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인지적 픽셀이다

이누이트족의 눈과 순록의 이름

by 자민
아직도 세상에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존재들이 많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이름 붙인 만큼 보인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그 풍경을 묘사할 수 있는 언어가 많은 사람에게
그 장면은 더 선명하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해상도가 높다”라고 한다



하늘 아래 같은 사람, 같은 인생은 없다고 한다. 기질이나 환경이 비슷한 사람이라도 각자의 삶은 너무나도 다르다. 그것은 각자가 삶에서 무엇을 느끼는지, 고통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발견하는지에 따라 삶의 깊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언어와 인생에 대해 글을 쓰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름을 가진 것 만을 명확히 인식하고, 구분하고, 사고한다.

지금 너무나도 당연하게 사용하는 언어조차 처음에는 당연하지 않았다. 선조들이 그들이 보아온 세상을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기에, 우리는 ‘노을’, ‘단풍’, ‘별빛’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즉각적으로 포착하고 더 깊이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글은 언어가 생긴 과정과 언어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면서 앞으로 우리가 언어를 대해야 하는 자세를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색 이름의 탄생

언어학자 브렌트 벌린(Brent Berlin)과 폴 케이(Paul Kay)의 연구에 따르면,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색깔의 단어는 일정한 순서로 생겨났다고 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흑과 백, 즉 밝음과 어두움을 구분하는 단어다. 그다음은 피와 불의 색인 빨강인데, 가장 먼저 독립된 이름을 가진 색이다. 이어서 식물과 흙의 색인 노랑과 초록이 이름을 얻었고, 파란색은 그보다 훨씬 나중에 등장했다. 파란색이 가장 늦게 등장한 이유는 하늘과 바다를 제외하면 자연계(꽃이나 동물, 광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색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늘과 바다는 자연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데, 왜 처음부터 파란색으로 불리지 않았을까.

고대 인도에서 하늘은 색보다 광명(밝음)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눈부시다, 어둡다, 붉다’ 등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에서는 바다의 짙고 어두움을 색보다 질감으로 인지하여 바다는 포도주 빛 바다(wine-dark sea)로 묘사되었다.

고대인들에게 하늘과 바다는 단순히 함께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이기보다 경외와 숭배의 대상 즉, 신적인 존재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일상적인 사물에 색 이름이 붙여지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언어가 발전하다가 뒤늦게 색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처럼 언어의 발전은 인간의 역사와 그 길을 나란히 해왔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 구조를 만든다

1930년대, 에드워드 사피어와 그의 제자 벤자민 워프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언어 상대성 가설을 처음으로 (언어학적 실증연구 기준) 제안했고, 이 관점은 이후 연구자들에 의해 ‘언어결정론(Linguistic Determinism)’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했다.


언어결정론은 강한 언어결정론과 약한 언어결정론으로 나뉜다.

강한 언어결정론은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완전히 지배하고 결정한다는 주장이고, 약한 언어결정론은 에드워드와 벤자민이 제안한 언어 상대성 가설과 유사한 주장으로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지는 않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약한 언어결정론에 따르면, 언어는 우리가 정보를 처리할 때 사용하는 인지적 도구다.

따라서 특정 단어나 문법 구조가 발달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와 관련된 현상을 더 빠르고 예리하게 인식하게 된다. 언어가 사고와 지각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이 이론은 많은 연구와 실험들에 의해 뒷받침되었는데, 약한 언어결정론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로 이누이트 족의 눈(snow)과 순록의 이름이 있다.


이누이트 족의 눈과 순록의 이름은 다양하다.



눈과 순록을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가 발달한 이유는 그들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북극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활용도가 높은 눈과 순록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눈은 생활 전반에 있어 기본적인 재료가 되기 때문에 집을 지을 수 있는 눈인지 아닌지, 사냥하기에 좋은지 아닌지, 이동가능한 눈인지 아닌지 등을 구분할 수 있어야 했다.

순록은 고기뿐만 아니라 가죽과 뿔도 사용되었다. 새끼 낳은 암컷은 영양가가 높은 고기이며, 늙은 수컷은 육질이 질기지만 뿔이 훌륭하다. 이처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사냥할 때 순록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이누이트 족의 눈과 순록을 나타내는 단어가 많이 발달을 한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아랍인과 낙타, 한국인과 쌀이 있다.


아랍인들은 낙타의 나이, 성별, 임신 여부, 털 색깔 등에 따라 100개 이상의 단어로 낙타를 표현했다. 이는 사막 유목민이었던 아랍인들에게 낙타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이동 수단, 식량(우유와 고기), 옷감(털), 화폐(재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척박한 사막에서 낙타의 작은 상태 변화를 놓치는 것은 곧 죽음과 직결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낙타의 나이, 성별, 건강 상태, 걸음걸이, 물을 마시는 습관, 임신 여부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을 붙여 주었고, 이를 통해 즉각적이고 정확한 소통을 도모한 것이다.


한국인들도 벼, 나락, 햅쌀, 멥쌀, 찹쌀, 싸라기, 진밥, 된밥, 진지, 밥알, 누룽지, 죽 등 쌀의 용도와 상태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불렀다. 쌀의 형태와 조리 방법, 사용 맥락에 따라 정교하게 구분된 어휘 체계를 갖추고 있다. 또한 벼의 적절한 수확 시기를 판단하기 위해 벼가 익어가는 과정을 표현하는 노란 계열의 색 단어도 발달했다. ‘누렇다’, ‘누르스름하다’, ‘샛노랗다’, ‘노르 끼리 하다’, ‘누리끼리하다’ 등 미묘한 색의 차이를 구분하는 표현들 덕분에 농부들은 색의 변화를 통해 벼의 성숙도를 판단하고 최적의 수확 시기를 결정할 수 있었다. 벼가 ‘누렇게’ 익었는지, ‘샛노랗게’ 익었는지에 따라 쌀의 품질과 수확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 미묘한 차이를 포착하는 언어가 생존에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인간의 삶의 현장인, 아랍인의 유목생활과 한국인의 농경문화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다. 단어의 발달은 단순히 ‘단어가 많다’는 사실을 넘어선다. 세상을 표현하는 단어가 풍부할수록 인간의 뇌는 현상을 더 세밀하게 쪼개어 관찰하도록 훈련된다. 마치 픽셀이 작아질수록 화면의 해상도가 높아지는 것처럼, 상태와 현상을 표현하는 단어가 많다는 것은 인지적 해상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과 생존의 필요성이 언어를 정교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문화가 되고, 그렇게 발달한 언어가 다시 세상을 바라보는 인지 능력을 예리하게 만들었다. 이 순환(spiral) 구조가 언어가 발달하는 방식이다. 언어로 대상을 자세히 분별함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더 명확히 사고하고, 미래를 준비하며, 환경에 대비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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