의 프롤로그 격인 단편 <산>의 배경지인 공기1리 마차분교장의 모습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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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소개
손장원 작가의 장편 데뷔작 <달이 내린 산기슭>은 본래 학산문화사 9회 통합공모전에 우수상으로 당선된 <산>의 장편판으로 학산문화사의 청소년지 ‘《찬스 플러스》에 연재된 출판만화였다. 하지만 단행본 1권 출간 이후 아무 전조도 없이 출판사 멋대로 연재를 중단하고 2권도 출판 불가 통보를 받았는데, 작가가 작품을 “재 연재 기회가 생길 때까지”를 전제로 포털의 도전 만화가, 웹툰리그 등에 올리면서 다시금 화제에 올랐다. 이후 미디어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정식 연재에 들어감으로써 ’웹툰‘으로서 독자들을 제대로 만나게 됐다. 이런 우여곡절로 말미암아 <달이 내린 산기슭>은 단행본 1권만 흑백판과 컬러판 두 권이 나오고 이후 분량부터는 웹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기묘한 작품이 됐지만 작가가 끝까지 독자와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끝내 완결까지 낼 수 있었다는 점 자체가 훌륭했다 하겠다.
http://webtoon.daum.net/webtoon/view/moonfo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