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한 살 가을무렵, 대학교 때 친했던 동생을 통해 지금의 남편을 소개받았었다. '언니~ 이 선배 여자후배들한테 인기 많아요. 1년 전까지 쭉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마침 지금 딱 없어요! 성품이 진짜 좋은 선배예요. 언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한 번 만나봐요' 하며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는데 외모가 영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소개해준 친구 입장도 있으니 그래도 예의를 다해야지. 밥 대충 먹고 맥스 40분 컷으로 나와야겠다' 생각하고 하루 종일 회사에서 세상 쩔은 얼굴 그대로 화장도 고치지 않고 소개팅 장소로 향했는데,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사진 속 남자가 없었다.
'설마. 설마. 저기 앉아 있는 저 (이석훈 느낌 나는) 멀쩡하게 생긴 남자는 아니겠지.'
갑자기 멘탈이 흔들렸다. 후배가 보내준 사진엔 더벅머리 안경잽이에 수더분한 농촌총각 같은 이미지였는데, 세상 다른 스타일의 깔끔하고 지적인 내 평소 이상형인 이석훈st의 남자가 떡 하니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머리모양이랑 안경테 바뀐 것 만으로 사람이 이렇게 다른 느낌이라고? 구렁이 신랑 테스트도 아니고. 하. 망했다. 립스틱이라도 다시 바르고 올걸'
소개팅 자리에서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타날수록 매력이 반감기로 팍팍 줄어드는 나는 어김없이 뚝딱거리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멘탈을 부여잡고 무슨 헛소리를 해 댔는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대화를 해보니 진짜 사람이 더 괜찮았다. 이성적이고 지적이고 차분하고 따뜻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I와 E가, F와 T가 딱 반반씩 섞인 혼종 같았다. '망했다. 하루 만에 콩깍지다. 내 금사빠 화력에 기름을 들이붓는구나. 침착 또 침착하자. 너무 마음에 든 티 내면 안된다고!'
말은 안 했지만 행동과 말투에서 이미 '저 그쪽 마음에 들어요! 근데 티는 안 낼 거예요'가 다 읽혔을 것 같은 느낌. 이미 심하게 말린 것 같은 느낌. 망한 느낌적인 느낌. 그런데 상대방도 내가 썩 싫지는 않은 눈치다. 서로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카톡이 왔다.
'연락드릴게요! yoon씨,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예! 연락 왔다. '근데 연락드린다는 말은 있는데, 다음에 만나자는 말은 없네? 예의상 한 말 아냐?' 절망회로와 희망회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최대한 도도한 여자처럼 약간의 텀을 두고 15분 뒤에 답장을 했다.
'네 저도 즐거웠어요! 조심히 들어가시고 연락 주세요'
연락드릴게요가 아닌 (니가) 연락 주세요! 난 절대 먼저 연락 안 할 거라고!
저 카톡 이후로 3일 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하.
친구들한테 '완전 이상형 만났다고, 그쪽에서 연락 준다고 했다고, 이제 곧 연애할 것 같다고' 세상 설레발을 다 떨고 있었는데, '다음 만날 땐 뭐 입지' 김칫국 세 사발 드링킹 하고 있었는데 연락이 없다니. 그래도 지금까지 한 소개팅 중에 한 번 빼곤 다 애프터를 받았었는데, 이 남자, 두 번째로 날 깐 남자가 되는 건가.
'언니~ 선배 만나봤어요? 어때요? 선배 진짜 괜찮죠?' 주선자 동생의 연락이다.
'그날 재밌게 잘 만나고 왔는데, 연락 준다고 하셨는데 3일 지났는데 아직 연락을 안 주시네. 그냥 예의상 하신 말인 듯. 나 까인 것 같애 ㅋㅋ 근데 괜찮아!! 그렇게 엄청 소름 끼치게 마음에 들었던 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 선배한테는 절대 이야기 하지마!!!'
세상에 널린 게 남자다. 아쉽지만 아쉽지 않다! 합리화를 하고 있는데 1시간 정도 지나니 연락이 왔다.
'yoon씨, 제가 연락이 늦었죠? 추석 연휴에 가족들 하고 보내고 계실 것 같아서 연휴 지나고 다음 번 만날 약속 잡을 때 연락드리려고 했어요.'
알고 보니 남편은 소개팅이 난생처음이었다고 한다. 연락드린다고 하고 다음 만남 전까지 계속 연락해야 하는 소개팅의 기본 룰을 몰랐다며, 만나기 전 날까지만 연락하면 되는 줄 알았다고 하는 것 이었다. 주선자 동생에게 절대 말하지 말랬는데, 아무래도 남편에게 기어이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선배! 언니 마음에 들면 만나기 전까지 매일연락해야죠! 최소 세 번은 봐야죠!'
주선자 동생 성화에 떠밀려 억지로 나온 건지 진짜 다음번 데이트 전에 연락을 하려 했던 건지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그 후로 세 번 더 데이트를 하고 네 번째 만난 날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어린 시절, 학창 시절, 그리고 20대의 여러 가지 마음고생과 고민들은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에서도 엄두가 나지 않아 글로 담아내지도 못하고 있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고단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런 내 인생에 반전이라면 아마도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간 만났던 남자친구들은 불꽃처럼 화라락 다가왔다가도 금세 식어버리거나, 내가 마음을 여는 순간 멀어졌다. 그런 상대를 보고 있으니 내 안의 불안을 컨트롤하지 못해 끊임없이 집착하게 되었고, 여러 이유로 이별하게 되었고, 상처를 받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서로서로 미숙했던 시간들이었다.
나는 내가 남자 보는 눈이 지하 20층에 집착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남편과 연애를 하고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이 증명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남편은 나를 나답게 살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소심하고 예민한 모습이 불쑥 튀어나올 때도 내 안의 따뜻함을 믿어주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많이 좋아하면 달아날까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더 많이 좋아하는 마음으로 보답해 나를 불안하지 않게 했다. 내가 심지어 나 자신에게 한결같지 못할 때도 나를 참 한결같이 꾸준히 사랑해 주었다.
사소한 걱정이 많은 나에게 무엇을 해 줄까 고민하다 난생처음 해보는 바느질로 걱정인형을 만들어 온 사람. 엉엉 울며 전화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람. 나와는 달리 건강한 부모님 밑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큰 사람. 구김 없는 사람. 따뜻한 사람. (팔불출 같군.) 1년 10개월간 행복하고 열심히 연애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했다.
지금도 가방에 늘 챙겨 다니는 걱정인형 :)
17년 9월 9일. 우리 결혼식 청첩장 문구 :) 벌써 6년이 지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청첩장에 들어갈 단어 하나도 정성스럽게 써 내려가며 준비하던 결혼이었다. 이래도 저래도 다 괜찮다고 했던 여전히 자유도 높은 남편과 달리, 웨딩홀에 준비되어 있던 패키지 상품은 어딘가 모르게 하나씩 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웨딩플래너가 제시하는 금액도 하나하나 따져보니 석연치 않았다. 조금만 발품을 팔아 알아보면 내가 원하는 구성으로 합리적인 비용의 결혼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직접 각각의 웨딩업체들과 연락하며 거의 반쯤 웨딩플래너가 되어 준비했다.
숨 쉬는 것 빼고 다 결정하는 것 밖에 없던 3개월. 내가 고심해서 최종 두 가지의 엔트리를 올리면, '저 결정장애인 yoon을 어떻게 해서든 한 번만에 선택하게 만들고 말리라'는 남편의 비장함과 탄탄한 논리가 더해져 함께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자잘자잘한 다툼도 있었던 것 같지만, '즐겁게 하자 yoon아'라고 자주 이야기해 주며 회사 일처럼 결혼준비 하던 나를 잘 잡아주던 남편 덕에 즐겁게 준비했던 기억이 더 많다.
바쁜 일정에 시간을 내어 축하하러 와 주신 가족들, 지인들. 그날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하다 :)
벌써 여섯 번째 결혼기념일이다. 우리의 결혼관인 '설레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잘 살고 있다. 남편은 장점도 단점도 놀랍도록 한결같다. 난 결혼하고 나서몸무게도 좀 늘어났는데, 남편은 몸무게마저 한결같다. 처음 만날 때도 'yoon이가 놀라울 만큼 나는 한결같을 거다'라고 말했던 남편이었는데 정말 그렇다. 단점은 안 한결같아도 될 텐데, 생각하면서도 단점 투성이인 나부터 돌아보자 생각한다.
'이 지옥 같은 인생에 왜 태어나야 할까. 행복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로 가득했던 마음이었다면, 남편과 함께한 8년, 같이 산 6년이 '인생 한 번 살아볼 만하구나. 세상에 이런 행복도 있구나'로 변하게 했다.
여보 고마워
3일 동안 머리 안 감고 화장 안 하고 있어도 똑같이 바라봐줘서
반찬 사러 산책하러 같이 가줘서
퇴근할 때 뭐 맛있는 거 사갈까 물어봐줘서
똑같은 문제로 맨날 고민해도 들어주고 괜찮다고 해줘서
늘 나보다 더 많이 기다려줘서
더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나랑 결혼했는지 이제 안 물어볼게! 그 대신 내가 여보에게 걸맞은 좋은 사람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