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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윤 Sep 01. 2023

30대 마지막 생일을 보내며

휴직 27주 차 기록




8월 31일.


누군가에겐 일 년 중 여러 날 중 하루일 뿐일 테지만, 바뀐 나이 계산법 덕에 내년에 한 번 더 남아있는 30대 생일이지만, 예전 나이 기준으로는 어제가 서른아홉 생일날이었다. 카카오톡이 알려주는 생일 알람 덕에 눈을 떠서 다음 날 자정이 되기 전 늦은 저녁까지 축하 톡과 선물들이 차곡차곡 도착했다. 서로 알고 지낸 지 20년이 넘어가는 친구들부터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람들의 연락까지, 생일 덕에 오랜만에 안부를 고 고마움을 전했다.


나는 유난히 지인들의 생일을 한 번 들으면 잘 잊지 않는 편이다. 자동적으로 아침에 눈을 뜨면 '아 오늘 누구 생일이네?' 이렇게 떠오른다. 뭔가 그 사람의 이미지를 태어난 월과 연관 지어서 기억하는 편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보다 짧은 숫자를 잘 기억하는 편 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 지인들의 생일을 잘 챙기는 편이었다. 보내기도 참 편리해진 기프티쇼의 커피 한 잔, 맛있는 디저트는 진심으로 돌려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함께 너는 나에게 참 소중한 사람이고, 생일날 하루만큼은 어떤 근심도 없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누군가의 생일에 진심으로 축하해 준 내 마음이 고스란히 돌아오지 않을 때 마음이 쓰이고 섭섭한 감정이 들 때도 있었다. 왜 나는 이렇게 생일이 잘 기억나는 것일까. 순수하게 축하해주고 싶었던 마음이 내 생일날이 되어 챙겨지지 않는 것 같은 기분, 섭섭함으로 다가오는 기분이 별로였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확실히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었다. 다들 사는 게 바쁘기도 할 테고, 그 사람의 상황이 여유가 없을 수도 있고,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을 존중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내 스스로도 무분별한 축하보다 내가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작은 선물을 보내며 충분히 채워지는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요즘 내 마음과 몸을 돌보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핑계로 주변을 거의 챙기지 못했는데, 올해는 '주변이 나를 이렇게 살뜰히 생각하고 아끼는구나, 나의 행복과 평안을 바라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구나' 싶을 만큼 감사한 마음을 많이 받았다. 내가 무언가를 더 주고 노력해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서먹한 관계가 오래 지속되며 연락을 하지 않았던 친구도, 나 혼자 미움을 키워가며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던 선배도, 생일을 빌미로 툭 던져주는 안부에 시큰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모든 인간관계가 말끔해진 것은 아니지만, 한 구석에 어려운 마음이 있었던 몇몇 관계들이 조금은 편안해지면서 작은 계기가 되어준 생일에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9월 1일이었던 개학과 개강 덕에 학교생활을 할 땐 늘 내 생일 다음날 아니면 다다음날에 축하를 받았다. 철없던 꼬맹이 시절엔 생일이 8월 31일이라서 매번 생일 다음 날 축하를 받는다며 엄마에게 '하루만 늦게 낳아주지 그랬어! 나 여름생일 말고 분위기 있는 가을생일 하고 싶다고!' 하며 투덜댔던 기억도 있다. (참 철이 없긴 했다. 고작 하루 차이인데도 8월이 주는 느낌과 9월이 주는 느낌이 확 다르다)


생각해 보면 만삭의 몸으로 제일 뜨거운 7~8월 더위와 습기를 온전히 생으로 이겨내며 여름의 마지막에 나를 낳았을 엄마다. 임신도 육아도 경험해 본 적 없지만, 에어컨도 없었을 시절에 이 더위를 견디며 나를 품고 있었겠지 싶은 생각이 들며, 올해 소름 돋는 더위를 느끼며, 유독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이 더위에 여름 끝까지 내 품고 있었겠노. 낳아줘서 고맙디. 안 겪어봤는데도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알 것 같다. 엄마 근데 내 세계 최대 부자 빈살만이랑 생년월일 똑같대. (지금까진 몰랐는데 얼마 전 내가 빈살만이랑 생년월일이 같은 걸 알게 되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여전히 보고서 쓰는 일개미일 뿐이지만 왠지 희망을 품게 ) 대박이제? 난 이제 내 생일 딱 마음에 든다. 진짜 나도 부자 될지도 모른디"


각설하고, 진심으로 낳아주고 키워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인생이다.




반찬가게에서 생일 쿠폰 문자가 왔다. '소고기미역국'을 무료로 가져가라는 내용이었다. 반찬가게에서 잡채, 탕수육, 어묵볶음을 사고 미역국을 가져와 옮겨 담아내는 수준의 셀프 생일상을 차렸다. (미역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반찬가게의 미역국이 훨씬 맛있..) 생일날이 평일이면 늘 회사에서 북적북적하게 점심을 먹고 팀장님께서 생일선물로 사 주시는 비싼 커피 한 잔까지 마셨을 테지만, 올해는 고요하고 단출하다. '뭐 갖고 싶은 것 없냐. 시간 지나서 후회하지 말고 빨리 말해라'는 남편에게 진짜 갖고 싶은 게 없어서 '진짜 없다'고 세 번쯤 말했다. 아 정말 나는 지금 아무것도 가지고 싶은 게 없구나. 지금 이대로도 충분한 요즘이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8월 31일, 올해 중 가장 큰 보름달인 '슈퍼문'이 뜬다는 기사를 봤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14년 뒤에야 볼 수 있다고 했다. 내 생일에 선물처럼 나타난 슈퍼문에 괜히 기분이 좋았다. 남편과 외식을 하고 집에 걸어오다 보니 오른편에 크게 뜬 슈퍼문이 보였다. 정월대보름 달에도, 첫 새해에도 늘 촘촘하게 소원을 빌지만 오늘도 여전히 간절 또 간절하다. 이젠 바라는 것보다 지키고 싶은 게 많아진다. 건강도, 편안함도.


그저 그렇게 지나가는 일 년 중 하루.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준 가족들. 친구들. 각종 사이트의 쿠폰들. 그리고 슈퍼문까지.


마흔에 맞이다음 생일까지 또 잘 살아내고 싶다. 모든 면에서 적당히 괜찮은 내가 되고 싶다 :)  


내 생일에 뜬 슈퍼문. 14년 뒤에 만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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