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진 <온> 배경지, ‘C시’ 춘천

분주한 젊음과 낭만 뒤에 고요함을 안은 강의 도시를 만나다

by 서찬휘

어떤 곳은 이름 자체가 아련한 추억이다. 주말과 방학이면 젊은 연인은 물론 먹거리와 마실 거리를 잔뜩 짊어진 대학생들로 북적이던 기차, 선로만큼이나 오래되어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서 더 추억을 쌓아가던 기차역… 서울에서 아주 멀지만은 않은 곳에 펼쳐지는 맑은 물과 숲 덕에 가벼운 주머니 삼삼오오 털어 모인 젊음들이 넘쳐나던 경춘선의 끝자락. 이번에 만화책과 함께 다녀온 곳은 바로 춘천이다.


01_소양1교_전경(파노라마).png 소양1교와 소양2교, 소양강 전경


유시진의 <온>


온_표지.png


개인적으로는 춘천을 몇 차례 오가긴 했지만 내 발로 천천히 음미하며 다닌 기억이 적다. 그럼에도 춘천 하면 막연한 호감이 떠올랐던 까닭은 춘천이라는 이름이 지닌 느낌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이번에 꺼내 든 작품 <온> 때문이기도 하다. 작중 C시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도시가 바로 이 춘천이다.


<온>은 <마니> <쿨핫> <그린빌에서 만나요> 등을 그린 만화가 유시진 씨의 2003년 작품이다. 모 드라마 주인공 이름 때문에 검색에 드라마가 걸려 나오는 일이 많아 난감하지만 유시진 씨는 성인 여성 독자층은 물론 생각의 수준이 높은 만화를 찾는 이들에게 사랑받는 만화를 그려온 만화가다. <온>은 그 중 애장판 형태로 총 3권으로 완결된 만화로 시공사의 격월간 순정만화 잡지 《오후》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온>에는 유시진 작가가 후기에서 “이 정도까지 원 없이 마음대로 그려보는 연재는 앞으로 다시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라 할 만큼 작가의 스타일이 농축돼 있다.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판타지 소설가이자 얼마 전 C시로 이사해 살고 있던 주인공 하제경은 서울에서 열린 출판사 송년회 자리에 참석하고 나와 잠시 들른 서점에서, 송년회 자리에서 스쳐 지나간 일러스트레이터 이사현이 그린 그림책을 만난다. 모르던 사이였고 그림책을 딱히 사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하제경은 책을 사들고 왔고 내용을 읽으며 그만 눈물을 쏟는다.


이유도 모를 눈물, 그리고 이 책을 쓰고 그린 저자 이사현을 향한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 하제경은 마침 또 C시에 살고 있다는 이사현의 집을 물어물어 무작정 찾아간다. 뜬금없는 만남과 썰렁한 분위기. 하지만 둘은 어느덧 오랜 지기처럼 만남을 이어간다.


두 남성 간의 알 수 없는 끌림과 기묘한 교우 묘사는 나온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브로맨스 장르의 밀당감을 느끼게 하지만, 작중 주인공인 판타지 소설가의 신작 소설과 현실을 교차하던 이야기가 실은 주인공들의 과거와 현재였음을 드러내는 구성은 그러한 쫄깃한 감상조차도 잊게 만드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특히 사람과 사람 간에 쌓이는 사랑과 증오의 정체를 건조한 듯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기에 요즘과 같은 공감맹 시대에 일독을 권할 만하다.



작품 속 C시,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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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두 주인공은 우연히도(?) 같은 C시에 산다. C시는 작중에서 주인공 하제경이 조건을 따져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인 곳으로 고른 공간이다. 그 조건이라 함은 (1) 집에서 독립하고 싶었고 (2) 조용한 곳에서 한동안 일에 집중하고도 싶었으며 (3) 자금 사정은 그다지 풍족하지 않다-였고, 그 결과 하제경이 사는 곳은 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아파트가 되었다.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하제경이 방안에서 바라보는 이 풍경이 참 궁금했다. 서울에서라면 웬만한 돈으로는 꿈도 꿀 수 없을 이 풍경이 보이는 공간은 대체 어디일까. 여행 하면 복잡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재미도 있겠지만, 난 오로지 그 하나만으로도 춘천이 새삼 궁금해졌더랬다.


작품에서 하제경의 집 앞 풍경은 각종 신화와 설화는 물론 오만가지 작품 속에서 현계와 이계의 경계선으로 묘사되곤 하는 ‘강’의 모티브가 저만치나 널찍하게 펼쳐지면서 적당히 적막한 인상이다. 게다가 작품 속 배경은 겨울이어선지 한없이 조용한 느낌이다. 이와 관해 유시진 씨는 2006년 4월 세 번째 권 분량의 온라인 연재를 앞두고 연재 업체 담당자와 진행한 서면 인터뷰를 통해 ”따뜻할 때 가면 대학들도 많아서 나름대로 복작거리는 곳이지만, 저는 주로 겨울에 갔기 때문에 사람 없고 깨끗하고 적막한 분위기에 나름대로 감명 받았습니다. 그래서 배경으로 잡았습니다“라고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이런 이중적인 매력을 모두 안고 있는 점이 춘천의 매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춘천은 사실상 완성된 레저 관광 도시라 가자면 갈 곳이 참 많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내가 가장 궁금했던 그곳, 작품의 도입부와 후반부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는 하제경의 집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상대역인 이사현네의 경우 이곳이 어디다 하고 특정할 방법이 없어 실패했지만, 춘천이 품은 강줄기를 가로지르는 유난히 소박한 다리와 이 다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하면 특정할 만했다.


작중 묘사에 기초해 찾아낸 곳은 바로 소양1교와 그 끝자락에 자리한 한 아파트다.



하제경의 집, 소양1교와 그 앞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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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1교는 춘천 시내를 지나 소양강 상류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었다. 처음 본 인상은 말 그대로 ‘정말 낡고 좁다’. 그도 그럴 게 일제강점기가 후반으로 접어들던 1933년 건설된 다리라 하니 올해로 여든다섯 살이나 잡수신 다리 되시겠다. 얼마나 좁냐면, 고작 1차로에 인도가 가까스로 설정돼 있는 수준이다. 한국전쟁 당시만 해도 소양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던 탓에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 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다리 곳곳에 총알 자국이 보인다.


원래의 난간이 내 무릎 정도밖에 오지 않을 만큼 낮아 위에 철제 난간을 부설해 놓았다. 그래봐야 맘만 먹으면 타고 넘어 강 아래로 뛰어내리기 딱 좋은 높이인지라 난간에는 곳곳에 자살 만류용 문구와 정신 상담용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이 낮디 낮은 난간을 발판 삼고 서서 낚시를 즐기는 나이든 조사를 보며 간담이 서늘하기도 했다.


이 다리는 소양강 상류와 소양강댐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좌회전만 가능한 일방통행인지라 반대편으로 돌아가려면 아파트 앞 도로를 통해 멋지게 새로 지은 소양2교 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현대에 남은 과거의 흔적은 그 자체로 기묘한 풍경을 자아내지만, 그 때문인지 작중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대비되는 기분도 든다.


다리 끝자락에는 이 다리를 배경으로 삼은 하창수 작가의 소설 <숨막힘>이 짤막하게 소개돼 있었다. 나는 <온>도 이 다리 입구에 함께 소개됨직 하다고 생각한다. 마침 춘천 곳곳에는 춘천을 소재로 삼은 시와 소설 등 문학가들을 소개하는 알림판이 참 열심히도 설치돼 있다. 뿐만 아니라 너무나 유명한 대중가요 <소양강 처녀>를 기념하는 소양강 처녀상과 노래비도 소양2교 옆에 큼지막하게 서 있는 등 문화적 토양을 조명하는 데에 시 차원에서 꾸준히 관심을 보이고 있는 듯하다. 춘천에 애니메이션 전문 고등학교와 애니메이션 박물관이 있기도 하고 보면, 기왕 춘천의 한 공간을 모티브로 삼은 만화도 해당 공간 앞에 소개해 볼 만하지 않을까.


각설하고, 작품 속에서 하제경이 보는 다리 풍경을 확인해 보기 위해선 다리 끝에 선 아파트로 가야 한다. 다리 좌우로 아파트가 세 단지 서 있지만 그 가운데 다리 통행방향으로 볼 때 끝자락 바로 왼편에 서 있는 첫 번째 단지가 각도 상 맞다. 이곳은 1994년 11월 준공한 아파트로 12층~15층으로 구성돼 있다. 강을 접한 쪽은 12층. 혼자 강이 보이는 76m2(약 23평) 짜리 집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서울 한강변 아파트에 비해 서너 배 이상 싼 가격으로 전세를 구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집 대출 이자에 매월이 힘든 글쟁이 입장에서 작중 주인공이 든 이주 조건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까? 그런 우울한 주머니 여력 생각을 하며 아파트를 오르니 작품 속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건너편의 봉의산과 아래의 건물들까지 보인다. 강폭이 한강만큼은 아니어도 300m는 족히 넘는지라, 아파트 즈음은 여름의 짙은 녹음과 겨울의 한파에도 그 자리를 지배했을 고요함이 함께하고 있다. 널따란 강폭 사이를 흐르는 수량도 번잡한 생각을 잊게 하는 묘미가 있다. 이 풍경 앞에서라면 한동안 글만 쓰고 있을 수 있을 법도 같았다.


작품의 드라마는 바로 이 시야에서 시작되어 강을 건너 춘천 변두리 즈음에 있을 이사현의 집으로, 나아가 작중 나단(하제경)과 사미르(이사현)가 관계한 이계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추방된 자와 추방에 일조하고 후회하는 자의 이야기가 자아내는 기묘한 정취를 만나고 싶다면 춘천에 올 때 바로 이곳에서부터 걸음을 시작해 봄도 좋겠다.



기왕 온 춘천, 조금 더 맛보기


19_이디오피아벳.jpg 한국최초의 원두커피집, 에티오피아 벳


정오 무렵 도착해 길이 300여m짜리 다리를 천천히 왕복하며 소양강을 감상하고, 아파트를 올라 보고,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니 시간이 어느덧 두 시간 정도가 지났다. 그냥 도시 변두리의 작은 집 정도로 묘사된 이사현의 집을 찾기엔 정보가 부족함을 아쉬워하며, 다만 작품 속에 묘사된 춘천의 풍경 곳곳도 만날 겸 차를 몰고 이곳저곳 이동해 보았다. 기왕 강을 보러 왔으니 그 강의 끝(?)도 보고 싶다며 별 생각없이 달려간 소양강댐에서는 박정희 시대의 거대한 자부심이 묻어나오는 갖가지 조형물과 여지없이 박혀 있는 박정희 친필이 이 시점에 이르러 굉장히 기묘한 기분을 자아낸다. 시내 쪽에 있는 소양강 처녀상보다 조금 더 노래의 정서에 어울리는 동상이 소양강댐 쪽에 둘이나 서 있었던 점이 오히려 더 재밌었다. 이들 동상 크기는 딱 사람 키만하다.


뒤늦게 출출해진 배를 채울 걸 생각해보니 결국 춘천 하면 닭갈비와 막국수 외에 떠오르는 게 없어 그 가운데 역사가 조금 더 긴 막국수를 직접 뽑아 먹어보기로 했다. tvN의 <알쓸신잡>에도 등장했던 춘천 막국수 체험 박물관은 방송에 나와서가 아니라 막국수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주효한데 도슨트를 맡은 중년 직원분의 열띤 소개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메밀은 원래 끈기가 없고, 요즘은 식감을 좋게 한다고 전분이나 밀가루를 섞곤 한다. 춘천 사람들은 일부러 안 쫄깃한 면을 내는 식당을 찾아다닌다”라는 고급 정보만으로도 찾아간 보람은 충분히 챙겼다. 막국수 면 뽑기 체험은 기본이 2인분 단위인 통에 혼자서 2인 요금을 내고 체험했다. 주 체험 대상인 아이들 입맛에 맞춰 약 메밀 함량은 6할 정도로 하고 있다고 한다. 재미와 맛을 모두 챙길 수 있었는데 언젠가 아이와 함께 꼭 다시 와야겠다 싶었다. 원래 겨울에 동치미 국물 부어 먹던 음식이기도 하고 메밀이 찬 성질을 지니고 있으니 더위를 식히기에도 제격이라 하겠다.


마침 ‘메밀꽃 필 무렵’에 춘천에 왔으니, 메밀꽃밭을 안 가 볼 도리가 없었다. 딱 6월 한 철 볼 수 있는 풍경이고 요즘은 메밀 재배가 타산이 안 맞는 통에 조경용 아니면 지자체에서 조성한 정도가 전부라는 상황이라 더욱 귀한 풍경이다. 춘천시 서면 신혜리 741번지 일원에 조성된 메밀꽃밭은 그야말로 여름 초엽에 만나는 눈밭이라 할만했다. 다소 가물어 있는 느낌이긴 했으나 분위기를 만끽하기엔 지장이 없었다.


우리나라에 원두커피 문화를 처음 전파한 이디오피아 벳(벳은 ‘집’을 뜻하는 이디오피아 말. 이디오피아 한국전쟁 참전 기념관 앞에 있다)에서 커피 한 잔을 사 마시고 다시 소양강처녀상 앞쪽으로 이동했다. 차 댈 곳이 마땅치 않아 다소 헤매긴 했는데, 건너편 골목의 스카이워크 관람객용 임시 주차장을 이용했다. 마냥 기다리기만 하긴 커녕 상대가 어디에 있든 쫓아가 목덜미를 질질 끌고 올 듯한 인상을 주는 소양강 처녀상을 잠시 구경하고 노래 한 구절을 들어본 후 스카이워크로 가 보았다.


유리로 바닥을 구성해 하늘을 걷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스카이워크는 요즘 레일바이크만큼이나 여러 지자체에 우후죽순 생기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하지만 춘천의 스카이워크가 그래도 인상 깊은 건 끝자락에서 보이는 쏘가리 조형물 <자연의 생명> 때문이다. 조형물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는 일제 강점기 후반 대륙침략용 에너지원으로 화천댐을 짓는다고 춘천역에서 화천까지 건설자재를 실어 나르던 케이블카 교각이라고 한다. 이를 알고 나서 보니 다소 쌩뚱 맞아 보이던 조형물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19시 무렵 입장료 2천 원을 내고 스카이워크와 조형물을 구경하고 나오는 길, 때마침 기막힌 타이밍으로 근처 산기슭에 있는 삼운사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너른 강가에 비치는 저녁노을과 절집의 종소리는 각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강과 강 위의 작은 다리 하나를 보겠다고 달려왔지만 짧은 시간 동안에 그 외의 풍경도 소소하게 챙길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만화 속 계절과는 전혀 다른 시기에 왔지만, 새삼 내 발로 걸어 본 여름과 겨울의 정취를 모두 즐길 만한 도시였다. 차를 몰고 온 탓에 경춘선을 탈 일은 없었지만 괜히 한 번 이름 자체가 ‘청춘’인 ITX 청춘의 분위기를 느껴보자고 춘천역에 들렀다가 스카이워크 입장료를 내고 받은 2천 원짜리 지역 상품권으로 음료수를 사들고 나왔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운전을 하다 보니 저만치에 옛 풍경을 간직한 채 새 길들 사이에 묻혀 가는 강촌이 보였다. MT를 치른다며 왔던 기억들과 그래피티가 잔뜩인 강촌역 옛 풍경이 떠오른다. 춘천은 이렇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키며 기묘한 기분에 빠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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